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도헌, 「A Rush Of Blood To The Head」(2020-1학기 <웹소설창작과비평>)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309
*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1. 아홉마리의 소, 하나의 털.
*
나는 한동안 밤낮이 바뀌어 아침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다. 요즘엔 제대로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잠에 들기라도 하면, 매일 같은 꿈을 꾸었다. 오늘도 역시 잠이 들고서 불과 몇시간 만에 깨어났다. 꿈을 꾸는 동안 내 머릿속의 시간은 정말 ‘살아’ 있었고, 그것은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깨어났을 땐, 불과 몇 시간만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 지속되자 나의 정신은 자면서도 도통 쉬어본적이 없었다.
운이 나쁘게도 나의 몸은 매우 민감했다. 나의 육체는 쓸데없이 매우 민감해서 잠을 자고 있더라도 작은 소리, 작은 불빛에도 깨어날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번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잠들기 까지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정말 쓸데없는 천성적인 능력 덕분에 나에겐 수면에 방해가 될만한 작은 빛, 작은 소리 까지도 차단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이를 테면 빛이 전혀 새어 나오지 못할 만한 커튼을 설치하고, 자는 동안 핸드폰에서 기상 알람 이외의 소리가 나지 않게 ‘방해 금지 모드’를 설정 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핸드폰을 아예 끄고 수면을 취했었는데, 한밤중에 엄마가 응급실을 다녀온 후로부터는 전화가 두 번 이상 오면 벨소리가 나는 모드로 설정하고, 가족들에게 나의 수면 습관과 위급 상황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나는 종종 현실과 경계가 매우 모호한 상태 속에서 누워있었다. 며칠째 이런 상태가 계속 되자, 나는 오랜 친구인 ‘쥐’에게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쥐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때부터 교우 관계를 유지해 왔었는데, 우리 둘은 마침 집도 한 블록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나곤 했다. 우리는 무슨 일들이 있건 없건 자주 만났었는데, 만나서 하는 얘기라곤 주로 주변에서 자질구레하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대화였다.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는 투표율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투표율이 낮을 것이라 예측했고, 나는 그 반대를 주장해서 우리는 각각의 주장에 내기를 걸었다. 물론 결과는 나의 승리였다.
우리는 동네에 있는 작은 술집에 마주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있었다.(당연히 그가 맥주를 샀다.) 그 술집은 생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의 숱한 관심을 받는 중이었다. 나는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에 절반을 마신 다음, 그에게 내 꿈에 대한 고민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쥐는 “그것 참 안타깝군. 그것 참 안타까워.”라고 말한 다음 양 입술로 혀를 빨아들이며 ‘쯔읍’ 소리를 길게 내었다. 그에겐 같은 말을 정확히 ‘두 번’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항상 별다른 감흥 없이 묻는 말을 받아 칠 때 그런 습관이 나오곤 했다. 전에 한 번 그에게 버릇에 대한 불만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쥐는 “뭐라고? 이봐, 나는 완전 진지하다고. 정말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야.”라며 역시 ‘두 번’ 말했다.
“얼마 동안 지속 된 거야?”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입어 털어 넣으며 쥐가 물었다.
“모르겠어.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은데?”
“이봐 친구,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지?”
“글쎄… 17년 조금 넘었나?”
“그것 보라구. 17년. 정확히는 17년 하고도 여전히 진행중이지. 그러니 신경 쓰지 말어.”
“무슨 말이지?”
“잘 생각해 봐. 나같은 또라이 하고도 17년을 넘게 만나고 있는데, 그 까짓 거 일주일 정도면 뭐랄까… ‘구우일모(九牛一毛)’ 아니겠냐?”
쥐는 검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야금야금 씹으며 말했다.
“곧 나아지겠지. 걱정하지마. 정말 걱정 안해도 될 문제라니까.”
쥐는 계산을 마치고 나를 바래다 주면서,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걱정 아닌 걱정을 해 주었다.
“그래야지. 정말 그래야지.”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역시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내 상태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병원에 가보려고 했었지만, 내가 겪는 일종의 수면 장애는 스스로 가벼운 것이라고 단정짓고,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에서 읽었던 방법을 통해 내가 직접 꿈에 접근해 보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바로 내 꿈을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는데, 그 대상은 오직 나에게만 이상하리만치 강한 집착을 보였다. 신기하게도 꿈의 시작점은 다양했는데, 그 중간 부분과 끝맺음은 변하지 않았다.
꿈의 시작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날엔 그 곳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었고, 또다른 날에는 전구가 나간 가로등 옆에서 커다란 검정색 비닐 봉투를 묶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억은 내가 아무런 이유없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밤 안개에 둘러 싸여 있었다. 내 앞쪽과 뒤쪽으로 길이 하나 나있었는데, 그 길은 자동차 두 대가 지날법한 폭으로 한없이 이어져있었다. 길 양 옆으로는 회색 콘크리트 벽돌로 만들어진 2미터 쯤 되보이는 차가운 담벼락이 이어져 있었고, 달빛은 짙은 안개에 휩싸인 채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연기사이로 흐릿하게 빠져나오는 그 빛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얼마간 계속 걷고 있음에도, 나는 내가 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앞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저벅 저벅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길은 가도 가도 계속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회색. 오로지 회색 뿐이었다. 그곳엔 다른 색은 없었다. 가끔씩 달빛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희미했기 때문에 매우 흐릿한 선으로 담벼락에 그어지는 정도였다. 더욱이 나는 얼마나 걸어왔는지, 또 이 길의 끝이 어딘지에 대해 전혀 알 수 가 없기 마련이었다.
몇 시간 동안을 걸었던 것일까.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자그마한 진동때문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탁 탁 탁 탁 탁 탁…’ 하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있었다. 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나는 그저 등에 나기 시작한 식은땀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식을대로 식어버린 내 몸은 움직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뛰어오는것이 틀임없다.’
나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 잡았다. 다급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진동은 갈비뼈와 옷깃을 뚫고 내 손으로, 내 두뇌로 전해지고 있었다.
‘뛰어야 한다. 뛰어야만 한다.’
몇 번을 되뇌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온전히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었고, 다음 그다음으로 연속해서 발을 내딛었다. 이윽고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을 때, 마침내 나는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타닥…’
이내 발소리 들은 서로 얽힌 채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달리고 있었다. 아니 쫓기고 있었다. 나는 내가 쫓기고 있는 중이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상황 속에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대상은 나를 쫓았고, 나는 달아났다.
얼마나 달리고 있었던가. 나의 온 몸엔 힘이 풀린지 오래되었다. 나를 쫓는 이는 지칠 줄을 모른다.
‘왜. 도대체 왜 나를 쫓는 것인가.
나는 죄를 지은것도, 타인에게 원망을 샀던 적도 없다. 설마 어렸을 때 엄마 몰래 오락실에 혼자 간 일 때문인가? 아니면, 친할아버지의 장례식 기간 동안 전혀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버스에 올라탄 노인을 애써 외면하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그것도 아니면…’
…
마지막 남은 힘이 다 빠져나갔다.
