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1314
1회
더위의 나비효과
“살려주세요..”
남자는 바닥을 기며 말했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 남자의 앞에 반쯤 앉았다.
“내 얼굴 봐요.”
남자는 엎드린 채로 구두 앞만 바라보았다. 검은 구두엔 구두약이 윤이 나게 발려 있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사람의 얼굴을 보면 살아날 가능성 따윈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얼른”
남자는 덜덜 떨면서 위를 올려다봤고, 두 시선이 맞닿았다.
“어때요. 아주 작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기분은?”
남자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금세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완전히 엎어진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쌓여가는 하얀 눈이었다.
*
“작가님, 남자의 사망 과정이 너무 간결하지 않나요?”
“편집장님, 오늘은 이만해요. 벌써 5시간째잖아요….”
출판사 ‘새누’의 회의실, 상희와 시우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상희의 불타는 열정에 지친 시우가 책상에 엎드렸다.
안 그래도 밤새 글을 쓰느라 찌뿌둥한 몸을 장소만 바꿔서 혹사시키는 기분이었다.
“독자에게 공포감을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별로 무섭지 않아요.”
뭐 안 무서워?
책상에 엎드려 있던 시우가 벌떡 일어나 몸을 세워 앉았다.
“편집장님, 앞선 <침묵의 새들> 부분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반복적으로 살해 장면을 묘사하면 읽는 독자가 안 지치겠어요?”
“안 지치게 적는 게 작가님의...”
능력이겠죠, 상희는 뒷말을 삼켰다.
다행이다 이 말까지 했으면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모른다.
시우가 상희를 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집에 좀 가자!
“아, 언니! 오랜만에 오탈자도 없고, 주어 술어도 완벽한! 손댈 곳 없는 글을 받아서 시간이 남아돌지? 아까 박편집자가 뭐랬더라, 오탈자 수정하느라 야근이랬지? 다음 원고부터 오탈자 파티 한 번 해줘?”
“이시우, 나 니 편집자야. 아무리 그래도 다섯 번씩은 읽어.”
고등학교 때 봉사동아리에서 상희를 처음 만났다. 같은 동아리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관심사가 같아서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책’이었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상희는 출판사 대표, 시우는 작가라는 꿈을 키워나갔었다. 상희라는 사람은 시우에게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구를 넘어 의지하는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둘은 꿈을 함께 이뤄가고 있었다. 시우의 책을 상희와 출판하는 일.
물론 상희는 아직 출판사 대표가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차기 대표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 고등학교 땐 소설 쓰는 족족 나한테 가져와서 한 번만 읽어달라고! 읽어달라고 애원하던 거 기억 안 나?”
이 언니가 그렇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할 말은 없지.
“그러지 말고 우리 매운 족발이나 먹으러 가자아..”
시우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불쌍한 표정으로 상희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오늘 술은 안 마실게, 언니 응?
“알겠어, 나 퇴근하고 7시에.”
시우가 신난다는 표정으로 잽싸게 가방을 챙겼다. 상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시우를 쳐다봤다. 벌써 가방을 다 챙겼어?
시우가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준한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준한과 코앞에서 부딪힐 뻔한 시우가 비명을 목 안으로 삼키곤, 인사를 했다.
준한은 마주 보고 인사를 하며 시우를 지나쳐갔다.
“서편집장, <너의 뒤에서> 비닐 커버에 오타 있어. 스티커 작업 다시 해야겠어.”
“그 책… 모레… 출간인데요…?”
준한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상희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준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오늘 족발 먹긴 글렀네,
마음으로 응원해주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싸 집 간다.
해방감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신나게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입가에 흐르던 웃음은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아..?”
준한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공장 창고에 갈 일이 생겨서요.”
시우는 어색하게 앞을 보고 서 있었다. 준한을 힐끗 쳐다봐도 늘 짓고있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네 저도 아까 들었어요.
스티커 작업 하러 공장에 가시는군요. 편집장님은 7시까지 퇴근할 수 없겠죠?
친했다면 물어봤을 말들이었다.
준한과 시우는 상희를 통해 2년전 새누의 창립 때부터 봐왔지만 세월에 반비례하는 친밀감을 가졌다. 준한은 가만히 있어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납게 생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럽게 생기지도 않았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차가운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
잠시 대화를 나눠보니, 다시 한번 어색한 사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시우가 내렸다. 로비 밖에 보이는 여름 볕이 보기만 해도 더웠다.
“차 타실래요?”
준한이 시우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나한테 태워다준다고 말한 거야? 시우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걷는 걸 좋아해서요.”
준한이 로비 밖 볕을 보며 ‘이 날씨에 걸어?’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히 가세요, 대표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시우는 로비로 걸어나왔다.
어색한 상황을 모면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서로 같이 있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모르겠는 사람. 그런 준한과 같이 퇴근할 수 없었다.
유리벽 너머로로 보이는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타고 갈 걸 그랬나.
마음이 불편한 것보단 적어도 맘 편하게 몸이 불편한 게 낫지!
미적거리면서 밖을 나서자 나온 첫 마디는 덥다였다.
올해는 차를 사든가 해야지. 아니, 그 전에 장롱 면허부터 어떻게 좀 해야지.
다짐하며 시우는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준한이 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
“다음엔 어떤 남자를 죽일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빠르게 달려왔다.
눈과 이마에 올려뒀던 아이스팩을 반쯤 올리고 상대를 확인한 뒤 다시 눈에 덮었다.
“왜”
“아! 집에서 그런 말 좀 하지마, 무섭게.”
시현이 쇼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으 덥다 하면서 선풍기를 자기가 앉은 쪽으로 아예 돌렸다. 그러면서 시진에게 큰 언니 이러면 무섭지 않아? 하곤 물었다.
시진은 그래? 라고 말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시우는 한창 머릿속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진짜 범죄자가 아니니까 누굴 죽여야 할지 모르겠네.
“시현아”
“.....”
“너 죽이고 싶은 남자 없어?”
시현이 소리를 지르며 시우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언니 좀 그러지 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인데 활어같이 반응하는 동생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근데 시현아, 선풍기 다시 돌려.
알았어..
시우의 화끈거리는 눈이 식어갈 때쯤이었고 반쯤 잠들려던 참이었다.
“언니! 오늘 누리 중성화 수술 잘 부탁해!”
시현이 허둥지둥 신발을 신으면서 외쳤다.
뭐? 중성화 수술?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달력을 보자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바빠서 누리 중성화하는 날인지도 몰랐네.. 이런 슬픈 날을..
“누나가 미안해.. 우리 누리 이제 남자 아니다..”
캣타워에 식빵을 틀고 앉아있는 누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평소라면 그르릉거리며 배를 뒤집어 줄 누리가 가만히 앉아있었다. 누리의 얼굴을 살피자 이건 명백히 기분 나쁜 표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누리, 누나 말 알아들어?
“누리 오늘 중성화 때문에 굶어서 좀 예민해. 가기 전까지 화내도 아무것도 주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난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들릴 듯 말 듯 읊조린 시현이 급하게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조금 쉴만하면 일이 생기네.
시우가 핸드폰을 열자 상희의 문자가 와 있었다.
- 오늘 못 만난다. 낼 퇴근 하고 가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시우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다가 누리의 울음소리에 멈췄다.
누리야 물도 안된대. 좀만 참자. 누리가 노려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시우는 나갈 준비를 하면서 고민하다가 시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자, 시진이 화들짝 놀랐다.
“시진아, 지금”
밖에 나갈 건데 같이 갔다 올래?
준비한 말을 내뱉기엔 동생이 너무 놀랄 것 같았다.
그래, 시진이 이제 고등학생인데 공부 방해하지 말자.
“언니 나갈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진은 작게 아니, 라고 말했다. 숨기려 했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몸소 느낄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생기면 언니한테 말해. 라고 말하곤 방문을 닫았다.
“하, 왜 이렇게 나를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아..”
아닌가, 대표님은 내가 어색해하는 건가?
시우는 누리를 안아 들고 케이지에 옮겼다. 누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겨 왔다.
“와 진짜 무거워.”
우리 누리는 굶어도 티가 안 나요.
