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윤준호, 「저 마왕의 성에 취직했습니다」(2020-1학기 <웹소설창작과비평>)
등록일
2020-07-10
작성자
국어국문학과
조회수
828


 

 

 

1

 

 

안타깝지만 귀하는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하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득 채우며 범람하는 문자열 속에서 정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몇 글자뿐이었다. 부족, 안타깝지만, 함께, 못하게 되다, 행운

 

그래, 이번에도 불합격이구나.’

 

수많은 불합격 통보를 받아왔었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회사는 불합격자를 나름대로 신경 써주는 것 같아서 내심 고마웠다. 여태껏 받아온 불합격 통보 중에는 달랑 한 줄짜리도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아예 무소식으로 일관한 곳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갖춰준 것이리라.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니 구석에 자리한 종이 뭉치가 눈에 걸렸다. 돈 나갈 데를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노트에 적어 놓았었지만, 오히려 시각적인 숫자의 압박에 전부 찢어버렸던 건데 아마 정리하는 것을 깜빡했나 보다.

독립하면서 가지고 나온 돈은 벌써 두 달 전에 동나 버렸다. 운이 좋아서 저번 달 방값은 밀리지 않았으나, 어느새 이틀 뒤로 다가온 정산의 시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편의점 새벽 알바를 하며 아득바득 버텨오는 내게 당장 돈이 떨어질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큰소리치고 나온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고민을 시작하자 손은 자연스레 주머니로 향했다. 어느새 내 손은 작은 나무막대를 쥐고 있었다. 고민이 있거나 불안하면 항상 이것을 매만지는 게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늘 내 옆을 지켜온 애착 가는 물건. 아니, 애증의 물건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아빠가 엄마와 내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기에

그보다 진짜 막노동판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하지만 몸으로 하는 일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은 20대 초반에 군대에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20대 후반인 지금 나에게 별다른 스펙이나 직장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긴 그래서 지원하는 족족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고민을 해봐도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어쩌긴 다시 시작해야지. 힘내자! ! ...”

 

억지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 마음속이 아닌 입으로 소리 내어 외쳤다.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방이 쿵쿵거리며 반응해왔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 칸짜리 고시원은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그 중 방음 문제가 제일 심했다. 지금처럼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해도 모두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지인 한 명 없는 나로서는 한 방에서 지내는 듯 한 착각에 들게 하여 적적함은 덜 수 있었는데. 공무원 시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옆방은 한껏 예민한 상태인지 오늘따라 반응이 유별났다.

나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자 화면에는 작은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어서 빈 공간을 채워 놓기를 재촉하는 것 마냥. 마치 내가 적어 넣지 못한 이야기들의 미래처럼.

 

그래, 쓰자. .”

 

작심하고 막 타자를 두드리려던 찰나 노트북은 픽 소리와 함께 뻗어버렸다. 자소서를 작성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는데 한동안은 망연자실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오래된 친구와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은 구닥다리가 되어서 간단한 작업에도 빌빌대기 일쑤였지만. 첫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노트북이었다. 내가 번 돈으로 직접 골라서 산 나만의 물건. 비록 돈이 모자라서 제일 좋은 모델을 살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이 녀석한테 더 애착이 갔던 것인데.

몇 번 두들겨 보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방법을 찾아도 봤다. 하지만 서비스센터에 가야 한다는 답변뿐 당장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잇따르는 불행에 방금 전 불어넣었던 기운마저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였지만 나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문제가 하나 발생하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문제가 따라왔다. 난 전생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만약에 진짜로 전생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대체 나는 뭐하던 놈이었기에 이 정도로 불행이 따르는 걸까 싶었다.

믿기 싫은 현실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 시절에는 이런 생각도 했더랬지. 눈을 감았다 뜨면 평소 즐기던 게임 속 세계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내 눈 앞에는 언제나 현실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차츰 현실에 순응한 나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다시 한 번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니. 그래도 이번만큼은, 잠시라도 좋으니까. 제발!

당연하게도 현실은 누렇게 뜬 물자국으로 모습만 바꾼 채 나를 잔인하게 반겨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허탈감은 나를 더 큰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허황된 꿈을 꾸던 학생이 나이가 먹고도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그러고 보니 시간 참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나도 어른이라니. 중고딩때 피시방에서 보내던 이후로 이런 느낌은 오랜만인데. 그리고 시간은 지금도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알바 갈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평소보다 고시원에서 조금 일찍 나왔다. 상황이 이러하니 투잡이라도 뛸 생각에 구인구직이 실린 신문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잡다한 전단지 나부랭이 몇 장만 붙어 있었고, 평소에 잘 보이던 신문은 오늘따라 한 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자 포기하려고 할 때 전단지 중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사람 구함>

급여 : 원하는 대로

번호 XXX-XXXX-XXXX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이건 완전 인터넷에서나 보던 인신매매 도시괴담에나 나올 법한 거 아닌가. 하물며 정말로 사람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 곳에 지원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결국 어이없는 전단지를 제외하고 정작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걸어 평소와 다름없이 편의점 반대편에 있는 골목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으아악! 그만 쫓아오란 말이야!”

절대 안 놓칠 거다! 너 죽고 나 좀 살자.”

 

골목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굉장히 큰 그가 가뜩이나 좁은 골목을 한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모습은 군대에서 보았던 거대한 멧돼지를 연상시켰다. 근데 그 멧돼지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 한 쪽으로 비켜서는데 그가 나를 보고는 외쳤다.

 

빨리 도망치게 이 친구야, 미친놈이 우리를 잡으러 오고 있어!”

 

우리?’

 

잠시 우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우리라면 지금 저 남자와 나를 포함하는 것 아닌가? 나는 저 남자를 오늘 여기서 처음 보는 셈인데 내가 왜 우리라는 집단에 포함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그는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남자의 퉁방울 같은 눈에는 자신이 왜 이런 소동에 휘말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혼란이 담겨있었다. 그가 덥수룩한 수염을 헤치며 입술을 벌릴 때였다. 남자의 뒤 쪽이 순간 밝아지더니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남자와 나는 그대로 골목 밖으로 날아갔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보자 커다란 그을음과 연기로 덮여 있었다. 폭발이 얼마나 심한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직격으로 당한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니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주변에 별다른 것이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새 사라진 것을 보면 몸은 이외로 멀쩡한가 보다. 다행히 나도 다친 곳은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난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난 폭발이 일어난 곳도 외관상으로는 멀쩡했다. 그래도 혹시나 불같은 게 났을까 싶어서 골목으로 발을 들인 나는 무언가와 부딪혀 다시 튕겨져 나왔다.