‘아, 이제는 잡히는 구나. 이렇게 될 것이라면, 나는 왜 달렸던 건가.’
바로 그 순간, 안개가 걷혔다.
저 멀리 걷힌 안개 너머로 길이 끝나 있었고, 그 길의 끝은 낭떠러지였다.
몹시 행복했다.
‘아, 드디어. 드디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망설임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 순간 나를 쫓아오던 발걸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에 맴맴 도는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의 소용돌이에 몸을 맞긴 채, 깊고 깊은 칠흑의 심연 속으로, 아래로 아래로, 그저 아래로만 향하였다.
내가 갑작스럽게 눈을 뜨게 된 건, 아직 땅에 닫기 전이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이불과 배게는 항상 내가 흘린 땀으로 젖어있었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이 역시 흠뻑 젖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매우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내 호흡은 단거리를 질주한 것처럼 매우 가빴고, 심장 역시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몇 초간 공기를 폐에 머문 채, 다시 깊게 뱉어 냈다.
나의 꿈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쫓기고, 나는 도망치고. 그러다 떨어지고. 끝. 하지만, 나는 악몽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끝엔 항상 처음 겪어보는 묘한 개운함이 남았다. 그러나 그 개운함은 미세하게 느껴졌고, 이내 사라졌다.
왠지 모르겠지만, 꿈을 꾸는 날이면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하루 그 자체가 자꾸 나쁜 방향으로 흘러만 갔다. 하긴. 요즘엔 꿈을 꾸지 않는 날이 별로 없었는데. 그냥 날이면 날마다 내 삶 전체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원래 엉망진창 이었을까. 나의 일생은 이미 망가져 버렸을 수 도 있다. 아니, 망가져 버린 것이 틀림없다.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깊은 우울의 감정은 이미 오랜 친구가 되어버려서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의 깊고 얕음, 높고 낮음, 밝고 어두움, 넓고 좁음을 스펙트럼 마냥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이었다. 피로는 일주일이 넘도록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여전히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 창문을 열기 위해 어두운 커튼을 치워버렸다. 어렴풋한 연파랑색 하늘엔, 중간마다 하얀 실구름들이 하늘 속을 헤집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방 안으로 들어와 공기를 들춰 놓았다.
‘저항할 수 없다.’
오늘 만큼은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나는 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 두 권이 들어가면 꽉 차는 노란색 크로스백에 안경 케이스와 남청색 몰스킨 무제 노트, 그리고 흰색 라미 만년필을 넣은 다음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 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집을 드나들며 화단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문 옆 담벼락에 붙어 있는 화단에는 장미가 심어져 있었는데, 여름만 되면 빨간 장미들이 갈색 벽돌로 이루어진 화단과 담벽을 수놓았다. 요즘엔 초록 가지마다 꽃 봉우리가 몽글몽글 맺혀 곧 피어날것만 같은 기대감을 한 껏 주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나는 신발끈을 묶으며 화단을 흘깃 보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그곳엔 어색함이 맴돌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 다음, 다시 한 번 화단을 주의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 일어난 변화를 깨닫게 되었다.
…
쥐가 없어졌다.
2.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
쥐. 짙은 회색 빛깔의 동물. 포유강 동물군의 설치류이자 페스트의 원인이 되었고, 구석에 숨어 살며, 인간에게 ‘혐오’와 ‘구역질’을 불러 일으켜 덫과 약을 통해서 박멸하고 싶은 그 ‘쥐’. 나치 독일은 유태인을 비하하는데 쓰였고, 관용적으로 ‘부끄러움’, ‘나태함’, ‘중상모략함’, ‘몰염치함’을 빗대어 표현하는 바로 그 ‘쥐’.(나의 친구와 헷갈리면 곤란하다)
‘어디로 갔을까.’
쥐가 있던 자리에는 조그마한 구덩이가 얕게 파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늑한 요람처럼 보였다.
죽은 쥐를 본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날은 약속이 있어 아침 일찍 부터 집을 나섰다. 전날 비가 세차게 내린 덕에 햇살은 부드러웠고, 하늘과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는, 내 안에 가득히 고여 넘쳐나고 있는 피로에 대항하여 기지개를 피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내 속엔 문득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대문을 나서며 어김없이 화단을 보았다. 하지만 나의 상쾌한 기분은 한순간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화단 모퉁이에는 찌그러진 녹색 맥주 캔 한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밤 사이에 누군가 몰래 버리고 간 것이 틀림 없어 보였다. 어젯밤엔 비가 정말 많이 내렸는데. 호우 속에서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캔맥주를 마시며, 밤 늦게 집으로 가다가 이곳에 다 마신 쓰레기를 버리다니. 정말 엄청난 지극정성이다.
그러나, 그 쓰레기를 여태껏 보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삶 속에서 존재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생각해 낸 나의 추론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캔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수 도 있다. 비록 오늘 집을 나설 때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심지어 하필 이런 날씨 좋은 날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어떤 이를 비난해 버렸다. 단지 인간의 ‘기본 윤리’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말이다.
머릿속의 생각이 가시기도 전에, 나의 발은 화단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나의 손은 캔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캔을 집어 들었다. 캔의 표면엔 물기가 가득했고, 그 안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캔을 집어 들자마자, 바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캔을 손으로 집어 올린 그 곳, 바로 화단의 구석에 작은 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캔은 바닥에 떨어져 전날 먹은 흙탕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조그만 회색 물체는 어떠한 진동도,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 나는 숨을 내쉬었다.
죽은 쥐였다. 분명 죽은 듯 했다. 그러나 그 쥐는 가만히 누워있는 그 자세에서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쥐는 알맞게 흙을 판 것 마냥, 자신의 몸에 딱 알맞은 구덩이 안에서 두 앞발로 얼굴을 가린 채 엎드려 있었다. 구덩이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나는 도통 알 길이 없었지만, 앞 발에 묻어있는 흙으로 짐작해 볼 때, 쥐 자신이 직접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취향에 딱 알맞는 곳을 발견했다는 것, 거기에 그러한 곳에서 일생의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분명히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증오도, 혐오감도 들지 않았다.
내게 떠오른 감정은 단 두 가지 뿐. ‘평온함’, 그리고 ‘부러움’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공간에 적합한 자세로 누워 끝나는 것. 이것보다 더한 마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회색 설치류가 몹시도 부러워졌다.
몸은 그늘에 반 쯤 가려져 있었다. 햇빛은 조그마한 얼굴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곱게 눈을 가린 두 발은, 마치 영원하게 이뤄질 안락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장치처럼 보여졌다.
고요함.
그 고요함은,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요함은, 누구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요함은, 누구나 망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요함은, 누구나 갖기를 소망하는 것이었다.
그 고요함은, 나의 것이어야만 했다.
나는 쥐가 없어진 공간을 손으로 헤집어 놓았다. 그늘 속에 있었던 흙은 촉촉했다.
‘어디로 갔을까.’