*
눈을 못 뜰 정도로 강한 오후의 햇볕이 거리를 가득 내리 쬐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도 올라오는 아지랑이에서 열기와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뭐 이렇게 까지 덥나 생각이 들었다.
시우는 며칠간의 밤샘과 회의 이후에 제대로 쉬지 못해서 신경질조차 나지 않았다. 약간 어지러웠다.
얼마 만에 외출이야.
출판사는 출근과 다름없기 때문에 외출로 세지 않는다면. 근 2주 만에 외출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시우는 의도적으로 여름의 외출을 피하는 편이었다. 여름의 오후가 낯선 건 가장 더운 시간이기도 하고, 요즘은 주로 밤에 돌아다니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앞에 보이는 초등학교 후문 떡볶이 집을 지나 세 블럭만 지나가면 3번째 피해자가 사망했던 곳이 나온다.
물론 소설 속에서.
시우는 밤마다 조사랍시고 다녔던 길을 낮에 보게 되자 새롭게 느껴졌다.
분식집에서 튀김이며 떡볶이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들어가는 길에 시진이 떡볶이나 사다 줄까, 같이 먹자고 해볼까.
시우는 시진이 종종 교복 치마에 떡볶이 얼룩을 달고 다니던 게 생각났다.
어릴 땐 같이 만들어 먹고 그랬는데.
“누리야 덥지?”
얼른 가자.
옛날 생각에 잠시 빠졌던 시우가 누리를 어르면서 케이지를 들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참이었다.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커다란 쓰레기 봉지가 인도를 막고 있어서 차도로 잠시 내려왔다.
시우의 왼손엔 땀이 베어 나왔고 오른손으로 케이지를 바꿔들던 참이었다.
중국집 오토바이가 빠른 속력으로 시우를 지나치면서 달려와 넘어졌다.
케이지 창에 엉덩이만 들이밀고 앉아있던 누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몸을 격렬하게 움직였다.
시우가 순간 어지럼증을 느끼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리고 누리의 케이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충격을 이기지 못한 케이지가 열리고 누리가 쏜살같이 뛰어나갔지만, 시우는 볼 수 없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남자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머리에 피가….”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손수건도 안 가지고 다니는데.
가방을 뒤지던 시우가 걸치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서둘러 벗어 남자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옆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가 구급차를 불렀다며 남자를 안심시켰다.
안심한 시우가 케이지를 살피는데 문이 열려있었고 누리는 없었다.
“누리야!”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누리가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무작정 앞으로 뛰어나갔다.
얼른 찾아야 해.
뒤에서 남자가
“옷 꼭 돌려드릴게요!”
외쳤지만 시우에겐 들리지 않았다.
2회
이상한 기분
“밖에 나가니?”
”벌써 일어나셨어요?“
더워서 그런가.
은재는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가는 할아버지를 봤다. 부엌이라 할 것도 없이 원룸 옆에 중문으로 분리된 있는 공간이었다. 텅 빈 냉장고에서 2L 생수를 꺼내 바로 입에 갖다 대고 들이켰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이 곧 바닥을 보였다.
은재는 할아버지의 이불 쪽으로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할아버지, 선풍기 꼭 틀고 자요. 다녀올게요.“
”은재야.“
”네“
”날 더운데, 고생이 참 많다….“
은재는 할아버지 손을 한번 꽉 잡곤 집 밖을 나섰다.
밖은 더웠지만, 은재는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이라 견딜 만 했다.
그리고 살도 잘 타지 않는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은재가 사료통을 가지고 나오자 사료통 안에 사료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고양이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그 중엔 은재의 얼굴을 알아본 고양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은재는 골목으로 터벅터벅 걸어 골목 안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왼쪽 나무 옆 빨간 통에 사료를 채워 넣었다.
”많이 먹어.“
세 개의 통에 사료를 붓고 물러나자 고양이 서너 마리가 먼저 먹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않아 공터에 한 고양이가 뛰어들어와서 다른 고양이를 제치고 밥통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새로 온 고양인가?
누리를 관찰하던 시우는 다른 길고양이들과 비교했을 때 유달리 뽀송뽀송하고 하얀 털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길고양이라 하기엔 털이 너무 새하얀데…
잘 먹은 티가 났다. 그리고 살도 많이 쪄보였다.
밥을 급하게 먹던 누리가 캑캑 거리면서 밥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 야!“
누리를 급하게 안고 은재는 공터 밖으로 뛰어나갔다.
*
”체했네.“
누리의 상태를 살펴본 의사가 은재에게 말했다.
”밥을 엄청 급하게 먹었어. 다행히 토해서 별 문제는 없고, 식도가 상했을 수 있어서 약은 발랐다. 근데 털이랑 귀가 깨끗하네?“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은재의 사정을 아는 의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 길에서 처음 본 애예요. 갑자기 뛰어와서 허겁지겁 먹더라고요.”
“딱 보니까 집고양이 같은데… 굶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아무튼 다행이에요.
은재가 누리를 쓰다듬으면서 표정을 살폈다. 턱을 만져주자 눈을 감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어, 잠시만.”
누리의 흰 목에 검은 털이 나 있었는데, 꼭 그 모양이 브이 자처럼 보였다.
“아깐 깔때기 씌워서 못 봤는데, 아는 고양이야.”
수연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깐 있어. 커피 한잔 타 마셔.
은재는 누리를 안아 들고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고양이 밥을 주기 시작한 건 1년 전 그날부터다. 그날의 길, 그날의 공기, 그리고 그 사람의 옷차림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건 마치…
“지금 주인이 찾으러 온대.”
다른 생각에 빠졌던 은재가 다시 누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재 왜 커피 안 마셔?
녹차 줄까? 수연이 찬물에 녹차티백을 넣어 은재에게 건넸다.
근데 선생님 찬물에 우러나와요?
“저기 삼거리에 세 자매 고깃집 있잖아. 거기 고양이야. 내가 거기 단골이거든. 사장님이 싹싹해. 얘 처음 왔을 때 진짜 쬐만했는데 지금은 엄청 커졌지?”
누리가 은재의 품이 답답한지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수연의 다리를 스치며 애교를 부렸다.
“오늘 원래 중성화할 예정이었어. 조금 늦나보다 했는데. 누리! 오늘 밥 먹어서 못하겠네?”
간호사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선생님, 초콜릿 삼킨 강아지가 왔어요. 얼른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갈게. 은재는 다음에 또 보자.”
“네.”
누리 안녕.
은재는 강아지를 안고 울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병원을 나왔다.
누리 주인도 저렇게 울고 있으려나.
*
그 시각 시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골목을 샅샅이 뒤져도 누리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뛰어서 숨이 가쁘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한바퀴만 더 돌아보자.
그때 시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영훈이었다.
“뭐하냐?”
“나 지금…”
시우가 횡설수설 상황을 설명하자 영훈이 곧 바로 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시우가 반쯤 숙이고 서있자, 곧 영훈의 차가 시우의 앞에 섰다.
이시우! 얼른 타.
“이 날씨에 걷는 거보단 차가 낫지 않겠냐.”
영훈이 시원한 물병을 건네면서 말했다.
시우는 답답한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시우의 속도 바짝 타들어 갔다.
*
차를 타고 돌아다닌지 시간이 지나 벌써 노을빛이 골목마다 들어섰다.
“안 되겠다. 내려서 볼게.”
“같이 내려.”
시우와 영훈은 차에서 내려 골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시우는 바닥을 살피고, 영훈은 누리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물었다.
“혹시 여기 덩치가 좀 크고 까만색이랑 하얀색이 섞인, 아! 턱시도 고양이 보셨어요?”
턱에 브이자로 특이한 털도 있는데
아 모르세요.
“누리야!”
진짜 못 찾으면 어쩌지.
시우는 점점 불안감이 커져 식은땀이 나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영훈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고 사진을 보여주다가 은재와 마주쳤다.
혹시 이 고양이…
“어?”
“어.”
영훈은 기대하면서 물었다. 혹시 보셨어요?
은재가 대답을 하려던 차에 시우가 말했다.
가자.