한 남자가 주저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종이들이 휘날렸다. 나 또한 연속으로 당한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나, 유독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혹시나 법적으로 문제를 삼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난 땡전 한 푼도 없는 상태인데. 아쉬운 놈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내 손은 무시하더니 일어나서 손을 사방으로 훑기 시작했다. 곧 그의 손에서는 작은 빛 알갱이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렇게 있던 남자는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짓더니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가 온 방향으로 뛰어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썼으나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있던 자리에는 종이 뭉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뭔가 싶어서 집어 들었는데 내용이 눈에 익었다. 아까 본 그 어이없는 전단지였다. 전단지를 붙인 사람이 누구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그 내용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든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각이었다.

 

 

 

결국 전 교대자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두고 보자면서 윽박을 지르는 교대자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소리가 없었다. 그나마 욕을 안 먹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당연한 일이지. 방금 전의 일을 누가 사실대로 믿어 줄까 싶었다. 나도 믿지 못할 일인데. 오는 길에 뜬금없는 폭발에 휘말리고 또 특이한 남자가 손에서 빛을 막 내뿜고. 차라리 이세계에서 용사 노릇하다가 늦었다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씩씩대는 전 교대자를 돌려보내고 일단 해야 할 일을 마무리했다. 매대를 정리하면서 폐기 식품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돈이 부족한 내가 여기서 얻는 것은 비단 월급만이 아니었다.

 

! 오늘은 참치마요 겟또다제.”

 

몇 안 되지만 팍팍한 삶에서 소소하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이런 거였다. 몇 번 움직이니 일은 금방 끝났다. 사실 이 편의점의 새벽 알바는 딱히 할 게 없는 편이긴 했다. 이제부터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원래는 자소서를 작성하고는 했으나 노트북이 고장이 난 이상 한동안은 못하게 되었으니, 대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웹소설 보기는 요 근래 재미를 붙인 새로운 취미였다. 원래 내 취미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요새는 돈과 시간이 둘 다 부족하기도 했고, 또 노트북이 오래되어 할 수 있는 가짓수가 줄어들게 되자 취미는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다. 웹소설 보기라고는 해도 돈이 항상 부족한 나였기에 그나마 보는 것은 전부 무료 연재분뿐이었지만.

얼마 전에 재미있게 보던 소설 하나가 유료로 전환되었을 때는 여러모로 씁쓸했다. 잘 되었으면 하는 작가가 성공하는 것은 축하할 일이나 나에게는 보게 될 가짓수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나도 돈만 있었으면, 그 놈의 돈만

스크롤을 내리며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한동안 비축해 두었던 것을 골랐다. 하얀 평지에 활자가 막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하필 손님은 편돌이라면 모두가 기피하는 대상 1호인 술에 꼴은 진상이었다. 근데 이 손님 낯이 좀 익었다 싶은데 아까 출근길에 본 이상한 남자였다. 머리 까지고, 배 나오고, 게다가 아까 본 그 얼토당토않은 종이 뭉치를 한가득 들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으허헝, 난 망해쓰어~. 술 가져와! ~!”

 

아무래도 오늘 새벽을 편하게 보내기에는 무리인가 보다. 대체 나는 어디까지 불행해질 수 있는 거냐. 이제는 두렵다. 이 저주받은 능력.

2

 

 

결국 잘렸다.

전 교대자가 사장에게 여태 내가 늦었던 일들을 고했고, 오늘 아침 나는 사장으로부터 얄짤없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솔직히 여태 쌓아온 스택이 터진 셈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의 통보는 듣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거냐. 박복한 내 인생아.

멘탈이 탈탈 털린 상태였기에 더 이상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러 악재로 인해 완전히 지쳐버린 심신을 달래고자 있는 돈 없는 돈을 그러모았다. 그리고는 몽땅 술을 사는 데 써버렸다.

 

데구루루

 

오후에 눈을 뜨니 발치에 굴러다니는 소주병들은 아침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고, 뒤따르는 숙취는 그 결정을 후회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써버린 돈과 찾아온 숙취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고자 가방 속을 뒤졌다. 집히는 것은 어제 편의점에서 챙겨온 참치마요 하나뿐.

이마저도 아침에 담아온 소주병의 무게에 짓눌린 것인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당장에 속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이거 하나뿐이었다. 모양이 더 이상은 훼손되지 않도록 소중히 봉지를 뜯고는 입에 욱여넣었다. 바싹 마른 입안을 느끼한 참치와 마요네즈가 휘감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우욱-“

 

결국 난 스스로 만들어낸 끔찍한 피조물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치우던 중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인생이라니내 인생은 왜 이렇게 비참한지 모르겠다. 어릴 적에는 한부모 가정이라고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질 않나, 성인이 되서는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하질 않나.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편린들은 나를 한도 끝도 없는 자괴감에 빠트렸다. 살아서 뭐하냐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래도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키워준 사람이었는데. 그런 어머니께 다시 한 번 손을 벌려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해 버렸다. 집에 있을 때만 해도 놀고먹는다고 눈칫밥 먹는 게 싫어서 큰소리 치고 나온 나였다. 그래, 이건 자존심 문제다. 게다가 그 강직한 분이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사내대장부가 지 인생도 하나 간수 못하냐? 이 밥버러지 같은 놈아!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하며 한 소리가 아니라 백 마디 말로 내 속을 후벼 댈 것이 분명했다. 비록 눈치와 구박으로 점철되는 일상이 견디기 힘들어서 독립을 선택한 것이었지만, 막상 삶이 버티기 힘들어지자 떠오른 이는 그래도 어머니였다. 아버지가아니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그 인간이 나를 말 그대로 싸질러 놓고는 야반도주를 했음에도 끝까지 날 키워준 사람이었고,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내게 남은 혈육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애정의 방식이 다소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긴 했다.

그에 반해 아버지라는 사람이 내게 남겨 준 것은 저주받은 이 몸뚱이 하나와 빌어먹을 이름 석 자. ‘박복한 내 인생아할 때의 그 박복한이 내 이름이다. 대체 왜 이 따위로 이름을 지은 것 인지는 지금에서도 모르겠지만 이걸 그대로 따른 어머니도 그랬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결국 난 이름 그대로 박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이, 과연 자식을 버린 자가 인간이 맞는 지는 둘째 치고라도, 아무튼 남겨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고민이 있거나 불안할 때면 손에서 놓지 못하는 작은 나무 막대. 원래는 기다란 하나의 막대기였는데 어머니가 이건 그 인간이 우리 모두에게 준 것이니 반으로 가르자고 해서 나누어 가졌다.