쥐가 사라진 곳 주위에는(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직접 움직인 흔적도 없고,(쥐는 ‘죽어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사 누군가 치웠다고 할 지라도 분명히 흙에 자국이 남아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작은 흔적 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공기 속으로 증발하였거나,(액체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 하지만) 며칠 밤 사이에 부패가 완료되어 땅으로 다시 돌아갔거나.(만약 미생물이 엄청나게 바쁜 활동을 보였다면 가능은 하겠다) 그것도 아니면 양자역학인가 뭔가 하는 것인 게 분명하다. 무슨 영화에서 봤던 것 같은데 말이다. 주인공이 특별 제작한 수트를 입고 개미처럼 작아지는 영화. 그 주인공은 계속해서 작아지기를 거듭하고서, 마침내 양자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되었고 시간 여행도 할 수 있게 되던데. 쥐는 정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간 것인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내 머릿속을 더욱 헤집어 놓기 충분했다. 아무리 세상일이 마음먹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정말 너무하다 싶었다. 도대체 말이 되어야 말이지. 누군가에게 말해준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내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밤에 잠이나 쳐 자라. 불면증으로 인해 머리가 헤까닥 돌아 버린 게 아니냐. 요즘 많이 야윈 것 같은데 건강 좀 신경 써야겠다. 내가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한 분 계시니, 정 힘이 들면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 나도 약을 먹어보았지만, 우리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효과가 분명 있더라 등등…
하지만 내겐 별다른 선택지마저 없다는 것이 제일 실망스러웠다. 만약 버젓이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 진실됨을 상실한 채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이래저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벌어진 이 상황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었다. 요지부동의 상황. 흡사 한나라 군대에 포위된 와중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는 항우의 마음이 이러 했을까. 사람들을 이해시키기위한 알맞는 표현을 골똘히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나는 지치고 말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 속의 모든 피가 두뇌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끓어오르고 있는 만큼 무력감은 배가 되었다. 나는 밖으로 나온 것이 진심으로 후회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오늘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야외에서 보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생각은 나를 밖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모든 채비를 끝마친 지금은 다시 집 안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바깥의 날씨는 나를 약 올리는 마냥 더욱 따스해지고 있었다.
*
…
내가 이 장소를 산 다음 불태울 거라고,
또 무덤 깊이 만큼 날 파 묻어 버릴 거라고,
넌 말했지,
불을 질러 볼까,
타닥타닥,
타오르는 냄새는 항상 새롭단 말이지,
날 위해 불을 질러줘. 보다시피 난 아무것도,
쉿,
조용히 좀 해봐,
무슨 소리 안들려, 그래 너 말이야, 너,
지금 너 말고 누가 입을 헤 벌리고 앉아 있나,
좀 들어보라고,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이 소리 말이야,
안 들린다고, 이런 제기랄, 그럼 너의 얼굴 양쪽에 달고 있는 건 폼이냐,
쓸모없는 것이라면 내가 고흐처럼 자르기라도 해 줄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잠깐만,
지금 또 그러잖아, 바스락, 바스락,
그렇지, 이제는 좀 들리는 모양이군,
누군가 쥐새끼 마냥 숨어서 엿듣는 게 분명해,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아,
왜냐고, 그건 너도 잘 알 텐데,
알았어, 알았어, 이 팔 좀 놓아봐, 어디서 괜히 보채고 지랄이야 지랄은,
왜냐하면, 그건 말이야,
저쪽도 이미 다 알고 있거든,
*
“뭘 그렇게 멀뚱히 서 계슈?”
옆집 할머니가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할머니는 본인의 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담배연기는 종종 내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엄마에게 이 사건을 알려주고 즉각적인 해결을 원했지만 엄마로 부턴, “저 나이 때 분들에게 담배는 ‘약’이야.” 라는 대답만이 들려왔었다.
“아, 뭔가 찾고 있었는데요, 없어진 것 같네요.”
“화단에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모양인가?” 할머니는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 나서 꽁초를 손에 든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긴 요샌 바깥에서 뭘 키울 수 가 없슈. 나도 문 앞에서 아보카도를 화분에다 키우고 있었는데, 어떤 놈이 뿌리째 뽑아 가버렸지 뭐람? 참말로 요즘 사람들은 겁이 없어. 참말로 그런 놈들은 잡아다가 이빨을 뽑아 버려야 된단 말이오.”
할머니는 평소에 워낙 사람들은 만나기 힘든 모양인지, 틈만 나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와 자신의 철학을 강론했다. 그녀의 주장은 대체로 극단적이었는데, 대부분 히틀러도 울고 갈 정도의 강력함이었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내 본능은 어서 자리를 뜨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근데 저 약속이 있어서 빨리…”
“그래도 요즘엔 아들녀석이 요 쪼끔한 걸 가르쳐줘서 그나마 재밌다우. 난 아침마다 맨날 카세트로 불경을 들었는데, 요걸로 틀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편한지 모르오. 쪼그만게 소리도 이만 저만이 아니유.”
할머니는 호기롭게 핸드폰을 꺼내어 눈을 찡그린 채, 검지 손가락 하나만 갖고 천천히 화면을 눌렀다. 핸드폰에선 목탁 소리와 함께 ‘반야심경’이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정말 크네요. 할머니 저 바로 가봐야 해서 다음에 또 들려주세요.”
나는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했다.
“그려. 뭘 잃어버린 지는 몰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어.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 오겄지.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아니겠는감?”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나아갔다.
정말이지, 날씨만 완벽한 날이었다.
3. 그것들은 다 내가 태워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헛간을 태우다』 무라카미 하루키
*
이곳에는 비밀이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한다. 무책임하게. 그들에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과연 그 사람들은 모든걸 알고서 말하는 것일까. 여태까지 내가 만나 본 사람들은 전부 그러지 못하였다. 그 사람들은 서로를 만나도 자신의 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
사람이 죽었다는 첫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를 돌이켜 보자면, 나는 항상 사랑받기 위해 격한 몸부림을 쳤을 때로 기억한다. 부모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었고, 동생이 태어난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한없이 가벼웠다.
그날은 오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점심시간이 끝난 5교시 수업 시간이었고, 나는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받고 옆 건물에 있는 교무실로 다녀오는 중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녀온 나는 교실 뒷문을 열었다. 녹이 슬어 뻑뻑한 교실문은 쇠를 긁는 소리를 냈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려 버렸다. 칠판 앞 책상에 앉아 계신 담임선생님도, 교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멍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주위에 앉아있는 친구들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한없이 가벼운 너희들을 무거운 돌덩어리를 달아놓은 마냥 왜 가만히 눌러있는 것이냐고. 그러자 한 친구가 정적을 깨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걔 방금 죽었대.’
그 친구의 이름은 미안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죽기 몇 달 전 한밤중에 중환자실로 갔다. 자세한 병명은 아직까지 모른다. 아마 학부형들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할 텐데, 우리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어떤 이유로 병원에 가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친구가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해 놀았다.