“시현이한테 문자 왔어, 지금 집에 있대.”
영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와 진짜 다행이다. 얼른 가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은재는 괜찮다는 듯 가볍게 인사했다. 고개를 들면서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시현은 잠깐 은재를 보고 차에 올라탔다.
은재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누리 같았는데…”
이럴 때가 아닌데 한 소리 듣겠네.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늦어졌다.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
“언니 괜찮아??”
시현이 달려와 시우의 몰골을 보곤 경악했다.
완전 난리났어. 뭐야.
“좀 뛰어다니느라. 누리는?”
“놀랐나 봐, 안방 침대에 잠들었어. 근데 좀이 아닌 것 같은데”
뭐 먹을래? 씻기부터 할래?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시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시우의 얼굴을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야, 이시진, 언니한테 누리 찾았다고 말 좀 해주지.”
“아, 난 시우 언니가 데리고 나간 지 몰랐어.”
뭐?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분명 알았을 텐데.
시우는 분명 나가기 전에 방에 있는 시진과 말했고 누리가 엄마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면,
잃어버린 누리가 동물병원에 있었던 것을 알았다면 말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왜.
시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우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 모두 알 수 없는 오직 시우만 알아차릴 수 있는 눈빛.
시진은 단지 미안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오히려 통쾌해 보였다.
*
어제 그렇게 넘어가는 게 맞았나.
내가 말이라도 먼저 꺼냈어야 하나, 시진이는 무슨 생각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상희가 커피를 들고 앉았다.
상희는 따뜻한 커피, 시우의 것은 시럽 한 바퀴 두르고,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커피였다.
“그냥.”
상희가 기지개를 켜며 푸념했다. 상희의 눈을 충열되었고,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것 같이 보였다.
“어제 스티커 작업하느라 2시에 집 들어갔어. 밤은 안 새서 다행인 건지…”
벌써 아침이라니, 말도 안 돼.
상희가 중얼거리다가, 유리문 밖에 누군가를 보고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을 부라렸다.
“편집장님, 오늘 2시에 서점에 책 깔린대요.”
편집팀 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을 부라리는 걸 보니 어제 그 사단의 원인인 것 같았다.
“고생했어, 윤 대리.”
상희가 밉지 않게 째려보고, 대리는 멋쩍게 웃으며 죄송합니다 하곤 나갔다.
“언제 말해줄 거야. 아까 조금 있다가 말한다고 했잖아. 나 곧 출간 회의 들어가야 해.”
“언니”
상희가 회의 자료를 챙기다가 시우를 쳐다봤다.
얼른 말해라는 재촉의 눈빛이었다.
“오늘 술 마시자!”
*
테이블 위 벽엔 곳곳에 노란빛의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빨간 조명은 칵테일 잔들과 식기를 비추고, 바 테이블 아래엔 빨간 조명이 숨겨져 있어 빛이 났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의 공간에 바만 빨간 조명을 받고있는 모습이었다.
바에는 레드비치의 헤드 바텐더인 윤주가 시그니쳐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화이트럼, 마라스키노 체리, 체리 블랜디를 넣고, 진저에일을 한잔 넣어 블렌딩 했다.
마지막으로 잔에 붓자 설탕이 굳어진 테두리를 따라 잔 위로 불이 솟아올랐다.
“레드비치 나왔습니다.”
처음 온 손님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불이 나는 칵테일을 쳐다봤지만 이내 자신들의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은재야, 샴페인 글라스 3개 빈다. 얼른 채워 줘.”
은재가 걸어 나와 윤주의 위에 잔을 채워 넣고 갔다.
“밤이 더워서 그런가, 요즘 손님이 많네.”
“그러게요.”
호준이 바쁘게 지나가다가 은재를 불렀다.
“은재야, 청소랑 설거지 해 주실 분 따로 불렀어. 오늘은 서빙 좀 돕자.”
손가락으로 탈의실을 가리키며
“내 사물함에 여분 유니폼 있으니까 갈아입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은재가 유니폼을 갈아있자 꽤 잘 어울렸지만 본인은 어색해 보였다.
“이거 6번 테이블, 간 김에 8번 테이블 주문도 받아!”
호준이 은재에게 새우튀김 접시가 담긴 쟁반을 건넸다.
*
시우와 상희는 레드비치의 가장 구석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희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누리는? 놀랐겠다. 아니 너 괜찮아?”
“응, 다행히 괜찮아. 근데 언니….”
시우가 낮부터 목에 걸려있던 말을 내뱉으려 입을 뗐다.
쨍그랑!
“야!”
몇 테이블 건너 홀의 중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내가 너한테 뭐 한 대? 그냥 나이 물어본 거잖아, 나이!”
화난 손님들 앞에 은재가 서 있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한번 더 고함을 지르려고 일어나는 순간,
“그니까 알려드리기 싫어서요.”
은재가 웃으면서 말했다.
3회
밤산책
“너 나 무시해?”
은재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은재가 웃는 모습에 더 화가 난 사람이 은재에게 달려들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대 치려는 듯 손을 올렸다.
뒤늦게 그 모습은 본 호준이 뛰어와 중재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서빙이 처음이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건방지게.”
호준은 손님에게 거듭 사과를 하면서 은재에게 얼른 가라는 눈짓을 했다.
“제가 서비스로 칵테일 한 잔씩 드릴게요, 어떤 거 드시겠어요?”
은재가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 자리에 일어섰던 남자는 의자에 앉으며 은재가 사라지는 방향을 주시했다.
홀 중간에 일어났던 소란스러운 일은 금새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상희도 다들 그러듯 금방 잊고 시우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시우는 다른 상념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괜찮은가.
웃으면서 돌아설 때 표정이 너무 눈에 밟혔다.
마치 버티다가 무너지는 사람처럼.
“시우야.”
“응, 언니”
“아까 하려던 말은?”
멍하니 생각에 빠진 시우가 상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 언니 저번에 곧 신입 뽑는다고 하지 않았어?
”오, 이시우 우리 회사 일에 관심 좀 가지는 거야? 왜 때려치우고 입사하려고?“
상희가 놀리듯 말했다.
신입사원 뽑는 이야기를 물어보면서 망설일 리 없지만, 상희는 알아채고도 넘어가주는 것 같았다.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겠지.
언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냥 물어봤지, 어떻게 잘 다니다가 관두냐.“
”이미 뽑았어. 마케팅팀 하나, 우리 부서 하나.“
이제 일 좀 줄겠다. 사람이 하나 더 생겨서
상희가 신나서 말했다.
”칵테일 좀 더 시킬까?“
이미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 상태에서 둘이 마시기엔 좀 많은 양의 술을 주문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더 시키는 것도 언니의 위로 방식이겠지.
상희의 위로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아까 봤던
남자의 표정이 내내 잔상처럼 맴돌았다.
참는 표정이 꼭 나 같아서.
*
은재는 빙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굳은 얼굴로 밖에 나왔다.
벽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면서 시간을 끌었다.
은재는 어릴 때부터 유독 시비가 잘 걸리는 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여자 같다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없다는 걸 안 아이들은 더 잔인하게 은재를 괴롭혔다.
은재는 그 과거에 얽매여있는 자신 때문에, 지금처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정말 최악이네.
이번 알바는 여태껏 한 알바 중에 제일 편했는데.
레드비치에서의 알바는 아주 고단했다. 키가 큰 은재가 숙여서 잔들을 닦고 나면 항상 허리가 뻐근했고, 시급에 훨씬 넘는 잔을 깨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긴장한 상태였다.
홀도 작지 않아 청소도 오래 걸렸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윤주, 호준과 다른 바텐더들은 항상 은재에게 따뜻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게 중요하다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알게 되는 곳.
그런 곳이었다.
”잘리려나…, 좀 참을 걸 그랬나.“
참았으면 그 다음은?
하지만 윤주와 호준이 아무리 챙겨준다고 해도 오늘 일이 사장님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의 일자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불쾌하다.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불쾌했다.
나이를 물어보면서 은근슬쩍 스쳤던 손의 느낌도 아직 남아있었다.
”손님이 아니라 손놈이지….“
싫다.