어릴 적부터 나의 장난감으로, 도구로, 부적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막대는 내가 자란만큼 몽땅하게 줄어 있었다. 아마 하도 만지작거려서 그랬으리라. 현재는 원래의 색도 크기도 잃은 채였지만 그래도 이거를 손에 쥐고 있으면 희한하게 모든 불안과 잡념이 물에 씻은 듯 사라졌다. 마침 지금도 내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있었고 당연히 이것을 잊고 싶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항상 주머니에 넣어서 다녔고, 어릴 적 일진들에게 맞아가면서도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다가 흘려버린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늘어진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한번 게워낸 덕분에 맑아진 머리에는 여러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어제의 기억이 번뜩 스쳤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진상 아저씨가 카운터에서 추태를 부렸었지. 아저씨기 너무 심하게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경찰에 신고도 했었다. 그러자 아예 넘어오려고 하기에 제지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몇 번 신체접촉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아저씨를 경찰에 인계한 후에 막대기가 내 주머니에 있는 걸 직접 확인했던 기억이 있었다. 설령 그 아저씨가 전설의 대도여서 나를 속인 것이라고 해도, 그 때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그럼 뭐였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침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그 아저씨의 손에서 나오던 하얀빛의 정체. 어제는 하도 정신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다 보니 신경조차 쓰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던 남자의 뒤에서 터진 이상한 폭발도 그랬고, 손에서 이상한 빛 알갱이들을 만들어내던 것도 그랬다. 혹시 요즘 즐겨보는 웹소설에서 나오는 능력자 비슷한 그런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완전히 미쳐버린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 남자와 만나보기 위해서 방을 나섰다. 직접 만나 확인해보더라도 손해는 아닐 터. 어제 본 전봇대에 붙어있던 엉성한 그 전단지를 떠올렸다. 문제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던 사이에 비가 왔었는지 사방이 젖어 있었다. 설마 비 때문에 찢어지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 제발 그대로 있기를 빌었다. 전봇대는 깨끗했다. 공무원들이 수거를 해버린 것인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던 중에 또 다른 어제 일이 생각났다. 그래 그 골목길! 거기에도 분명히 전단지가 있을 것이다. 사방으로 흩날리던 전단지를 떠올리면서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골목에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비 때문에 대다수의 전단지가 훼손된 채였지만 마침 구석에 있던 비교적 멀쩡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다. 딱 기다려라. 도둑놈아.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저씨, 아니 한부장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준비했다. 어제 통화하면서 전단지의 내용에 흥미가 있는 사람처럼 접근했었다. 괜히 직접 물어봤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인데 마침 먹혀든 것 같았다. 또 대체 어떤 기업이길래 저세상 공고를 하는 건지 실제로 궁금하기도 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셈이다. 자신을 한부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내일 아침에 자신이 근처 카페로 오겠다고 했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는 거라 몸이 찌뿌둥했다. 그동안은 편의점에서 새벽 알바를 해왔던 터라 원래라면 이제 막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는데. 게다가 어제는 일찍 잔다고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심지어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지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지만, 오늘은 내 소중한 물건의 행방을 알아보러 가는 것이니 서둘러야 했다. 준비를 끝내고 방을 막 나가려 하는데 노트북이 눈에 띄었다. 외출한 김에 이 녀석의 문제도 해결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노트북도 챙겨들었다.

카페에 들어서니 한부장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 앉자 한부장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나를 반겼다. 그리고는 아직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바로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계약서인 것 같았다. 저쪽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내게 급한 건 이게 아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부장님. 우리 구면 아닙니까?”

으응? 우리가 언제 한번 봤었나?”

엊그제 편의점에서 진상 부린 거 기억은 하십니까?”

진상? 아아, 그 때 그 알바생이었구만. 그건 내 미안하게 생각하네. 근데 자네 혹시 그 일 때문에 잘렸나? 그래서 새로운데 알아보는 거고? 그럼 잘됐네. 여기는 말이지

 

이후 한부장은 자신이 할 말만 속사포로 쏟아냈기에 정작 내가 물어보고자 했던 것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한부장에게는 도저히 파고들만 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한부장의 설명은 이상하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었다. 특히 내가 크게 동요한 것은 급여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 동안 편의점 알바나 하면서 만졌던 돈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이런 기업이 과연 지구상에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으나 한부장과 눈을 마주치자 더 이상 어떤 의문도 들지 않았다. 모든 설명을 끝마친 한부장은 자못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 어떤가? 이 정도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직장 아니겠나? 하핫!”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내 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정신이 멍했다. 급여에 관한 설명만 들어보면 돈방석에 앉게 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어떤 곳도 이렇게 돈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곳일까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한부장은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고맙네. 고마워. 자네가 날 살렸네. , 이거 한 잔 시원하게 마시게나. 내가 사는 거네.”

 

한부장이 내민 건 포도맛 음료수였다. 먹기 좋게 따여진 캔에서는 탄산이 부글대며 입구를 적시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건 위험하다며 오감이 호소했으나 한 부장의 눈과 마주치자 캔은 이미 내 입에 닿고 있었다. 막상 음료수가 입술에 닿자 격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캔을 완전히 비워냈다.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어느새 계약서는 사라지고 눈에 익은 물건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산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앞뒤 잴 것 없이 낚아챘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움켜쥐었다. 불과 하루정도 지났건만 오랜 친구를 재회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그렇게 소중한 건가? 난 잘 모르겠던데. 뭔가 느껴지길래 가져와봤더니 아무것도 아니더만.”

 

한부장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자 현기증이 일었다. 쓰러진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말투가 묘하게 달라진 한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고생해라.”

 

그렇게 난 정신을 잃었다.

3

 

 

낯선 천장이다.

 

소설에서 이런 식으로 첫 도입부를 끊는 작품들을 개인적으로는 경멸해왔었다. 전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눈에 익은 누런 물자국도 안보였고 그렇다고 정신을 잃기 전에 본 휘황찬란한 카페의 천장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대체로 어두운 편이라 잘 보이진 않았으나 군데군데 길게 늘어진 거미줄들이 보였다. 다만 거미줄이 크기는 우리가 흔히 보던 수준이 아니었다. 대항해시대에 바다를 누비고 다니던 옛 범선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두꺼운 줄들이 사방으로 처져 있었다.

얼떨떨해진 나는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대략 살펴본 바, 이곳은 마치 중세의 성처럼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어진 듯했다. 머리맡에는 한부장을 만나러 갈 때 같이 들고 왔던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이 놓여있었다. 맞다, 내 물건. 아까 전의 기억이 떠올라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그토록 찾았던 내 오래된 분신 또한 바닥에 놓여있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막대를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일단 한부장이 내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준 음료수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그럼 고생해라.’