그가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병원에 실려간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같은 반 친구들의 편지를 전해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편지를 썼다. 그와 친했던 아이들도,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도 모두 편지를 썼다. 너나 할 것 없이 편지 앞에서 아이들은 평등했다. 병원에 간 아이는 가련한 존재가 되었고, 우리들은 졸지에 승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슬프게도 중환자실에서 막 깨어난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얼마 남짓한 단어들을 다 찾아보았지만, 정작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랐다.
내 속엔 그에게 해줄 말이 전혀 없었다. 설사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건 진심이 될 수 없었다. 나는 그와 친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나는 몹시 두려웠고,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그가 편지를 잘 읽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얼마 후, 그의 책상에는 하얀색 국화꽃 다발이 놓여있었다.
*
동십자각(東十字閣)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걸은 지 2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길거리에 있는 저 망루는 본래 궁궐의 동쪽을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일제가 도로를 만들다는 핑계로 성벽을 허물었고, 여태껏 홀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자동차들은 망루와 성벽이 떨어져있는 틈으로 획획 지나간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마냥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망루의 맞은편에는 한복대여점이 생겼다. 그곳에는 항상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비했는데, 대부분 머리에 히잡을 두르거나 중국인들이었다. 이들은 형형색색의 한복을 빌려 입고 종종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도보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술관에 가기 위해선, 매번 무단 점거한 사람들을 뚫고 나아가야만 했다.
내가 처음으로 미술관에 갔을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날마다 기온이 사상 최고를 갱신 했었고, 나는 집에 에어컨이 없는 이유로, 해가 떠 있을 시간에는 항상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는 둥,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 때문에,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지치고 말았다. 나는 다른 시원한 공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곳을 찾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은 집에서 알맞은 거리에 있었다. 정류장에 내린 다음, 조금 걸어야 한다는 점은 있었지만,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미술관으로 향했다.(무엇보다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이 나로서는 굉장한 혜택이었다)
그때부터 였을까, 나는 줄곧 미술관에 갔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집을 나설 때면, 나의 발걸음은 대부분 같은 장소로 이어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거라곤 오직 단순한 지식들, 특히 교과서나 교양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들이었고, 그마저도 드문드문 외울 정도였다. 나는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어쭙잖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작품에게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로 나에게 다가왔고, 내가 여태껏 알고 지낸 모든 개념들을 차분히 무너뜨렸다. 그 무너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며들었다. 나는 상쾌했다. 감정의 붕괴는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충격이었다. 마치 둔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강하게 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는 새로운 감정들을, 그 자리에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었다.
시간은 멈추고, 공간 속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모든 것이 단절된 공간. 이곳에는 ‘작품’과 ‘나’ 둘만이 존재했다.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있는지 모른 채, 나는 오로지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관람객들이 있건 없건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여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는 것, 이곳은 내가 찾던 단절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혼자였고, 누구도 나를 부르지도, 건들지도 않았다.
*
다시 찾은 미술관에는 ‘마르셀 뒤샹’의 전시가 펼쳐져 있었다. 이번 전시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들을 한국에 가지고 와서 진열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대표적인 설치 미술 작품들은 파손 위험의 이유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샘> 같은 비교적 크기가 작은 레디메이드 작품들이나 그의 초기 회화 작품들은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예술적 삶을 교과서에서 단 몇 줄 가량으로 배웠다. 그러나 실제로 본 그의 작품 세계는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깊었고, 다채로웠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저작권의 이유로 그러했는데, 나는 내 두 눈으로 모든 작품들을 열심히 담고 있었지만, 종종 친구끼리 짝을 지어 관람하는 사람들은 몰래 사진을 찍고 있었고, 걸핏하면 안내원들에게 주의를 듣곤 했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관람을 이어갔다.
전시의 첫 시작은 그의 유년기 회화 작품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마르셀 뒤샹은 설치 미술을 하기 전에 입체파의 회화들로 주목을 받았다. 그 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2>라는 작품이 대표적인데, 운 좋게도 전시가 되어서 나는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입체적 그림에 넋이 나갔다. 누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하얀 몸은 꿈으로 지친 내 정신과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각 층계 마다 그 모습을 달리 하고 있었는데, 측면인지, 정면인지, 아니면 정말 사람이 맞는지 모를 만큼 대상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관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에탕 도네>(Étant Donnés)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비교적 크기가 큰 설치 작품이어서, 작품을 보여주는 비디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우리말로 ‘주어진 것’이라는 작품은 나무로 된 두개의 문으로 감춰져 필라델피아 미술관 한 켠에 있었다. 문에는 작은 구멍이 마치 안을 엿보기 원하는 것처럼 뚫려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한쪽 눈을 찡그린 채 구멍을 엿보았고, 다들 충격을 받았다. 구멍 속에 존재하는 건, 벌거벗은 여성의 모형이었다. 나체의 여성 모형은 팔과 다리를 벌리고, 음부를 드러내 놓은 채 풀 숲에 누워있다. 그녀는 손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램프를 들고 있다.
영상은 작품의 시퀀스에 맞게끔 제작되었다. 나는 그 영상 앞에서 한동안 서있게 되었다.
관음. 나는 엿보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과연 관음인 것인가. 내가 미술관을 사랑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미술관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사람들 속에 숨어서 합법적인 관음을 누린다. 나는 눈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각각 생각을 투영한다. 진정한 쾌락은 나의 것이 아닌 게 내 것이 되는 과정에 존재한다. 그들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나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화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현대인들은 모두 관음증 환자들이다’고 했다.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분명 나와 같은 행동을 하며,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자 갈증이 느껴졌다. 음수대는 출구 바로 앞에 있어서 나기 통로를 빠져 나온 다음 앞으로 갔다. 음수대에서는 누군가 이미 물을 마시고 있는 중이라 나는 한 걸음 뒤에 서있었다. 관람객이 물을 다 마신 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물을 허겁지겁 마셔댔다. 급하게 물을 마신 나머지 턱과 목에는 물이 흘러 내렸고, 나는 소매로 물을 닦았다.
뒤를 돌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종수”
4. 해미
*
해미였다.
나는 무척이나 놀라서 마시던 물을 다 토해낼 뻔 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다른 나라에 가 있었는데. 서울의 중심에서, 더구나 평일의 미술관에서 볼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2년 전에 프랑스로 떠났다. 출국 전날, 나는 그녀에게 하필이면 왜 프랑스냐고 물어봤다.
“글쎄.『이방인』을 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인가? 나도 잘 몰라. 그냥 교환학생을 신청할 때, 머릿속에 ‘프랑스’라는 생각밖에 안들었어.”
다음날 그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처음으로 연락을 해왔다.
“나 한국으로 영영 안 돌아갈 거야.”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날 먼저 알아보고서, 내 등을 두드린 채, 예전과 같은 호기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우리는 미술관 안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너가 여기 오다니 무슨 일이야?”
해미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말했다. 나는 그 의도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라니. 해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여기 오면 안 될만한 사람이라는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험한 말을 할 뻔 했지만, 끝내 이성을 부여잡고서 대답했다.
“응, 그냥 그림 좀 보려고 왔어. 알잖아, 오늘 특별전시 하는 거.”