은재는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댔다.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외롭다.
은재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
연거푸 술을 들이켜던 상희와 시우는 거나하게 취한 채로 거리에 서 있었다.
상희가 좀 더 만취한 것 같았지만 시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택시!“
상희가 아슬아슬하게 인도에 서서 택시를 불렀다.
보다 못한 시우가 대신 택시를 잡아 상희를 태워 보냈다.
”잘 부탁드려요, 언니 조심히 가“
챙길 사람이 사라지자 뒤늦게 취기가 확 올랐다.
시우가 고민이 생길 때마다 술을 마신다는 건
가족들도 알고있는 버릇이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걱정하고 물어보겠지.
절대 들켜선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이 해결할 문제였다.
아니, 아직 확실하지도 않았다.
버스는 이미 끊긴 지 오래고,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그래! 십분이면 깰 텐데, 술도 깰 겸 걸어가자!
시우는 집으로 걸어가다, 들어선 골목에 모여있는 사람을 봤다.
은재가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까 그 애다….“
멀리서 봐도 불리한 상황이라는 게 느껴졌다.
요즘은 남일에는 신경을 끄는 게 맞는데.
이 길이 아니면 집까지 20분이 더 걸리는 길 뿐이었다.
뒤를 돌자, 택시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또 부르면 되긴 하지만…
왠지 그대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다.
으, 신경 쓰여.
그래, 가자
나중에 두고두고 양심에 찔려서 후회하는 것보다
가서 도와주는 게 낫지!
시우는 술에 취한 용기와 오기 반, 도와줘야 한다는 인간으로서의 도리 반을 가지고
은재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은재와 눈이 마주쳤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생각하면서 계속 다가갔다.
“그쪽 말이에요.”
긴장해서인지, 취해서인지 심장 소리가 쿵쿵 걸음을 내딛을수록 커졌다.
은재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았다.
아까 술집에서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었다.
”왜? 얘랑 알아요? 갈 길 가죠?“
”여기가 지나가는 길이라서요.“
은재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그들의 눈에는 ‘여자라 만만한데?’와 비슷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럼 지나가시던가요.“
은재를 두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사람들의 사이로 시우가 걸어갔다.
은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우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가 말을 걸었다.
”아 맞다, 근데 저쪽에 태산제약 다니지 않으세요?“
”갑자기 무슨….“
”저번에 뵌 것 같아서요, 태산제약에서 이번에 만든 신약 건으로 오시지 않으셨어요?“
”아, 그게…“
세 사람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기억을 더듬으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역시 맞네.
시우는 더욱 자신감이 붙어서 질문을 이어갔다.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니, 오늘 일은 박과장님한테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아뇨, 아뇨 잠깐 오해가 있어서 풀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술이 확 깬 듯, 뒷걸음질 치며 꼬리를 내렸다.
눈으로는 누군지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머리를 굴리면서, 상사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은재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쳐다보자, 시우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 친구, 제 동생 친구라서요.“
그니까 아는 사람이죠.
”민재야 가자.“
이미 시우가 눈빛으로 신호를 줬던 터라 은재는 눈치 빠르게 바로 따라나섰다.
아주 자연스럽게.
“응 가자.”
가자.
흔한 말이었지만 은재의 마음에 날아와 박히는 말이었다.
*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햇볕에 데워지던 아스파트의 열기조차 식어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시우와 은재는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은재는 시우의 옆이라 하기엔 애매하고 뒤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서 조용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이따금 소릴 냈다.
감사 인사 이후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정적이었지만 둘은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까 감사합니다.”
은재가 정적을 깨고 입을 뗐다.
“아까 고맙다 해놓곤, 돌아가기 싫어서 그런거야.”
은재가 궁금하다는 듯이 시우를 쳐다봤다.
“이 길을 좋아하기도 하고.”
시우와 은재가 걷는 길 옆엔 담벼락이 있는데 너무 높아 꼭 벽같이 보였다. 높은 담벼락의 거의 중간 이상은 담쟁이 넝쿨로 덮혀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요. 담쟁이 넝쿨 오랜만에 봐요.”
좋네요.
은재는 어느새 시우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시우가 길 담벼락의 중간쯤 왔을 때 가로등 밑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 누리만났어. 아, 누리는 우리 고양이.”
“고양이 키우시구나. 좋겠다… 전.”
잠시만 누리?
“혹시 어제 고양이 잃어버렸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목에 검은 털 나있죠? 브이자로?”
“어, 어! 맞아! 우리 고양이 알아?”
은재는 누리를 병원에 데려갔던 이야기를 했다.
“진짜 고마워! 너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너무 고마워서.”
“아니에요. 누리는 잘 들어갔죠?”
집 들어가니까 자고 있더라.
시우가 웃으면서 누리가 어제 어땠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서 다음에 밥 산다는 말도 흘러가듯 포함되어 있었다.
“아! 그런데 아까 그 사람들 태산제약 다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차림새로 봐선 회사원이 분명한데 발에 흙이 묻어있었거든. 오늘같이 더운 날에 야외에 있었다면 아마 땀 냄새가 심하게 나거나 옷이 땀에 젖었다가 마른 것처럼 티가 났겠지? 땀을 심하게 흘린 흔적도 없고 사무직처럼 보였는데 신발에는 흙이 많이 묻어있었어. 세 사람 다.”
은재가 흥미롭다는 듯이 시우를 쳐다봤다.
그래서요?
“큰길 사거리에 도로 공사한다고 몇 주 전부터 파헤쳐놨는데, 연동우체국에서부터 지구대까지 이어진단 말이야. 근데 대부분 마무리하는 중인데 태산제약 앞길은 아직 마무리가 덜 됐어. 태산제약이 다른 가게보다 길에서 좀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그 공간을 임원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공사 중에 어떤 차가 차를 댔던 거지, 높으신 분이 실수한 거 트집 잡기도 그렇고, 그래서 파진 홈에 새로 공사하느라 그 길만 완전 흙길이거든. 이 주변 회사 중에 출근하려면 흙길을 꼭 지나야 하는 곳은 태산제약밖에 없어.”
은재는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멋있다.
“영업직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세 사람 꽤 단정한 느낌이었거든, 제약 쪽은 병원하고 연결이 중요해서 영업직을 뽑을 때 특히 신경 써서 골라. 옷차림으로 봤을 때 시계나, 넥타이핀, 커프스는 편하기보단 보여주기식으로 차는 경우가 많고, 고급스러운 걸 골랐더라고, 영업할 때 예의를 갖추고 부탁하고 있으면서도, 기도 살고 그렇게 절박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거지. 안 그래도 갑질이 심하니까. ”
그래서 병원 사람인 척 해봤어.
제약 회사원의 천적은 병원 관계자 아니겠어?
“아, 근데 궁금한 거 또 있어요.”
“뭔데?”
“박과장은 뭐에요?”
“나이대로 봐서 과장급까진 아니고 좋게 봐야 대리나 사원? 쯤으로 보여서 상사의 직함을 대 봤지. 원래 사수가 제일 무섭잖아.
그리고 박 과장은….”
은재가 시우를 쳐다봤고 시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나라에 박 씨가 제일 많잖아.”
은재는 시우의 엉뚱한 대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시우도 따라 한참을 웃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박과장이 아니라 김과장이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가 둘은 눈을 마주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박씨가 아니라 김씨가 제일 많구나!”
또 한 번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
길고도 짧은 밤 산책이 끝나고 시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은재는 사뭇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은재가 자라면서 무의식적으로 지닌 습관이었다.
“잘 들어가요.”
“도착하고 보니까 데려다준 거네, 고마워.”
은재가 싱긋 웃었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니,
운이 나빴다며 아까 그 사람들에게 얻어맞았을 수도 있다.
은재의 마음에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이름이 뭐예요?”
“이시우, 넌?”
“아까 민재라고 했을 때 놀랐어요. 뒷글자는 맞추셨거든요.”
은재는 왠지 떨리는 기분으로 이름을 말했다.
“은재에요. 박은재.”
“좋은 이름이네.”
은재는 통성명하고 나니 더욱 아쉬운 마음이 크게 들어서 바로 떠나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또 괜히 매미 소리가 나는 나무쪽으로 올려다봤다.