 

고생하라니? 대체 뭘? 나는 이 말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이 찬다. 이것도 내가 극혐하는 도입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불과 30분 전이었다. 뜬금없이 들려온 현악기 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차분히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봤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악기 비슷한 소리였지만 도저히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에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위쪽이었는데 차라리 난 고개를 들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좋았을 것이다.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거미 같은 것과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나를 관찰하듯 제자리에서 보기만 하던 그 괴물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놀란 내가 비명을 빼액 지르자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괴물도 놀랐는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얼른 소지품을 챙겨 들고는 허둥지둥 도망쳤다.

괴물의 둥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빠져나오자 긴 복도가 있었다. 혹시나 아까 그 괴물이 쫓아올까 싶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질주했다.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넓은 동공이 나타났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빛이 보였다는 것이다. 동공에 진입하자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6명의 인원이 불을 쬐고 있었는데 괴물을 보다가 같은 사람을 보게 되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일단 멀리서 볼 때는 몰랐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들의 복장이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이 걸친 것은 내가 평소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차림새가 아니었다. 대부분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안쪽으로는 가죽이나 철갑으로 된 갑옷 같은 것을 받쳐 입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온 몸을 감싸는 진짜 철갑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 이들을 보고 나는 내가 중세 유럽에 온 줄 알았다. 실제로 이들의 외모는 서양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였는데, 다만 뒤에 있는 두 명은 과연 명이라는 단위로 셀 수 있을까 싶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 명은 귀가 유별나게 컸고, 또 다른 한 명은 키가 굉장히 작았다.

내가 이들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멈춰 서자 그들도 나를 발견한 눈치였다. 처음에는 괴물이 나오는 이곳에서 같은 사람을 보았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금 전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눈에는 나를 경계하는 것이 분명한 빛이 가득했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무기는 그들의 외모와 복장처럼 다양했다. 거대한 검에서부터 화려한 활에 이르기까지 휘황찬란한 외관은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그 무기들의 방향이 전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일단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트리고자 했다. 과연 이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저들의 칼에 찔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내가 아는 외국인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영어 하나뿐이었다. 과연 만국의 공통어가 여기서도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점점 좁혀져 오는 거리만큼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한 나였기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과의 거리는 20미터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예전에 게임에서 쓰던 단어들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시도했다.

 

, 아임 낫 에너미. 아임 유어 프렌드. 프렌들리! 프렌들리! 유 노? 돈 슛 플리즈.”

 

잠깐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어봤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는 잔뜩 구겨지는 저들의 얼굴로 보아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리는 말소리는 당연하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대화 중간에 몇 번씩 나를 가리켰다. 아마 나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도 점차 누그러지는 그들의 태도에서 얼추 마음이 놓였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내가 온 방향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도 벽을 울리는 굉음에 놀랐는지 내 뒤를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느슨해졌던 경계 태세는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 굉음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로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뒤돌아보면 밟혀 죽던데

 

도무지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이 매우 험악해졌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가리키고는 뭐라고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과 불덩어리가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평범한 인간이 바로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어떻게 피하겠냐고. 아 박복한 내 인생. 이렇게 가는구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내 앞에는 거대한 방패가 서있었다.

 

대체 누가?’

 

검은 갑주를 입은 한 명이 내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는 저들이 하는 모든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인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과연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누구지? 혹시 방금 전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의 주인인가?’

 

이제서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맞는 것 같았다. 내 뒤에서 등장한 그가 저들의 공격을 막아준 것이다. 그런데 모습만 보면 저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어째서 저들이 공격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전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없었다.

대다수의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눈이 그것은 없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코나 입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게 전혀 없었다. 아예 피부조차 없는 창백한 해골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골과 시선이 마주친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마도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아니 깨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지고 무작정 도망쳤다.

 

 

 

가는 곳마다 해골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은 괴물들과 맞닥뜨렸다. 차라리 아까 전의 해골병사가 비주얼면으로는 훨씬 나았다. 지금 마주하는 이 괴물들은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외모로 나를 반겨주었다. 괴력은 덤이었고. 방금 전에도 거대한 돌덩어리로 이루어진 괴물이 내려친 조용히 하세요!’의 위력을 몸소 경험하고 온 참이다. 비껴 맞아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진짜 영원히 조용히 하게 될 뻔했다.

지금 이게 악몽이면 깨어나면 그만이지 않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악몽이라고 생각해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은 진짜였다. 게다가 꿈속에서라도 저런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것은 사양이었고.

 

제발 그만 좀 쫓아와!”

 

이 곳 저 곳을 누비고 다닌 덕에 나는 지금 내 뒤를 따르는 수많은 괴물들의 행렬 중 선두를 맡고 있었다. 저들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까 그 일행과 별 반 다르지 않았다. 괴물들은 내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신이 난 듯 괴성을 지르며 쫓아왔다. 내 능력으로는 괴물들을 도저히 따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지나온 곳을 3바퀴쯤 돌자 슬슬 이제 한계라고 느꼈다.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쫓기다 보니 어느새 해골을 만났던 곳으로 오게 되었다. 해골과 날 공격한 일행은 그새 어디로 가버렸는지 조용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지쳐버린 몸을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결국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꼴사납게 한 바퀴를 굴렀다. 내 뒤로 괴물들이 내는 끔찍한 소리가 동공을 가득 메웠다.

 

젠장, 하다못해 무기라도 있었으면 최소한 반항이라도 해봤을 텐데.’

 

다 죽게 생기자 주마등이라고 불리는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역시 넌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나가 뒤져라.”

 

과거에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악담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투기가 끓어올랐다.

 

그래, 사나이 박복한.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지!’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아까 그 일행이 피우던 모닥불이 꺼진 곳에 있는 타버린 막대기였다. 무기로 쓰기에는 빈약해 보였으나 상관없었다. 딱 한 놈만 팬다. 이왕 가는 길 한 놈이라도 길동무로 데려가며 족했다.

 

후우-”

 

괴물들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봉인해 두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한여름, 비지땀을 흘려가며 익혔던 비장의 기술이다. 떠올려라! 박복한, 그 때를!

 

총검술 제1식 찔러 총!