“사실, 아까 좀 놀랐어. 처음에 너 아닌 줄 알았거든. 나도 전시회가 열려서 천천히 관람하고 있었는데, 너랑 비슷한 사람이 저 멀리에 있는 거야. 그래서 전시 중간부터 먼 발치에서 따라가며 바라봤지. 그런데 정말 너 맞더라고. 엄청 반가웠어. 놀래키면 재밌겠다 싶어서 마지막까지 기다렸는데, 너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더라고. 엄청 집중하고 있는 듯 했어. 그래서 기다렸어. 그걸 깨뜨리는 건 너무 무례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물 마실 때 뒤에서 건드린 거다?”
“응. 뭐 어떡하겠어. 너가 나가자마자 바로 물 마시러 가던데. 나로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그렇지?”
나는 생글생글 웃고있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능글맞았고, 항상 재미있는 상황, 그 자체를 좋아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매번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었다. 그런 그녀가 아는 사람들과 있을 땐, 내가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어땠는지 모두다 알 것이다.
“그래. 덕분에 나는 숨이 막혀 죽을 뻔 했네.”
정말이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등을 두드린다는 것을. 그것은 공포다. 그 공포는 익명성이 벗겨질 때 찾아온다. 그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면,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내가 여태껏 해왔던 행동들. 내가 여태껏 말해온 말들. 내가 여태껏 보았던 대상들. 아, 누군가 날 알아보았구나. 이젠 어쩌지. 누군가 날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버금가는 두려움. 그러나 날 죽일 뻔 한 사람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죽긴 뭘 죽어. 지금은 이렇게 숨 쉬고 있잖아.”
해미는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역시 너는 쓸데없이 진지하다니까.”
맞은 어깨가 살살 아파왔다. 그녀는 쓸데없이 힘이 셌다. 조용한 하루를 기대하고 나왔는데. 집 앞에서나, 여기서나, 모두 소란스러웠다. 나는 이내 고요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무슨 일이야?”
나는 궁금함을 못 참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커피 마시러 갈래?”
*
그녀는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나는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카푸치노는 훌륭했다. 적당히 데워진 우유와 부드러운 거품, 에스프레소 샷, 그것들의 적절한 조화. 무심코 들어간 카페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이야. 여기 에스프레소 진짜 맛있다. 프랑스에서 마시던 거랑 정말 비슷해.”
그녀는 머그잔을 접시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잔은 벌써 바닥이 보였다.
“아마 주인분이 원두 로스팅을 세게 한 게 분명해. 프랑스에선 로스팅을 강하게 하거든. 그쪽 사람들은 우리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는게 아니라, 주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니까. 고온, 고압으로 짧게 추출하는 커피가 대부분인데, 로스팅을 약하게 하면 맛이 너무 밋밋해지거든. 그래서 원두를 거의 태우듯이 볶아. 한번은 아침 일찍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카페에서 너무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거야. 알고 봤더니 한창 원두를 볶고 있었어. 고소한 장작을 세게 태우면 나는 향기랄까. 아무튼 여태껏 맡아 본 냄새 중에 가장 강렬했어.”
나에게 가장 강렬했던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니 나도 타는 냄새가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선산으로 갔다. 같이 동행 한 집안 사람들과 제사를 지내고, 벌초를 했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제사가 끝나자마자 뛰어놀기 바빴다. 우리는 잡초들을 태웠다. 잡초들은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처음 불을 짚일 때 애를 먹었지만, 이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에 타기 시작했다. 고소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너무나 고소한 향기는 나를 매료시키는데 충분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빠알간 불꽃은 점차 나를 미지의 세계로 -“’쥐’는 잘 있어?”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무슨 ‘쥐’를 말하는 거야?”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도 덩달아 놀란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무슨 ‘쥐’라니? 네 친구 쥐 말이야. 쥐가 너 주변에 하나 밖에 더 있니?”
나는 안도했다. 그래 그녀가 알 리가 없지. 그 상황은 나에게만 일어난 것이니까. 그 누구도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알 수 가 없다. 물론 말해준다 하더라도, 과연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아 쥐는 잘 지내고 있지. 가끔 서로 만나고 있어.”
“그렇구나.”
그 말을 내뱉고, 그녀는 잠시 동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쥐에게 안부 전해줘.”
그녀는 결심하듯 나에게 말했다.
“알았어, 꼭 전해주도록 할게. 그런데 아직 대답 못한 한가지 질문이 남았지?”
“글쎄. 그 질문이 뭐였더라?”
“왜 한국에 돌아왔냐고. 너 나한테 영영 프랑스에서 살겠다고 했잖아. 딱히 지금 시점에 돌아올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그런가. 내가 돌아오면 안되는 거야?”
숨이 막혔다. 그녀가 나를 두드렸을 때,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알아보고 난 뒤에는, 내 기억 속에서 ‘해미’에 대한 잊고있던 존재들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환이 몹시 반가웠다. 그녀가 돌아오면 안 될만한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지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등지고 떠났지 않았던가.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겐 한 가지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의 단 한 가지 이유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이유 따윈 없지. 그런데, 쥐한테는 뭐라고 얘기해?”
나는 친구의 핑계를 삼아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했다.
“음, 향수병에 걸려서 잠깐 들렸다고 말해줘.”
“그게 전부야?”
“응. 그게 전부지. 어때? 간단명료하고, 좋지?”
그녀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그래 정말 좋다. 정말로 좋아.”
“그럴 줄 알았어. 아, 잠깐만”
그녀는 의자 뒤에 걸쳐놓은 갈색 가죽가방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 가방 속을 헤집었다.
“이거 너 줄게.”
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연갈색 표지의 프랑스 책이었다. 표지에는 영화에서 봤던 것 같은 알파벳으로 [L’Etranger] 라고 쓰여 있었다.
“레…트랑저? 이게 뭐야?”
해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책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모르겠어? 한번 잘 생각해 봐.”
“아까부터 무슨 수수께기 특집도 아니고, 만난 다음부터 알 수 없는 문제만 내는 구나. 난 너처럼 프랑스어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으니까, 장난은 그만하고 빨리 알려줄래?
“난 여태 장난친 적 없는데.”
해미는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시무룩해진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여태까지 연락도 일절 하지 않다가, 변한 것 없는 모습 그대로 돌연히 나타나서는, 스무고개나 하고 있는 상황 자체에 서운함이 들었던 것일까. 참고 참았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표출되고 말았다. 감정을 더 숨겼어야만 했는데. 나는 그녀의 기분을 망친 것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다.
“알았어, 미안해. 그렇게 시무룩해지지 마.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
“그래? 알겠어. 근데 난 밥 말고 술이 좋은데. 내일 저녁에 만나.”
해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 해미가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이제 좀 얘기해 줄래? 나 정말 피곤해서 집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아.”
“네네. 잘 들어보세요. [L’]는 영어로 ‘The’고, [Etranger]는 ‘Stranger’. 이제 알겠어?”