돌아보자 시우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
“아까부터 되게 신경 쓰였거든.”
시우가 바닥에 수그린 채, 은재의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
시우의 동그란 정수리에 시선이 갔다. 금새 신발 끈을 다 묶은 시우가 손을 털며 일어났다.
“내가 관찰력이 좋잖아.”
자찬한 게 민망한 듯 장난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생판 처음 보는 남의 운동화는 묶어주지 않았을 텐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왠지 눈에 밟혔지만 자각하지 못했다.
시우는 자신의 행동을 술김으로 치부해버렸다.
은재에게 그 순간은 시원한 새벽의 소리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4회
시작의 끈
어두운 거리에 가로등만 켜진 채 존재감을 띠고 있었다. 길의 중간에 가로등은 불규칙하게 깜빡거리고 있었고, 오늘따라 온 거리가 조용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 소리에만 온 감각이 집중됐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동네 술집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도, 어디선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 둔탁한 소리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은재는 멀리서도 들려오는 소름 돋는 소리에 그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저게 뭐야.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모습에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모자를 쓴 사람은 무자비한 손짓으로 고양이를 내려치고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위험하다.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몸을 돌릴 수도 못 본 척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저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은재가 생각하는 순간 내려치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
은재는 누워있던 몸을 빠르게 일으켰다.
너무 빨리 일으킨 탓에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심장은 쿵쿵거리고 이미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이렇게 생생했던 적은 몇 번 없었는데.
은재는 땀을 훔치듯 머리를 연신 손으로 쓸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자 심장이 조금씩 천천히 정상 속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창밖에 햇살이 은재의 상체 위로 닿아있었다. 햇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침이다.
은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왜 자꾸 그날 밤으로 돌아가는 건지.
어떤 마음에서 그날을 떠올리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마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겠지.
은재는 악몽 속 그 장면을 다시 생각했다.
2년 전, 은재는 지루함에 밤 산책을 나섰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에 나온 산책이었다.
평소 가지 않던 길로 향했던 것도 그저 발길 닫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
한참을 걷다가 도착한 그 길에서 고양이를 죽이고 있는 그 사람을 마주쳤다.
희미한 가로등 빛 속에서도 마주쳤던 눈빛이 형형했다.
위험하다. 무섭다.
여러 생각이 뒤섞여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는 사이에 바닥에서 기고 있던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다음 순서였겠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일말도 가지지 않은 채 도망쳤다.
그래. 도망쳤다.
그 사실은 은재에게 내내 남아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고양이마다 은재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양이 밥을 챙기기 시작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리고 그날을 극복하기 위해.
은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은재는 오랜만에 다가온 그 날의 기억이 버겁게 느껴져 속이 탔다.
냉장고로 가서 2L 생수통을 들었지만 가벼웠다. 바닥을 겨우 채울 만큼 남았을 뿐이었다.
남은 물을 모두 비우고 분리수거를 위해 생수병을 구겼다.
생수병은 구겨져도 생수병이지.
많이 변했다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에 매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실망스러웠다.
*
“어우…, 죽겠다….”
“난 죽겠다는 말이 진짜 싫어. 지나가다 죽고 싶은 사람이 들으면 어떻겠어?”
“어우…, 죽고 싶다….”
그래, 잘났다.
상희가 엎드리며 책상에 머리를 찌었다.
시우는 건너편 자리에 멀쩡히 앉아있었다.
“어제 그렇게 마셔놓고 숙취가 없다니…”
“그야 어제…”
술이 깰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뭐야? 말을 왜 하다가 말아.”
“오후 3시가 되도록 숙취가 있는 언니가 더 이상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상희를 위해 꿀물을 타온 시우는 물병을 열어 상희 앞으로 밀어놓았다.
꿀물, 마셔.
“살 것 같다. 이걸 마셔야 해장이 된단 말이지?”
점심으로 해장국 한 그릇을 해치운 상희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작가님?”
상희가 갑자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시우를 쳐다봤다.
척하면 척이지.
“네, 편집장님?”
상희가 씩 웃었다. 기획안을 책상에 자신만만하게 올렸다.
“<도시숲> 2권 출간 일정 잡혔습니다.”
“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언제죠?”
시우가 상희의 상황극에 맞춰주듯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 주 예상합니다.”
“언제 결정 난 거야?”
“오늘 오전에! 결재 떨어졌지.”
시우가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드디어 2권을…
낸다!
“표지 일러스트도 오도현 작가님 그대로 가면 될 것 같고, 1권이 워낙 반응이 좋아서….”
시우가 갑자기 상희의 말 중간에 손을 들고, 말을 멈췄다.
“반응이 그냥 좋았나요?”
“어우, 베스트셀러였어서 아마 기본으로 5천 부는 찍고 들어갈 거야.”
“그냥 바로 2쇄 찍을까? 응?”
좋다.
시우가 신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 시우야 너… 계속 안 밝힐 거지?”
“응? 아.”
“너 누리인 거. 작가 인터뷰도 많이 들어올 텐데 거절해야 하니까. 근데 요즘은 전화 인터뷰나 출판사에서 전달하기도 한다더라.”
“그냥 아직은 안 밝히고 싶어.”
“그새 맘이 바뀌진 않았나 물어나 봤다! 뭐 사람들이 작가 얼굴 보고 책 읽는 거 아니니까.”
상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하얀 표지에 검정 글씨가 써진 시우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전에 제본한 건데 마케팅부에서 폰트 설정은 끝났대. 이거로 할 듯!”
깔끔하네.
마음에 든다.
“근데 언니, 저번이랑 다른 폰트인 것 같은데?”
“아, 그건 저번 편보다 내용이 차가워서….”
새 출간본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일 때, 회의실로 마케팅부 김대리가 노크했다.
회의실 문과 문이 달린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희는 기획안과 제본한 책을 급하게 치웠다.
와,
진짜 큰일날 뻔했어.
옆에 있던 시우도 덩달아 긴장해서 연신 책이 들어간 상희의 가방을 흘끗거렸다.
1권 출간 때부터 숨겨온 누리의 정체가 너무 쉽게 밝혀질 뻔했다.
출간 소식에 너무 들떴었다.
시우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편집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도시숲> 출간 확정됐다면서요! 앞으로 지윤이랑 자주 보시겠어요.”
정환이 너무 반갑게 인사한 탓에 상희가 당황해서 살짝 굳어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 갑자기 찾아봐서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마케팅팀 신입 뽑았는데, 오늘 첫 출근이거든요. 인사드려. 서상희 편집장님.”
덩치가 큰 정환의 뒤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남자가 있었다.
정환이 소개하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리자 겨우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임…지규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네, 환영해요.
지규가 긴장한 것처럼 보이자 정환이 나서서 너스레를 떨었다.
“허허! 이 친구가 오늘 첫 출근이라서 많이 떨리나 봅니다! 지윤이가 이 친구 사숩니다. 입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후임을 다 받고, 글쎄 지윤이가 처음 왔을 땐…”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나갈까.
시우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던 참이었다.
“오! 처음 뵙는 분이네요. 김정환입니다! 통성명도 안 하고 실례했네요. 성함이?”
정환이 시우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시우입니다.”
“회사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제가 회사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하! 어떻게 오셨어요?”
정환은 회사에서 알아주는 호기심에 오지라퍼였다.
좋게 말하면 낯을 안 가리고 친화력이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었다.
상희는 정환이 질문세례를 퍼붓기 전에 제지시켰다.
“지규씨 편집장실 돌았으면 이제 동선상 대표실 갈 차례겠네요?”
“그렇죠! 지규씨, 보통 사장실부터 인사하러 가지만 우리 회사는 달라. 얼마나 효율적인 체계야. 잘 왔어….”
“김대리! 나도 결제받을 서류가 있는데 같이 가지. 잡담을 그만하고 얼른 가. 회사 구경만 하다가 출근 첫날 다 보내겠어. 지규씨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언니 고마워.
시우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상희는 지규와 정환을 데리고 대표실로 사라졌고, 회의실엔 시우 혼자 남았다.