 

! ! -”

 

나의 회심이 담긴 일격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뒤에서 습격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아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까 그 해골이 나를 공격한건가? 모르겠다. 정신을 완전히 놓자 마침내 깊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4

 

 

지독한 악몽이었다. 한치 앞도 짐작할 수 없는 미궁에서 온갖 괴물들에게 쫓기면서 고통 받는, 모두가 단순한 개꿈으로 치부했을 그런 꿈 말이다. 아무래도 그동안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었나 보다. 이런 꿈같지도 않은 꿈이나 꾸다니. 아니면 요새 자주 보던 웹소설 내용들이 꿈속에서 재현될 것일 수도 있었을 테고. , 어찌되었든 간에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할 차례겠지.

 

낯익은 천장이다.

 

어둠에 적응한 눈에 간간이 보이는 두꺼운 거미줄은 내게 인지부조화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이게 다 뭐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볼이라도 꼬집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무언가에 칭칭 감겨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빠져나오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봤으나, 그럴수록 더 옥죄어 들어오기만 할 뿐이었다. 탈출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기에 일단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확인해 본 결과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천장에 있는 거미줄과 같은 것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어릴 적 읽었던 곤충도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거미줄에 걸린 희생양의 발버둥은 거미줄을 타고 거미에게 먹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 저런. 저 불쌍한 희생양 좀 보세요. 거미가 먹이의 연한 부분에 이빨을 박아 넣기 시작합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전 탈출시도는 이 줄의 주인에게 내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린 셈이었다. 한마디로 음식 도착 벨을 누른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걸 왜 이제서야 떠올린 걸까! 아니 하다못해 미리 확인을 했더라면. 너무 성급했었다. 두려움에 온 몸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하자, 쿵쿵 뛰는 심장의 고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상대의 반응은 없었기에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장박동 때문에 거미괴물이 반응할까봐 그랬던 거지만. 몇 번의 심호흡 덕분인지 가까스로 어느 정도 진정은 되었다. 그 때였다. 거미줄이 반응한 것은.

처음에는 너무나 작은 떨림이었기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러나 거미줄은 내 심장이 진정되는 것과는 달리 흔들림이 점차 커져갔다. 거미줄의 움직임에 따라 기껏 가라앉았던 심장은 맹렬하게 뛰어올랐다. 어느덧 그 괴물이 가까이 다가왔는지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부터 나를 만찬으로 삼으려는 괴물의 모습을 도저히 확인할 자신이 없었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온갖 불행이 뒤따르던 청년 박복한 알 수 없는 미궁에서 거미괴물에게 물려 죽다. 죽기 직전 내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니 스스로가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는 이런 삶도 안녕이구나. 별거 없던 세상아 나는 간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나는 거미 괴물의 이빨이 내 목에 박힐 것을 떠올리며 모든 것에게 안녕을 고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이런 지옥에 몰아넣은 한부장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온갖 쌍욕과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다 뽑혀버려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목에 꽂히리라고 짐작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그냥 지나갔나? 아니면 혹시?!’

 

갑작스레 떠오른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예전에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짧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새벽 알바의 지루함을 덜고자 게시글을 클릭했던 나는 영상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었다. 동영상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 무리의 암사자들이 아직 죽지 않은 수컷 사냥감을 마저 해치우는 장면이었는데, 한 마리가 사냥감의 매우 연약하디 연약한 부위를너무나 끔찍한 장면이었던 지라 이하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아마 제목이 자연의 잔혹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걸 본 대다수의 남성들 또한 이유 불문 동일한 고통을 느꼈으리라. 나 또한 그 중 한 명이었고.

아무튼 죽더라도 절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눈을 살짝 떠보자 괴물은 발치까지 다가온 채였다. 위치 선정이 공교롭게도 그 때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낀 건 단지 착각인 걸까? 거미괴물의 모습은 뒤에서 비추는 빛 때문에 실루엣만 보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여 공포는 배가 되었다. 때마침 괴물이 손으로 추정되는 신체 한 부위를 뻗어서 내 다리에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올라오!

 

읍읍-!”

 

입마저도 거미줄에 덮혀 있었기에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는 나는 그저 저항을 위해 부질없이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행동에 돌아온 괴물의 반응은 솔직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어머! 안녕? 깨어났구나?”

 

이게 무슨 말이지? 아니 그보다 말? 저 괴물이 말을 한거야? 그것도 한국어로?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 만한 것을 잠시 생각해본 나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읍읍! 읍읍읍!”

 

일단은 뭐가 되었든지 간에 먼저 이 거미줄을 없애야 이 괴물과 인사를 나누든, 농담을 주고받든,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든지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최대한 온 몸을 비틀어가면서 내 의지를 전달했다.

 

맞다. 미안해. 너희들은 머리 쪽으로 숨을 쉰다고 했지? 지금 풀어 줄게.”

 

아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로 추정해보건대 지금 이 괴물의 성별을 굳이 따져본다면 여성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거미줄을 제거해주기 위해서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다시 한 번 곤충도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거미는 거미줄을 먹어서 다시 사용한다고. 어느덧 내 얼굴 위에는 그녀의 얼굴로 추정되는 신체부위가 다가와 있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지를 않는 거냐!

 

-!!! 읍읍!”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내가 숨이 막혀서 더욱 날뛰는 줄 알았나 보다.

 

조금만 참아. 정 버티기 힘들면 약을 투여해줄까? 그러면 다들 편하게 잠들었거든.”

 

생명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느낀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는 그제서야 거미줄을 이빨로 도려내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대로 서로의 얼굴은 가까이 밀착된 상태였고. 거미줄이 뜯어질 때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여러 번 해본 듯 능숙한 행동이었기에 다행히도 내가 걱정했었던 신체적 접촉은 일절 발생하지 않았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매우 정상적인 가치관을 지닌 건전한 성인 남성이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순정이란 게 있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그녀가 연예인 뺨치게 생겼을지라도, 그동안 소중히 지켜온 첫 키스에 대한 환상을 일면식도 없는 괴물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지켜온 순정인데. ? 그동안 여자 친구도 없고 뭐했냐고? 어쩌라구요.

 

저기 이것도 마저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입을 가렸던 것은 제거가 되었지만 아직 몸을 감싸고 있는 거미줄은 여전했다. 이대로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리고 틈을 봐 도망을 치기 위해서라도 몸은 자유로워야 했으니까.

 

? 안 돼. 마왕님이 묶어 두라고 하셨거든. 아까처럼 난동을 부리면 영업에 방해 되니까.”

 

그러나 그녀는 내 부탁을 거절했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날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날 어떻게 하겠다는 낌새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방금 전 악몽과 같은 기억들과 지금의 이 상황이라도 파악해 보고자 했다. 최소한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대처라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마왕? 영업방해? 이것 또 무슨 소리야?

한편 내 입을 자유롭게 해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옆에 있던 내 가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건드려보듯이 그녀는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거나 달랑거리는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심성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그리고 당신은 누구신데 저랑 말이 통하는 거죠? 또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마왕?”