‘The Stranger’. 책은 <이방인>의 프랑스 원본이었다.
“일부러 너 줄려고 사왔는데. 너는 원본을 알아볼 것만 같았거든. 센느 강 옆에 있는 유명한 서점에서 샀어. ‘셰익스피어 & 컴퍼니’라고 하는 서점. 헤밍웨이가 좋아한 서점이었지 아마.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나올 걸? 서점을 구경하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 버렸어. 너 알베르 카뮈 좋아하잖아. 언젠가 한국에 간다면 너한테 주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우디 앨런 감독의 그 영화를 보았지만, 영화에 서점이 나오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날 위해 선물을 가져온 해미가 너무나 고마웠다. 적어도 내 생각을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구나. 정말 고마워. 근데 이거 어쩌지, 난 프랑스어를 하나도 모르는데.”
“읽으라고 사온 거 아니야. 그냥 갖고 있으면 돼. 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해미의 말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알았어. 잘 갖고 있을게. 선물 고맙다.”
“그럼 그럼. 누가 주는 건데 잘 갖고 있어야지. 이제 일어나자. 너 피곤하다며.”
해미와 나는 카페를 나왔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나는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두근거렸지만, 그 두근거림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끝나고 말았다.
하차 벨을 누르고 카드를 단말기에 찍었을 때, 쥐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지금 그 술집에 있어. 취해 버릴 것 같으니까 빨리 와.’
나는 ‘우연이라는 악이 존재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5. 우연
*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쥐가 있는 그 술집으로 향했다. 쥐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붙이고, 턱을 괸 채 앉아있었다. 쥐는 문으로 들어서는 날 보자마자, 머리 위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쥐의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런 쥐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분명 부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쥐가 앉아있는 테이블 앞으로 간 다음,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게 도대체 뭐야?” 나는 말했다.
“뭐긴 뭐야. 술 마시는데 이유 따윈 중요치 않잖아?”
쥐는 호기롭게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건 별개이고. 아니 그렇게 뜬금없이 부르면 어떡해?”
“원래 인생의 의미는 번개에 있는 거야. 무심코 호출한 대상과의 술자리. 성사가 된다면, 되었을 때의 그 짜릿함과 기대감. 그 짜릿함은 말로 표현 못하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야. 만약 성사가 안된다면, 뭐 어쩔 수 없고.”
쥐는 여전히 두 손바닥을 내보인 채 말을 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장엄했기 때문에, 목에 십자가를 두른 사람이나, 머리에 터번을 두른 사람이 그 모습을 본다면, 분명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다.
“너만의 철학은 잠시 넣어두시고. 그 문자의 의미는 뭐냐?”
“무슨 문자?”
나는 벽에 기대고 있는 메뉴판으로 그의 뺨을 강하게 칠 뻔 했다. 만약 그가 다음 말을 바로 이어서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 그거. 당연히 널 여기로 부르기 위한 장치지. 그렇게까지 리얼하지 않으면, 너가 여기로 오지 않았을 거잖아? 내가 아는 ‘너’는 분명 그럴 테고.”
“내가 오지 않았을 수 도 있잖아.”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정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그는 말을 마치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이요.”
우리는 금새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잔을 벌써 반쯤 비운 쥐가 손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캬. 정말 최곤데? 맥주 맛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아. 이것이 번개의 힘인가?”
나는 번개의 힘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하고 싶었다. 특히 입 부분을. 저 가당찮은 주둥아리를 빨갛게 만들어야 조용해 질려나. 하긴,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것도 재능 아닌 재능이었다. 나는 말 없이 맥주를 한 모금 더 집어넣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떠들어대던 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쥐는 앞에 놓인 잔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사색에 잠긴 듯 보인 쥐는 이윽고 말하기 시작했다.
“너랑 나랑 마신 맥주가 얼마나 될까?”
나는 쥐가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쥐는 “물론, 중요하고 말고. 정말 중요하지.” 라고 말하며 잔을 금새 비워버렸다.
“난 말이야, 원대한 꿈이 있어. 그것은 바로 맥주를 25미터 풀장을 가득 채울 만큼 마시는 거야. 어때, 섹시하지 않니?”
“그래, 정말 섹시한 꿈이구나. 섹시하다 못해 외설적이다.”
나는 쥐가 맥주로 가득 채운 25미터 풀장에 익사해서 고개를 쳐 박고 둥둥 떠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어디서 들은 듯 한 말이었다. 나는 쥐에게 말했다.
“근데 이거 어디서 들었던가? 뭔가 익숙한데?”
“글쎄… 뭐 ‘어디서든’ 들었겠지. 혹은 읽었거나. 그런데 그게 중요하냐. 앞에 잔이 비워진 게 중요하지.”
쥐는 손을 들고서 다시 두 잔을 주문했다.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일에는…아 감사합니다. 네, 거기 앞에다 놔주시면 돼요… 정말 이유가 있었어.”
쥐는 방금 나온 맥주를 또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그게 무슨 일인데.”
“글쎄…이제부터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보라고. 내가 오늘 아르바이트를 하러 카페에 출근했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이상한 거야. 왜 있잖아, 흠칫흠칫 쳐다보는 거.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하던 대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어.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사장이 날 호출하는 거야. 그래서 갔지. 사장은 날 2층으로 대리고 갔어. 우리 매장 알잖아, 2층에도 좌석 있는 거. 때마침 손님도 없어서 2층엔 사장과 나 단 둘만 있었지. 우리는 마주보며 자리했어. 그러자 사장이 말하더라고. 혹시 몰래 가져간 게 있다면 털어 놓으라고. 지금 사실대로 얘기하면 다 용서해주겠다고. 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어. 뭘 훔쳐간 게 있어야 말이지. 알잖아 나 그런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주었지. 무언가를 가져가야 드리죠. 그러자 사장은 버럭 화를 내는 거야.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음에 사장이 한 얘기를 듣고 난 더 큰 충격을 받았지. 얘기인 즉슨, 현금이 사라졌다는 거야. 자기가 오늘 아침 현금 매출 정산표를 확인 했는데, 표에 나와 있는 것보다 시재금이 부족하다는 거야. 그래서 직원들에게 수소문을 했다네. 어제 마감 친 사람 누구냐고. 불행히도 어제 저녁엔 나 홀로 마감하는 날이었지 뭐야. 그래서 모든 직원들과 사장이 날 유력한 범죄 용의자로 지목한 거였어. 말 그대로 ‘중상모략’을 당한 것이지. 난 사장한테 따졌어. 아니,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날 의심할 수 있냐고. 난 정말 분했어. 매장 안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야. 난 금새 이 공간이 두려워졌어. 만약, 사건이 잘 마무리가 되어도 이 공동체 안에서는 다시금 반복되리란 확신이 들었지. 그래서 사장한테 말했어. 난 정말 가져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 그렇게 날 못 믿겠다면, 우선 경찰에 연락해서 CCTV를 확인하시라고. 그리고 난 사건의 진상과 별개로 오늘부터 그만 두겠다고. 난 말을 마친 즉시 집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방금 문자가 온 거야. 미안하다고. 영상을 확인 해봤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웃긴 상황이야. 정말 웃기지 않아?”