놀랐던 감정과 약간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한숨이 나왔다.
다음부턴 그냥 편집장실에서 이야기해야겠다.
아, 거기 쇼파 너무 편해서 자고 싶을 텐데.
편집장실 쇼파는 너무 푹신해서 누우면 눕는 대로, 앉으면 앉는 대로 체형에 맞춰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언니가 그 쇼파를 얼마 주고 샀더라.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감각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준한이 회의실 밖에 있었다.
“아!”
놀란 시우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깜짝이야!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준한이 유리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원래 좀 잘 놀라요.
뜬금없는 등장만큼 갑작스러운 사과는 어색한 분위기를 한층 부각시켰다.
*
은재야, 오늘 좀 일찍 올 수 있어?
윤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은재는 불안한 기분을 안고 레드비치로 들어갔다.
어젯밤 빨간 조명들은 잠시 쉬고 있었고, 환기를 위해 잠시 문을 열어 자연광으로 가게 내부가 환했다.
더운 날씨에 환기한 만큼 가게 안은 안이라 할 것 없이 밖과 같은 온도였다.
내부에 들어서면서부터 후덥지근함을 느낀 은재는 윤주에게 인사했다.
“누나, 나 왔어.”
윤주가 은재를 보고 반갑게 맞았지만, 어딘가 미안한 듯한 표정을 비췄다.
“은재야, 어제….”
사장님은 안 나오는 날이었는데.
“사장님이 아셨어?”
“응…. 어제 사장님 친구분들이 와서 술 마시다 가셨대.”
아, 그랬구나.
은재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질문했다.
“그래서 그만두래?”
“어떡해… 원래 서빙하는 애도 아닌데, 사장님이 듣지도 않으시고 그냥 막무가내로 막….”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곧 관둘 생각이었어.”
“진짜? 은재야 다행이다. 하긴 너도 이제 학교 다녀야 하니까. 호준이 너한테 미안해서 일부러 안 나왔잖아. 호준이랑 다음에 셋이 밥 한번 먹자!”
그러자.
은재의 얼굴에 씁쓸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윤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짐 챙겨가면 돼! 호준이랑 사물함 같이 썼었지?”
응.
호준의 사물함을 열자, 3단으로 분리된 위층과 두 번째 칸에 호준의 유니폼과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그리고 신발칸인 마지막 칸에 은재의 소지품이 있었다.
양말 두 짝과 핸드크림, 삼선슬리퍼가 전부였다.
버려도 될 텐데….
은재는 정작 버릴 것은 놔두고, 남겨야 할 것은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재야, 꼭 놀러 와! 우리 밥 한번 먹어야지.”
“그래, 누나 다음에 올게.”
잘 가!
마음에 짐을 던 윤주가 밝게 인사했다.
밖으로 나온 시우는 몇 걸음 걷다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왼쪽 신발끈이 풀려있었다.
은재는 몸을 숙이고 앉아, 신발끈을 매면서 오른쪽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시우가 묶어준 신발끈.
다시 만날 수 있나.
그때 은재의 머릿속에 어젯밤 시우가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진짜 진짜 고마워! 다음에 밥 사줄게. 고마워!”
연신 고맙다며 밥 먹자던 시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우가 신발 끈을 묶어줬던 오른발 운동화를 괜히 한번 더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젯밤 헤어지기 전 물어봤던 시우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밥 먹을래요?’
5회
장마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깜짝이야.
시우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로 나한테 말을 걸지?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도시숲> 2권 출간 축하드립니다.”
준한이 어색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그 말 하려고 오신 건 아니죠?
시우가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눈알을 굴렀다.
잠시 흐르는 침묵이 어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을 넘어 불편함이 더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눈알을 굴리던 시우가 말할 건덕지를 발견했다.
아!
”아까 대표님 찾으러 편집장님 가셨어요. 신입사원분도 같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준한은 손목시계를 한번 힐긋 보더니, 시우가 말한 정보를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기다린다니까요?
왜 안 가지?
빨리 가야 한다는 말을 돌려서 말한 건데.
시우의 얼굴에 궁금함이 떠올랐고, 그걸 본 준한은 해명하듯 말했다.
”그럼 좀, 기다리겠죠.“
하하.
시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표라서 좋겠다. 누가 기다려도 여유롭고.
설마 저게 농담은 아니겠지?
”저, 작가님. 오늘 저녁에 뭐 하세요?“
저요?
전 집에서 누리 배 만지면서 잘 건데요..
”집에 가려고요, 할 일도 있고….“
”저녁. 드실래요?“
네?
”저녁 약속 없으시면 저랑 저녁… 드실래요?“
이참에 어색한 준한과의 사이도 풀겸 오늘은 밥 한끼 정도 먹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시우가 긍정의 대답을 하려는 직전에 정적을 뚫고 시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은재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밥 먹을래요?’
”대표님 어쩌죠. 제가 선약이 생….“
생겨서요.
참, 선약이 생긴다는 말은 이상한 말이지.
“선약이 있었네요. 죄송해요.”
따지고 보면 선약이 맞지만….
“선약이 있으셨군요.”
준한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 아쉬운 듯 말했다.
다음에 먹죠.
준한이 나가려는데 시우가 다시 말했다.
“대표님! 다음에 꼭 먹어요.”
준한과 인사를 마치고 시우는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정확히 왜 은재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선약이니까
시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
해가 진지 얼마 안 된, 보랏빛의 하늘이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고 버스엔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은재는 정류장에 앉아서 다른 생각에 잠겨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바로 만날 줄 몰랐는데.
약간은 충동적인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지만,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시우는 바쁜 직장인이고…
아, 직장인인가?
그러고 보니 시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물어보면 자신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은재를 시우가 반갑게 불렀다.
“은재?”
은재가 고개를 돌리자 시우가 서 있었다.
린넨소재의 점프슈트가 시원해 보였다.
잘어울린다.
생각하며 은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우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색하다.
이런 질문이.
은재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음, 전 다 좋아요.”
“원래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데….”
은재가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좋아하는 게 잘 없어요.”
“아….”
“뭐 좋아해요? 알고 싶어요.”
은재가 약간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보려 질문을 했다.
“나는 면 좋아해. 그냥 어릴 때부터 좋더라고. 넌 어때? (면) 싫진 않아?”
“좋아요.”
그냥 뭐든 다 좋을 것 같아요.
*
은재와 시우는 정류장에서 걸어서 골목길 식당에 도착했다.
가로등이 밝은색인 베이지색의 벽으로 된 식당이었다.
나무로 된 계단과 문이 따뜻한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예쁘다.”
그치, 예쁘지?
은재가 식당을 칭찬하자 시우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뿌듯하네!
들어갈까?
시우가 먼저 문을 열고 은재가 들어가도록 기다려줬다.
식당의 내부는 외관과 동일하게 따뜻한 느낌이었다.
육수 우리는 고소한 냄새가 식당 안에 가득했다.
식당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작은 식당이라 많아 봐야 열 명 남짓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은재와 시우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어서오세요! 오랜만이네요?”
도연이 메뉴판과 물을 가져오며 시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요즘 좀 바빴어요. 잘 지냈죠?”
얼굴이 밝아요.
시우가 도연에게 편안하게 대답했다.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오늘은 혼자 안 오셨네요?”
도연은 은재가 궁금해 보였지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동네친구에요.”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아까 회의실에서의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좋아하던 식당에 도착한 순간부터인지, 은재를 만난 순간부터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늘 같은 걸 시키는 시우지만, 메뉴판을 본 건
은재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은재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메뉴판을 읽고 있었다.
뭐 이렇게 심각하게 봐?
시우가 은재를 보며 웃었다.
“평소에 어떤 거 먹어요? 같은 걸로 할래요.”
둘은 주문 후 물을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통성명은 했고. 여기 주변 살아?”
“큰 소나무길 알아요? 그 뒤쪽에 살아요.”
“음….”
시우가 다음 질문을 이어나가려고 하자, 은재가 웃으면서 시우의 말을 멈췄다.
“잠시만요. 설마 이 다음 질문은 나이에요?”
응.
시우가 멋쩍게 웃었다.