 

어느새 가방을 메고 여러 포즈를 잡아보던 그녀는 나의 속사포 같은 질문을 듣고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그녀의 키가 그새 더 자랐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 자신의 머리에 내 가방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빛이 부족한 곳이었기에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리쯤에서 반짝이는 지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능에 살짝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지금 내 상황이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는 아니었으니까 달리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아니면 혹시 가방이라는 것을 처음 보는 건가?

 

여기는 관리명 라비린투스 룩스 제놈 여섯번째야. 그리고 나는 아라크네. 우리 마왕성에 온 걸 환영해.”

 

라비린? 뭐가 여섯 번째라는 거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와중에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마왕성이라는 단어는 지금 내가 있는 이 미궁처럼 나를 깊숙한 혼란에 빠트렸다. 미궁, 괴물들 그리고 마왕성머릿속으로 지금까지 경험한 수많은 정보들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의 매듭이 가리킨 끝자락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여기는

 

너랑 내가 말이 통하는 건 이 목걸이 덕분이야. 이것만 있으면 다른 애들이랑도 얘기할 수 있어. 신기하지? 나도 자세한 원리는 몰라. 그리고 마왕님은

 

아라크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동공 전체에 음산한 기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문 앞에는 거대한 인영이 하나 서있었다. 역광에 의해 어둠에 가렸던 아라크네와는 달리 그 자체가 짙은 어둠과 같은 존재.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피가 전부 얼어버릴 것 같은, 아니 끓어올라서 몸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존재.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끝내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하는 자였다. 마왕이라는 자를 처음 봤을 때 압도적인 힘에 눌린 나는 이렇게 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바로 저분이야. 우리의 마왕님이.”

 

아라크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길래 그녀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보다. 그녀도 시선을 바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며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그는 내게 다가왔다. 그가 한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주변 공간은 뒤틀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듯했고, 공기는 신음소리를 흘리듯 찢어지며 흩어졌다. 이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 고개를 아예 땅에 처박은 아라크네는 어느새 저멀리 어둠 너머로 물러나고 있었다. 불과 열 발자국 정도를 남기고 멈춘 마왕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약속을 이행해라. 도깨비.”

5

 

 

나는 마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도통 알 도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간단하게 설명이라도 해주던가. 무엇보다도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도깨비라고 하는 건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고. 혹시나 주변에 다른 누군가를 보고 그랬나 싶었지만 아라크네마저도 그새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나와 마왕을 제외하면 지금 이곳에는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깨비라는 존재가 나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어딜 봐서 내가 도깨비란 거지?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갖출 건 다 갖췄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내가 그 정도로 못생겼다는 건가?

마왕의 말에 갈피를 못 잡고 때 아닌 자학을 하고 있을 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서 오는 사람을 이유 없이 주눅 들게 만드는 그런 것. 그냥그런 기분이었다.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불쾌한 기분은 당연하게도 마왕이 원인이었다. 그는 불길하게 타오르는 붉은 색 안광으로 나를 꿰뚫어버릴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마왕이 나를 보듯 나 또한 그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까부터 마왕의 주변에서 흩날리는 검은 색 가루들 때문인지 시선을 마주할 수 있기는커녕 제대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물론 이것뿐만이 아니라 마왕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분 나쁜 기운에 눌린 것도 한 몫 했지만. 그래서 내가 확인한 마왕의 모습은 공중에 떠 있는 그의 눈이 전부였다.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는 탐색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를 감싸고 있던 거미 고치가 갑자기 힘없이 부스러졌다. 덕분에 자유로워졌기에 일단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대로 계속 누워 있다가는 마왕에게 짓밟힐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힘 때문인지 그저 엉거주춤하게 설 수 있는 게 최선이었다. 어느새 내 손은 자연스레 주머니에 있는 작은 막대기에 닿았다. 나의 작은 도피처. 지금은 이거라도 쥐고 있어야 심적으로 안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면효과인지 아니면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막대기의 작은 질량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든든하게 나를 지탱해주었다. 이 녀석 덕분에 마왕에게 말을 걸 작은 용기가 생겼다.

 

저기, 사람 잘 못 보신 것 같은데. 전 도깨비가 아닌데요.”

도깨비 파 포칸, 못 다한 약속을 이행해라.”

 

그러나 마왕은 답정너 마냥 이미 나를 도깨비로 확정하고 있는 듯했다. 대체 나의 어디가 도깨비 같다는 건지, 그리고 그 약속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이름은 박복한이지 파 포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이 오해를 풀고 싶었다. 까딱 잘못하면 뭔지도 모를 약속을 내가 덤탱이 쓰게 생겼는데, 게다가 만약 그 약속이라는 것이 마왕에게 빚을 갚아야 되는 거라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어느새 나타난 불꽃들이 작은 원을 이루며 내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원의 가운데에는 마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어둠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이게뭐죠?”

계약의 시간이다.”

 

이 다음은 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공중에 들린 내가 놀라서 몸부림을 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내 숨마저도 제대로 쉴 수가 없게 되자 마왕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붉은 안광이 나를 뚫어지게 보자 온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저 멍하니 앞만 볼 수밖에 없게 된 내가 본 것은 푸른빛 안개 같은 것이었다. 그 것은 잠시 공중에 떠 있다가 계약서 가운데의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계약서의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온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마치 예전에 고등학교 시절 일진들에게서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한 뒤에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동반되었다. 정확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마치 오래된 무언가를 잃은 듯 한 상실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방금무슨 짓을?”

 

제대로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에 부쳤다. 정신이 혼미해져 바닥을 기는 나를 보며 마왕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했다.

 

이로써 계약이 완료되었다. 포칸, 네 활약을 기대하지.”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온 몸의 힘이 빠진 나는 다시 어둠속으로 끌려갔다.

 

 

 

꿈을 꾸었다. 이번 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는 거대한 평원에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몇 걸음 걸어본 나는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행동에는 거침이 없어졌다. 그 동안의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하듯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저 멀리 산맥 근처에서 짙은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들끓었고, 도저히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가볍게 다리를 박차자 어느새 먼지의 한복판이 내 발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영화나 게임에서나 본 판타지속의 복장을 갖춘 이들이 드넓은 평원에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괴상하게 생긴 괴물들이 이들을 바라보며 대치중이었다. 어느 순간 뿔피리 소리가 평원을 가득 채웠고, 그러자 서로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뒤를 이어 거대한 폭발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폭발로 인한 연기가 가시기도 전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이곳을 한동안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어차피 이곳은 내 꿈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나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들을 보고 있었고.