긴 말을 마친 쥐는 남아있는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그래서, 누가 범인이래?”
“모르지. 사실 그건 중요치 않아. 정말 중요하지 않다고. 젠장할.”
나는 쥐가 진심으로 억울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또한 자기 대신에 돈을 훔쳐간, 미쳐 잡히지 않은 범인에 대해서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약 옛날의 쥐였으면 분명 사장의 얼굴을 한 대 치고 나왔을 것이다. 이 정도면 쥐 치곤 아주 잘 참은 셈이었다. 쥐의 억눌려진 화는 지금 내 앞에서 폭발적인 음주로 승화되고 있었다. 억압된 것으로의 회귀. 그 말은 백 번 말해도 맞는 말이었다.
“아, 나도 마침 할 얘기가 생겼어.”
“그래? 의외이군. 정말 의외인데?”
내 말에 반응을 한 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우 막 터지려고 한다.”
쥐는 바지춤을 부여잡고서, 종종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채, 내 몫의 맥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었다. 쥐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셔 댔으니, 그에 걸맞는 합당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게 분명했다. 내 잔이 거의 비워질 때 쯤, 쥐가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는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어우, 죽다 살았네. 그래 아까 할 얘기 있다면서.”
쥐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들어 맥주를 주문했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오늘 해미를 만났어.”
“응? 뭐라고?”
“해미 말이야.”
쥐는 그 말을 듣고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주문했던 맥주가 쥐의 침묵을 깨었고, 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늘 낮에 잠깐 미술관 갔다 왔는데, 거기서 우연히 만났어. 최근에 들어왔대.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그래?”
그 말을 남기고서, 쥐는 더이상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나는 말을 꺼낸 뒤로 이어진 주의 단답형 대답과, 맥주를 거부하는 그의 상태가 몹시 걱정되었다. 혹여 내가 실수라도 했는지, 나는 그와 여태껏 나눴던 대화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고 있었다.
“다른 말은 안 하디?”
쥐가 나에게 질문했다.
“응. 별다른 말은 없었어.”
사실이었다. 그녀는 내게 안부 만을 전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 이행했을 뿐이었다.
“그랬겠지. 분명 그랬을거야.”
나는 쥐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신기해하거나 반가워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쥐의 미적지근한 반응은 정말 이상했다.
“사실… 너한테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쥐의 낯빛은 금새 어두워졌다. 쥐는 무언가 거대한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거렸다. 새로 주문한 맥주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유리잔 바깥에는 물방울들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아도 매우 미끄러워 보였다. 쥐는 다짐한것처럼 고개를 지긋이 세우고, 내 눈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나 해미랑 사귀었었어.”
날 바라보고 있는 쥐의 눈동자는, 도리어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싫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어. 저번에 우리 셋이 만났을 때 있잖아. 대학교 들어간 다음 첫 술자리. 그때 너 혼자 집에 갔을 때. 나랑 해미는 밤새 마시다가 해미네 집으로 가게 되었고, 우린 그렇게 자 버렸어. 뭐, 이제는 다 옛날 일이지만.”
쥐는 잔에 들어있는 맥주를 몽땅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근데, 해미가 나름 잘 하기는 했거든. 참 잘하긴 했어.”
*
해미와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른 반이었던 쥐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줄곧 붙어 다녔다. 쥐와 나는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해미는 근처의 여학교에서 중고등과정을 마쳤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건 대학교를 입학하고 나서였고, 나에겐 그때가 성인이 된 이후의 해미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내 등을 두드리기 전까지.
*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회색 벽이었다. 방금 전까지 잠에 들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던 것만 같았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안개가 가득한 밤 하늘은 여전히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어두웠다.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희미한 빛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 희미한 빛을 향해서, 나의 몸은 움직이기 시작해버렸다.
얼마간 걸었던 걸까. 처음엔 형태를 알 수 없었던 빛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빛은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또렷해졌다. 그것은 가로등이었다. 길 거리에 홀로 서있는 가로등. 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다 문득, 내 귀에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다가갈 수록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나는 금새 분명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노래였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6. A Rush Of Blood To The Head
*
나는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멜로디였다. 아직 가사가 자세히 들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익숙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대체 누가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또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몹시 알고 싶었다. 나는 거의 뛰다시피 가로등 쪽으로 다가갔다.
“…”
갑자기 노래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멈춰서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던 탓일까. 노래를 부르던 대상은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대상은 알아차렸고, 나는 들켰다. 그 찰나의 순간 동안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마와 등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나의 몸은 차가운 밤 공기와는 다르게 뜨거워졌고, 심장은 요동쳤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간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이 안되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여태껏 이곳에서 나를 쫓아오던 그 존재라면.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그 존재가 달려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은 안되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과연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가로등이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불빛을 비추고 있는 곳에는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조금만 더 전진하면, 조금만 더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버렸다. 나를 감싸고 있는 냉혹한 무기력함은 내 두 다리를 밧줄처럼 꽁꽁 묶어놓았다.
그러자, 다시 노래가 들려왔다.
“Come Up To Meet You, Tell You I’m Sorry…”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가사와 멜로디는 조금 전 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The Scientist’.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콜드플레이(Coldplay)의 노래였다. 여태 들려온 노래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니. 나는 그 노래를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에 당혹감이 들었다. 예전에 나는 친구들과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소문난 콜드플레이의 마니아라는 걸 알고, 얼만큼 깊게 알고 있는지 한번 시험해보고자 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들이 콜드플레이의 노래를 아무거나 선정한 다음, 곡의 앞 부분을 3초동안 들려주면, 나는 그 곡을 알아맞히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조금 무모하지 않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얼마나 많은 곡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이기면 그들이 맥주를 대접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내기에 임했다. 그리고 결과는 나의 승리였다.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모든 노래들을 알아맞혔다. 게다가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내가 곡이 몇 번째 앨범의 몇 번 트랙인지까지 전부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곡에 관한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에, 나는 그저 말했던 것이었다. 이 무모한 테스트(?)는 20번째 까지 진행되었는데, 나는 12번째부터 새삼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Nobody Said It Was Easy…”
노래는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주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난대없이 들려온 이 노랫소리는, 나를 부르기 위해 계속 울려 펴지는 것처럼, 이 거리에 계속 맴돌았다. 나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뱃사람 마냥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저 빛을 향해 기필코 다가가리라. 저 빛에 다다르면 반드시 마주하리라. 그 끝엔 무엇이 있든 좋다.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이 있다면, 기어이 집어삼켜지겠다. 그러기위해선 다가가야만 한다. 저 빛을 향해. 나의 두려움을 향해. 다가서는 행위가 있어야만, 마주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스스로 다가서야만 의미가 있다. 최후로 다가서는 것, 그 자체가 시작과 끝이다. 그러니 움직여라. 어서 움직여야만 한다.