뭐지. 어떻게 알지?
“사는 곳, 나이 다음엔 직업 이런 거 물어보는 거죠?”
“아마도?”
“너무 호구조사 하는 거 같아요. 우리 그냥 지금처럼 이름만 알아요.”
보통 이런거 물어보지 않나?
“너 되게 독특하다. 좀 특이한 거 알지?”
“조금 그런 것 같아요.”
은재가 웃으면서 답하는 사이에 우동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우동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은재가 한술 뜨고 말했다.
진짜 맛있어요. 진짜.
놀란 눈이 귀여워서 시우는 웃었다.
“그냥, 동네 친구 멋있잖아요.”
어디 가서 동네 친구 만났어 하면 멋지지 않아요?
은재가 농담을 치자 시우가 웃으면서 우동을 먹었다.
진짜 특이한 애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재밌네.
시우는 이 분위기가 즐거웠다.
그릇 속 면발을 휘저으며 평소보다 천천히 밥을 먹었다.
은재도 시우의 속도에 맞춰 먹고 있었다.
고개를 들던 은재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놀랐다.
어?
“비 와요.”
장대비까진 아니어도 빗발이 있는 편이었다.
밖엔 예상치 못한 비에 사람들이 머리를 가리고 뛰어다녔다.
은재는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장마인가 봐요.”
*
뛰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비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고, 물웅덩이를 아무렇게나 밟아서 흙탕물이 이리저리 뛰었다.
빗속에서 뛰고 있는 남자는 그런 건 개의치 않는 듯,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남자가 외쳤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뛰고 있는 곳은 공장단지 안이었다.
비가 와서 정전이 되는 바람에 오늘따라 단지 안에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없어요?”
남자는 공장 단지 안 어디까지 뛰었는지 가늠을 하지 못했다.
비가 와서 제한적인 시야와 자다 깬 직후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잠은 벌써 깬 지 오래다.
남자는 극도로 불안한 공황상태였다.
잠들지 말걸.
무서워.
남자는 연신 겁에 질린 비명과 거친 숨소리를 뱉으면 뛰고 또 뛰었다.
비에 씻겨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지나온 길엔 핏자국이 생겼다가
비가 와서 희석되는 상태였다.
남자가 두리번거리면서 뛰는데 누군가 달려와서 남자를 쓰러뜨렸다.
“잡기 놀이는 여기까지야.”
날카로운 칼날이 빗속에서 내리꽂혔다.
*
천천히 식사를 끝낸 시우와 은재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시우와 친한 도연의 배려로 우산 한 개 정돈 빌릴 수 있었다.
“언니, 미안해요! 가게에 우산이 세 개뿐이라….”
난감에 하는 도연 뒤로 오픈 주방에 서 있던 주방장님이 멋쩍게 웃었다.
시우씨, 오늘 우리 애 생일이라 빨리 가야 해서….
“아니에요! 빌리는 입장에 하나라도 감지덕지에요. 도연씨도 집 조심히 들어가요.”
밖은 아까보다 빗발이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우산 없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갈까?”
시우와 은재는 작은 우산에서 나란히 섰다.
은재가 하얗고 마른 이미지라서 몰랐는데 가까이 붙어 서니 큰 키라는 게 실감이 났다.
식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소하지만
서로에겐 재밌었던 대화를 이어나가던 참이었다.
큰길 정류장 쪽에 도착했을 때 은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할아버지였다.
은재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더니, 끊곤 곤란한 듯 말했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갈게요.
우산 밖으로 반쯤 나간 은재를 시우가 다시 우산 안으로 끌여당겨 붙잡았다.
“곧 버스 정류장이라서, 우산은 가져가.”
집에서 정류장 금방이야.
은재는 시우를 보고 웃고는 고맙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우리 다음에 또 봐요.”
머리를 손으로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빗속으로 달려 나갔다.
*
집에 들어선 시우는 빗물에 젖은 양말부터 벗고 습기에 젖은 앞머리부터 올렸다.
옷을 갈아입고 비 오는 창밖을 보는데 시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언니!”
깜짝아.
노크 하랬지!
맞다, 맞다.
몸이 반쯤 들어간 시현이 열린 문에다가 노크를 하며 들어갑니다~ 말했다.
이시현 어이없어 진짜.
“무슨 일이야?”
“언니! 우리 동네 살인사건 일어났어!”
“뭐?”
뉴스에 나와! 빨리 나와봐.
시우가 거실로 뛰어가자 병찬과 미정이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미정의 얼굴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딸, 왔어?”
엄마, 집에 있네.
“오늘 비 와서 무릎이 좀 쑤시더라고, 니 아빠가 바로 가게 문 닫자더라.”
뉴스에서는 다급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봅니다. 서울시 중앙구 남수동 공장단지, 한 남성의 사체가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저기 우리 동네에서 10분 거리 아니야?”
시현이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자, 미정이 대답했다.
“딸, 쉿”
“윤모 씨가 주검으로 발견된 건, 윤모씨가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7시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윤씨가 과다출혈밑 후두부 골절로 사망한 점으로 보아 경찰은 타살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비에 현장이 훼손되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경찰의 주장입니다. 일각에서는….”
“아! 진짜 무서워! 왜 경찰은 뭐만하면 난항을 겪고 있대?”
시우가 병찬의 눈치를 보며 시현을 팔꿈치로 찔렀다.
아, 왜애.
시현이 투덜거리다가 병찬과 눈이 마주치고 조용해졌다.
젊은 시절 형사 생활을 했던 병찬은 유난히 경찰을 욕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시현은 저번에 영화를 보면서 마약경찰을 ‘짭새’라고 했다가 크게 혼이 난 경험이 있었다.
“딸. 다들 조심해서 다녀…,”
시진이는 아직 안 왔니?
“시진이 독서실 갔어. 그나저나 라면 먹을 사람? 나 지금 라면 먹고 싶은 듯.”
시현이 부엌으로 가며 말했다.
병찬이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빠도 먹을래.
시우가 쇼파에 앉아있자 누리가 뛰어올라와서 시우의 옆에 앉았다.
누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비오는 창 밖을 내다봤다.
시우는 자꾸만 드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6회
타이밍
공장단지에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고, 몇몇 사람들이 폴리스 라인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큰 우산을 쓴 동철은 찜찜한 기분에 줄담배를 피워댔다.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째네….”
동철은 씁쓸한 마음에 괜히 물웅덩이를 차곤 했다.
“성경장님!”
형사팀 막내 광수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동철을 찾았다.
“왜.”
광수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 동철에게 물었다.
“감식반 아직 안 왔어요?”
후,
동철이 눈을 감고 담배 연기를 한 번 뱉었다.
“그걸 나한테 묻니?”
광수의 표정에 아차 싶은 기색이 떠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헐레벌떡 뛰어간 광수가 전화기를 꺼내 들다 물에 빠뜨렸다. 물 빠진 핸드폰 때문에 다른 형사에게 전화를 빌리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 저, 저 간이 작아서 형사를 어떻게 하나.”
못 산다, 진짜.
동철은 빗물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시신으로 향했다.
눈도 못 감고 가네.
죽은 남자를 보고 혼자 읊조리면서도 속이 바짝바짝 탔다.
언제봐도 죽은 사람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마음 한 켠엔 화도 치밀었다.
어떤 새끼냐.
또 이렇게 사람 죽인 새끼는.
동철은 피해자의 열린 눈에 꼭 눈물처럼 흐르는 빗물을 보면서 다짐했다.
꼭 잡는다.
*
은재는 급하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응급실의 빨간 등이 은재의 마음에도 켜지는 기분이었다.
불안하다.
은재는 급하게 응급실 접수처를 찾았다.
“박경진 환자 어딨어요?”
지금 투석 준비 중이에요. 저쪽으로 가보세요.
간호사의 말이 은재의 머리에 울렸다. 현실성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은재는 그리 크지도 않은 응급실을 걸어가면서 진정하기 위해 닥친 상황을 나열했다.
할아버지는 쓰러졌고, 지금 투석 준비 중이다. 투석….