양 진영 간의 힘겨루기가 한창인 이 넓은 전장에서 유독 한군데가 눈에 띄었다. 그 곳에는 은색 갑주를 두른 한 기사가 붉은 화염을 휘두르며 괴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헤집고 다녔다. 어딜 가든 엇비슷한 모습만 볼 수 있었기에 이왕이면 더욱 흥미진진한 장면이 보고 싶었다. 기사의 칼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괴물들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고, 결국 진형이 와해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기사를 향해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기사는 이를 간파했는지 어느새 저멀리 피해 있었다. 폭발로 인해 생긴 연기가 걷히고 나자 그 곳에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를 본 순간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방금 전 보았던 마왕과 동일한 존재인 것 같았다. 마왕이 무너진 진형 앞으로 걸어 나오자, 아직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반대편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왕이 등 뒤에서 거대한 검을 뽑아 들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기를 꺼냈을 뿐인데 마왕의 존재에 압도당한 상대편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 대다수가 빠르게 전선을 이탈했다.

마왕의 검이 휘둘러졌다. 검날을 따라 검은색 파도가 빠르게 전방을 뒤덮었다. 파도는 잠시 넘실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물결이 걷힌 그 곳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순히 검의 휘둘러진 짧은반경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검의 궤적을 넘어서는 지역 또한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오직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아까 전에 화염을 사용하며 전장을 헤집던 그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는지 무릎을 꿇은 채였다. 마왕이 기사를 끝장내려는 듯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어느새 왔는지 한 사람이 그 기사 앞에 있었다. 하늘에서 편하게 관람을 할 수 있었던 나였기에 전장을 넓게 볼 수 있었음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 자는 마왕의 검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 안가 역으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판타지 세계를 좋아해서 반지의 제왕도 몇 번이나 돌려 봤던 내게 있어 이런 장면은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방금 전 내가 마왕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건데? 어느새 마왕은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나는 이번에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발버둥을 치다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

 

지면에 부딪히기 직전 꿈에서 깨어났다. 지금도 그 꺼림칙한 시선이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오한이었다.

 

워매! 놀래라.”

우왁!”

으아아악!”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나의 비명에 놀랐는지 목소리의 주인도 날 따라 비명을 내질렀다. 주변을 둘러보니 문 쪽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은 큰 키에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데 완벽한 신체 비율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얼굴은솔직히 나도 어딜 가서 꿀리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를 보자 급격하게 하락하는 자존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라면 충분히 탑클래스의 모델이나 연예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인간이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니었다. 인간과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아래턱 끝에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아랫니와 검붉은 피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하듯 보여주었다.

 

누구세요?”

네 선임.”

 

짧게 답한 그는 내게 담요와 나무로 된 컵을 건네주었다. 선임이라니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한에 떠는 내게 당장에 중요한 것은 그가 준 담요이리라. 서둘러 몸을 감싸자 아까 보다는 한결 나았다.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한편 그가 준 컵에는 점성이 있어 보이는 노란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거콧물은 아니겠지?

 

마셔 둬, 몸이 훨씬 나아질 거야.”

 

다소 꺼림칙해 그를 마주보았는데, 마주친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놀람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덩치에 비해 이외로 겁쟁이인건가? 그런 그를 보니 의심이 누그러졌기에 속는 셈치고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러나 한 번 맛을 보자 더는 마시지 못할 것 같은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하다니. 어떤 악마 같은 놈이 이런 걸 만든 거야?

 

맛은 그래도 마시는 게 좋을 걸? 죽기 싫다면 말이야.”

 

그의 말에 목구멍을 열고남은 액체를 쏟아 부었다. 내가 혀에 남은 액체 때문에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날 보며 씩 웃었다. 과연 저 표정이 미소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개가 늦었네. 내 이름은 개빈이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신참.”

 

자신을 내 선임이라고 소개한 개빈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울린 종소리가 방해했다.

 

이런, 또 왔나 보군. 쉴 틈이 없다니까. 그럼 신참 좀 있다가 보자.”

 

그가 떠나고 난 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안 되는 가구가 있는 작은 방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개빈이 나를 여기까지 옮긴 걸까?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내가 아는 선에서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그 때였다. 눈앞에 푸른 스파크가 생기더니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간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의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한부장이었다.

6

 

 

뭐야? 차원간섭인가? 하나도 안보이네혹시 자네 거기 있나?”

 

비록 상반신뿐이었지만 내 눈 앞에는 그토록 보고 싶어 마지않았던 한부장이 있었다. 남들에게는 그의 모습이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이미 괴물들과 한바탕 뜀박질을 했던 나한테는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그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정황상 아마도 나를 찾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겪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한부장이라고 확정하고 있던 차였다. 마침 원인 제공자가 제 발로 나타났는데 지금 내가 할 만한 행동은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야 이 대머리 새끼야!”

! 자네 무사한건

 

내가 그에게 달려든 것과 그가 내 쪽을 보며 말을 건넨 것은 동시였다. 그러나 한부장의 멱살을 잡기 위해 뻗은 손은 허공만 움켜잡았다. 믿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으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내 말은 전달이 되었는지 한부장은 망연히 날 바라만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꽤 강력한 것이었나 보다. 꽤 굵은 물방울이 그의 턱에서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그건 그의 정수리에서 떨어진 땀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그의 눈가가 점차 촉촉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약간이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미안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보다 그가 다시 나타난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욕을 먹으려고 굳이 나타난 것은 아닐 테고. 일단은 들어나 보기로 했다.

 

이번엔 또 뭐요?”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멍하니 있던 한부장은 내 말이 들리자 정신이 든 듯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싶었으나, 이쪽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 똑같이 대응해주기로 했다.

 

자네 그렇게 안 봤었는데 말이야. 상상 이상으로 악독한 사람이었구만.“

내가 호구도 아니고, 사기당한건데 좋은 말 나오게 생겼냐? 지금!”

크흠그건, 아 이 사람아! 사람이 어떻게 항상 좋은 것만 하고 사나? 으이! 가끔은 고생도 하고 말이야! 그게 인생이란거야. 다 좋은 경험이라고 여겨야지!”

 

내 말에 횡설수설하는 한부장을 보자 더욱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대머리. 이로써 날 이곳으로 보내 버린 범인이 확실해졌다. 당장 저놈의 멱살을 잡고는 마구 때려주고 싶었으나, 방금 경험했듯이 그와는 어떠한 물리적 접촉도 불가능 한 것 같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니 다소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날 이곳으로 보낸 것처럼 다시 원래 세계로 데려올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은 저 대머리 남자 한 명뿐이니 더 이상의 자극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에 급한 것은 나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이제 나 좀 원래 세계로 보내주쇼.”