나는 힘겹게 오른쪽 다리를 들고서,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왼발을 들고 앞으로 내딛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한 발, 다시 한 발. 나는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한 발 한 발을 차례차례 내딛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랬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한 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 발만 바라보면서 차근차근 이 거리를 내딛었다. 거리를 내딛을 때 마다 노래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자 내 발끝 너머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앞으로만 갔다. 마침내 나의 발은 가로등이 만들어 놓은 ‘빛의 제국’으로 입성했다.
“Oh Let’s Go Back To The…”
내가 불빛에 당도하자마자, 노래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나는 빛의 가장자리에 두 발을 올리고 서서, 앞에 놓여진 드럼통을 천천히 올려다봤다. 그리고 다시금 나타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했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쥐가, 우리집 화단에서 사라진 쥐가, 그곳에 앉아있었다.
쥐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이방인? (Hello, Stranger?)”
*
“방금 한 말, 무슨 영화의 대사 아니야?”
“오, 맞아. 넌 역시 아는구나. 영화 ‘클로저(Closer)’의 대사지.”
쥐는 앞 발로 머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코 옆에 난 길쭉한 수염을 양 발로 한 가닥, 한 가닥 쓸어내렸다.
나는 양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이곳까지 힘겹게 걸어오느라 쌓인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온 몸의 피가 내 머리 쪽으로 쏠리는 느낌. 그러고 보니, ’The Scientist’가 수록된 앨범의 이름도 ‘A Rush Of Blood To The Head’였다. 지금 나의 상태처럼.
“근데, 정확한 대사는 ‘이방인’이 아니라 ‘낯선 사람’아닌가?” 나는 쥐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아무렴 뭐 어때. 나는 너한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이방인’이라고 한 것일 뿐이야.”
쥐는 여전히 수염을 정리해가며 말했다. 이제는 왼쪽에 위치한 수염들을 만질 차례였다.
“아까 그 노래, 너가 불렀던 거야?”
“당연한 걸 왜 알면서 물어봐? 이곳에 너랑 나 말고 누가 더 있기라도 한 거야?”
나는 쥐의 태연함에 적잖이 당황했다.
“너가 불렀던 거 ’The Scientist’ 맞지? 꽤 잘 부르던데?”
“오호라. 너도 콜드플레이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말이 좀 통하겠는데.”
쥐는 수염 정리를 마저 끝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다음 양 발로 팔짱(?)을 끼고서, 선 채로 말했다.
“역시 넌 ‘좋은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좋은 사람’이라니.”
“콜드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은 없거든.”
나는 곧장 하고싶은 말이 생각났으나 앞에 있는 쥐의 당당함에 그것을 잊고 말았다. 나는 방금 쥐가 했던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듣고 보니 쥐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콜드플레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과연 살인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변태적인 사람을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으챠”
갑자기 쥐가 드럼통에서 뛰어내렸다.
“좀 걷지 않을래?”
*
쥐는 조금 앞에서 ‘두 발’로 걸어가고있었다. 나는 쥐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따라갔다. 우리는 말없이 걷고있었다.
맨날 이런 식이었다. 난대없이 나타난 대상들은 왜 항상 나를 보면 걷고 싶어지는 걸까. 내 입장에서 그들은 풀어질 수 없는 매듭 그 자체였다. 그들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매듭을 푸는 것은 바로 나였다. 하지만 단단히 꼬여진 그 매듭을 풀려 몇 번을 시도해도, 그것은 점점 더 강하게 조여지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설명되어질 수 없는, 풀리지않는 문제들로 가득한 세계. 그러나 ‘그 자체’로 어떻게든 작동하는 세계. 그런 세계를 보면 볼수록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난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고. 누구나 한 가지씩은 특별한 것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을 한 뒤에는 자신에 대해서 짜증을 내기 일수였다.
그러나 난 그들을 보면서 확신에 차올랐다. 너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구나.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마주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지쳤다. 더이상 움직일 힘도, 말하고 싶은 욕망도 다 빠져나가버렸다. 그래서 그냥 조용하려고만 했다. 이곳에서 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난 쥐가 좋았다. 화단에 누워있던 그 평온한 얼굴. 그 상태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다양한 색들로 가득한 것 같았다. 커다란 캔버스에 붓을 들고서 죽죽 그어 나간 마크 로스코의 그림처럼.
그런데 바로 그 쥐가, 갑자기 사라진 쥐가, 내 앞에 나타나서 난대없이 노래를 부르고, 이제는 같이 걷고 있었다. 나는 쥐가 뭐라도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뭐라도 말 좀 해줬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서, 이대로 끝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었을 뿐이었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말없이 헤치고 나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낭떠러지였다. 우리는 길의 끝에 나란히 서서, 깊은 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을까, 드디어 쥐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쥐는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너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어’. 너도 이해 할 수 있을 거야.”
쥐의 말은, 나에게 여태껏 일어났던 모든 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시켰다. 나는 그 압축된 문장이 너무도 싫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해왔던 행동들, 그것들이 마주치는 곳에서 발생했던 모든 갈등들, 그리고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나의 무수한 시도들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되었다. 그래서 나는 쥐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걸 말할 수 없다면, 중요한 걸 말할 수 없다면, 무엇이 중요한 건데? 말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나의 말을 듣고서 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쥐가 말했다.
“글쎄. 아무튼 넌 나를 만나러 저 어두컴컴한 곳을 뚫고 나왔잖아? 그 끝엔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들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것이 이 세상에 반항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알 것만 같다. 설명할 수 없다면, 그대로 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나’다운 것들로 묵묵히 채워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이었다.
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오호, 표정을 보아하니 정리가 다 된 것 같은데?”
쥐는 앞발로 내 손을 잡더니, 내 손 위에 무언가를 건내 주었다. 나는 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쥐가 건내 준 것은 라이터였다.
“이게 뭐야?”
“이제 너에겐 마지막만 남았어. 반드시 직접 해야만 해.”
쥐는 그렇게 말하고서,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낭떠러지의 끝에서 쥐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양쪽 발을 쫙 핀 채로 서있었다. 한발짝만 내딛으면 떨어질 거리였다.
“자 어서. 이번엔 너가 태울 차례야.”
끝과 시작. 그 중간엔 항상 ‘태우는 것’이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태워야만 했다. 나는 결심했다.
“안녕, 친구.”
그렇게 말하고 나는 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찰칵’하면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손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삐죽 튀어나온 꼬리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불씨는 꼬리를 타고서, 쥐의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속도는 기름에 불을 붙인 마냥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쥐는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몸과 불은 이미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떠내려가는 빠알간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변한 듯 몸은 상쾌했다. 나는 내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해미가 나에게 준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들고서 집 앞의 화단으로 향했다.
나는 쥐가 없어진 그 자리에, 둥그렇게 흙을 팠다. 그런 다음 책에 불을 붙이고서 그 자리에 두었다. 책은 가장자리부터 점점 타 들어갔다.
달큰한 냄새가 기분 좋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냄새는 너무나 향기로웠다. 어렸을 적, 산소에서 풀을 태우던 냄새처럼. 나는 하염없이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