? 그거? 그래 그렇지. 근데 말이야. 으음미안하다. 지금은 못해.”

 

믿었던 것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다고만 했다면 그래도 저 대머리 녀석을 용서해줄 가능성도 있었는데. 0.01퍼센트쯤나는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부장은 이런 나를 보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힘내라. 그 쪽 세상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찌저찌 살아갈 수는 있을 거다.“

되도 않는 응원해 줄 거면 그냥 꺼져! 도움도 안 될 거면서 왜 나타난 거야.”

아 그래! 깜빡했군. 내가 왜 굳이 네 앞에 나타났겠니? 다 이유가 있으니까 왔지.”

 

그의 말에 약간이지만 희망의 빛을 본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하다 못해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그래 군대에서도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쯤이야 힘들긴 하겠지만 버틸 수 있다!

 

별건 아니고. 나중에 메두스의 술이라는 것을 얻게 되면 잘 보관했다가

메두스의 술? 그게 약을 만드는 재료야?”

무슨 소리야. 약은 무슨 약.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내가 다시 나타나면 그걸 나한테 줘.”

그럼 돌아갈 수 있어?”

아니,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건데. 가끔씩 생각나서 말이야. 여기는 암만 찾아도 없더라구.”

야 이 개!”

 

저 대머리를 믿은 내가 호구지. 한부장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기 바빴다. 놀리려고 온 건가?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너 정말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냐?”

그야 당연하지. 정체도 모르는 괴물들 천지에 숨도 못 쉴 정도로 찍어 누르는 마왕이라는 놈이 있는데 아저씨야말로 여기서 살고 싶겠어?”

너무 그렇게 나쁘게 만은 말하지 마라. 그래도 내가 살던 곳인데.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야. 전에 보니 너, 나랑 동갑이더만.”

 

솔직히 꽤 놀랐다.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솔직히 나도 놀랐으니까. 우리 말고도 이렇게 문명을 이룬 지성체들이 있는 이세계가 있다는 것이.”

 

물론 이 곳이 한부장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가 나랑 동갑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저 모습이 나랑 동갑의 얼굴이란 말인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소 다른 것 같았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좀 늦었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한스 아데르. 그냥 한스라고 불러. 일단 널 이곳으로 보낸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사과는 필요 없고 지구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그건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내 힘으로는 불가능해. 애초에 그 쪽으로 널 보낸 것도 내 힘이 아니라 마왕의 힘이었으니까.”

마왕?”

 

마왕이라는 말에 한스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지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었다. 이내 특유의 능글대는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날 보며 이죽거렸다.

 

그래, 마왕. 다시 이쪽으로 오고 싶으면 그 놈을 힘으로 굴복시켜야 할 걸? 마왕이란 그런 족속들이니.”

 

굴복은 무슨. 방금 전에도 죽다 살아났는데. 어림도 없지. 대신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한스의 면상을 한 방 후려갈기려다가 포기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술은 줄 수 있다면서? 그리고 너는 뭐야? 너도 이쪽 사람이라며!”

술은 생명체가 아니잖아. 바보야! 이래서 일반인들이란그리고 나는 후-, 그래 일단 이것부터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 원래 나는 마법사였어. 정확히 말하면 연습생이었지만.”

 

이번 건 딱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부장, 아니 한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손에서 피어났던 빛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놀라지도 않네. 아무튼 나는 남들과는 달랐어. 내 주변에는 다들 무슨 용사나 그를 추종하는 나부랭이나 될 생각밖에 없었지만, 나는 아니었지. 솔직히 빛바랜 과거의 영광을 좇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용사는 또 뭐야? 여기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곳이길래 소설 속 판타지 세상 마냥 괴물에 마왕에

! 정확한 비유야. 솔직히 처음 이쪽 세상에 왔을 때는 여러모로 놀랐지. 특히 너희들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르는 거! 이야, 어떻게 경험해보지도 못한 우리들의 세상을 그렇게 잘 표현해 놓았는지. 처음에 보고는 깜짝 놀랐다니까.”

 

그 동안 무시해왔던 수많은 작가들에게 경의를.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래 나도 그 망할 놈의 노친네가 인정만 해줬어도 이렇게까지는 안했을 거야! 무려 15년이 넘도록 그 영감탱이 뒤치다꺼리를 해줬었는데 이제 그만 놓아줄 때도 된 거 아냐?”

 

한스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수리가 시뻘게지도록 화를 내는 것을 봐서는 꽤나 깊은 원한이 있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리자드맨의 알이 필요하다고 해서 죽을 고비 넘겨서 구해온 게 누군데, 또 연구 내용 써야 된다 길래 한 달 내내 코피 쏟아가면서 도와주니까 내 이름은 쏙 빼버리질 않나. 이런데도 내가 계속 참고만 있어야 하냐? 안그래? 게다가 하루는 지하실에서, 어휴 됐다.”

 

한스는 쌓인 것이 많았는지 한참이나 넋두리를 쏟아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는 모르지만 약간은 공감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겪어봤었으니까.

 

그래서 확 도망쳐버렸지. 더 이상 얻을 것도 없는 곳 노예 취급받으면서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마법 학회에서 나오니까 딱히 갈만한데가 없었거든. 그렇다고 이렇다 할 목표도 없었고 말이야. 한참을 목표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하나 떠오르지 뭐야? 바로 복수! 그동안 나를 부려먹기만 하던 그 영감보다 강한 마력을 얻고 이걸 그 인간 앞에서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랑 그거랑 다 무슨 상관인데?

말 끊지 말고 잘 들어!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어떻게 하면 노친네보다 더 큰 마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처음에는 드래곤의 심장을 생각했었지만 이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라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그 때 마침 내 앞으로 그 바보 같은 자칭 용사 무리가 지나가지 뭐야? 세상에나! 지혜의 신 펙투스여!”

 

세상에 여기는 진짜로 드래곤도 있는 건가? 아까 그 괴물들도 끔찍했었는데. 드래곤한테 쫓긴다고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만큼 그 바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는 없었지. 나는 곧장 가까운 마왕의 성으로 달려갔어. 거기서 마왕의 반지를 가져올 생각이었거든. 비록 순수한 악으로 이루어진 힘이었지만, 내가 그동안 보고 연구해온 이론에 따르면 악을 빛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거든. 그리고 마왕의 반지를 이용하면 그깟 영감의 마력 따위야 우습지.”

그래서? 성공했어?”

아니! 지금 너가 여기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당연히 실패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