속으론 나열하면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 할아버지를 찾던 은재가 ‘박경진’이 쓰여진 침대를 찾아 커튼을 열어젖혔다.
“할아버지!”
경진은 침대에 누워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의식이 없는 편에 가까워 보였다.
충격을 받은 은재는 경진의 손을 붙잡고 흔들면서 불렀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학생, 보호자 없어요?”
은재는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의사에게 말했다.
“네.”
없어요.
할아버지랑 저 둘 뿐이에요.
“할아버지 지금 여러 가지 검사랑 일단 투석 먼저 해야 하거든요?”
“저 선생님.”
“학생 왜요?”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잘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 상태가 그나마 지금이라도 병원 오셔서 다행이에요. 바로 들어갈게요.”
은재는 멀어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멍하니 서있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주말 오후, 거실엔 시현과 시우 그리고 누리가 누워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바로 오는 쪽엔 시우와 누리가 누워 있었고, 조금 옆에 시현이 있었다.
“언니, 우리 우동 먹을까?”
어때?
“싫어. 얼마 전에 먹었어.”
“아! 누구랑?”
그러지 말고 먹자.
“또 먹자! 또 먹자고!”
시현이 누워서 다리 한 짝을 시우에게 걸치며 투정을 부렸다.
와
진짜 무거워.
시우는 시현의 다리를 치우고 쇼파로 올라와 앉았다.
은재랑 먹었지, 우동….
기억을 곱씹으면서, 비가 추적추적 오는 창밖을 보니 옅게 느껴지던 낯선 감정이 선명해졌다.
걱정되는구나.
은재는 잘 들어갔을까.
은재의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
은재는 빈방 안에서 누워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으니 서글퍼져서 밖으로 나갈까 했지만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며칠 전, 시우와 우동을 먹었던 날이 자꾸 떠올랐다.
연락해볼까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 우울함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까 두려워서 관둔다.
*
“아 맞다. 나 2권 출간해.”
시우가 무심하게 말하면서 시현을 흘끗 쳐다보자, 시현이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드디어!”
시우가 싱긋 웃자 시현이 바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우리 파티하자.
“엄마, 언니 2권 출간한대! 오늘 고기?”
시현이 연신 고기를 외치면서 엄마와 전화를 했다.
자기가 고기 먹고 싶어서 저러구만.
“언니, 오늘 우리 고기 먹을 듯? 아 너무 신나.”
소주도 땡겨야지.
시현이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내일 책 깔리는데, 무슨 파티야.”
너무 뒷북이잖아.
시현이 시우에게 말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즐거운 게 중요한 거지.
그런 와중에 시우는 계속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은재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반은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기를 보면 영훈이 실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집이냐는 연락에 간단하게 답을 해주고 알람을 껐다.
그래, 밥이나 먹자.
“언니!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다줘!”
“아, 귀찮아.”
비 오는데 밖을 왜 나가….
“나 지금 화장실 급하단 말이야. 빨리! 나중에 사러 가지 말고 미리 사와.”
시우는 귀찮아하면서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간다.
*
시우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한 손에 들고, 짜 먹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었다. 비가 그쳐서 우산을 팔에 걸고 있다.
집에 가까워지는데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
서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았다.
“아?”
이내 의미 없던 감탄사가 높아졌다.
짠!
“뭐야?”
아니, 요즘 연락도 잘 안 되고, 저번에 그러고 가선 걱정되니까.
누리를 잃어버린 날 이후에 오랜만인 영훈이 시우의 집으로 찾아왔다.
“힘내라고 불족발 사 왔지. 요즘은 백수인 애가 뭘 그렇게 바쁘냐.”
요즘 너 진짜 바쁘더라.
영훈이 아무렇지 않게 마당 안으로 들어가며
어머니는? 하고 물었다.
집 문은 마침 열려있어 영훈이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
영훈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눈앞에 촛불이었다.
“후”
들어오라는 시우는 오지도 않고,
“오빠가 왜 여깄어?”
엉뚱한 주인공이 초를 불었다.
왠 케잌이에요?
“누구 좋은 일 있어요?”
*
은재는 할아버지의 병원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곱씹는다.
이제 어쩌냐….
그래,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해보자. 이건가?
은재가 괜히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교라서 원망할 신도 없는데….
믿지 않아서 원망할 만한 대상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도 잘 넘어가겠지. 할아버지는 늘 아팠으니까….
그리고 나한테 일어나는 일들도
익숙한 일이니까.
은재는 조금씩 떨어지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다.
비를 맞는 것도 익숙한 일이고.
시우와의 식사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거겠지.
은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길을 걷던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형?”
“은재야! 뭐 하고 지내!.”
호준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호준의 목소리에 은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레드비치에서의 기억은 마지막을 제외하면 좋은 기억뿐이었다.
사실 은재는 그 마지막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시우와 만나게 된 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그날도 몇 대 맞아주고 끝낼까 생각했었다.
겁에 질리거나,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지 않고도 해결하는 시우를 봤다.
순간의 재치를 이용해 해결하는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인 나를 위해.
은재는 호준과 전화하는 잠깐 사이에도 시우를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모든 생각이 시우로 연결되나 보다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런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화나고, 미안해서 말이야. 아니, 사장은 니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다짜고짜 자른대?”
호준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너만큼 편한 애도 없었는데, 손발도 잘 맞고. 새로 온 애가 얼마나 그릇을 깨 먹는지 몰라.”
“그러게요. 저도 아쉬워요. 윤주 누나랑 형이랑 일하는 건 재밌었는데.”
알바야, 또 구하면 되죠.
“아! 내가 사장 욕하다가 흥분해서 전화했던 목적을 잊어버렸었어.”
놓고 온 짐이 있었나.
은재는 잠시 딴생각을 했다.
“내 여자친구가 반년간 유학 가거든…. 진짜 안 보내고 싶다….”
이 형이, 자꾸 딴소리하네.
“하여튼 여친 알바하던 곳에 자리가 비어서, 나도 거기 사장님이랑 친하고! 좀 괜찮은 애로 후임 구해주고 싶다는데, 딱 니가 생각났잖아.”
어때 할래?
은재는 순간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할래요.”
“좋아, 그럼 내일 3시에 레드비치 앞에서 봐! 내 차 타고 가자.”
*
어떻게 여기지?
은재는 호준이 우동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멈춰 섰다.
시우와 지난 밤 왔던 우동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그 기분이 다시 생각나서 은재는 편안해졌다.
은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분위기와 육수 냄새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호준과 이야기하던 도연이 뒤따라 들어오는 은재를 알아봤다.
“어?”
“안녕하세요.”
은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뭐야? 둘이 어떻게 알아?”
호준이 경계하듯 둘을 번갈아 봤다.
“오빠, 뭘 이런 거로 질투를 하고 그래. 우리 가게 단골 손님이랑 오셔서 한 번 뵌 게 다야.”
아, 그랬구나.
호준은 안심이 되는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면접은 형식적인 거에요. 오빠가 워낙 일 잘한다고 칭찬을 해서…”
감사합니다.
은재는 새삼스럽게 호준이 정말 고마웠다.
“그럼 이번 주말부터 와서 일 배우기로 해요!”
네,
좋아요.
여기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
은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
시우는 곁눈질로 신작 코너를 한 번 봤다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번이 두 번짼데!’
패기 좋게 걸어가서 <도시숲 2>이 진열된 코너를 구경했다. 시우는 책을 보면서 천천히 사람들을 구경했다.
반기듯이 책을 집는 사람, 관심 없다는 듯이 빠르게 넘겨보는 사람, 호기심에 서서 정독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떨린다.
아니, 설렌다.
시우는 설레는 표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위안했다.
열혈 독자 정도로 생각하겠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시우의 옆에 모자와 마스크를 낀 남자가 다가온다.
“저기요.”
“네?”
갑작스런 남자의 등장에 시우는 놀라서 제법 큰 소리로 되물었다.
“왜 보기만 해요?”
네?
이 사람은 왜 그런 걸 묻지.
“아니, 왜 책을 보기만 하고, 사진 않냐고요.”
시우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다가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을 본다.
남자의 눈엔 광기라고 불릴만한,
그와 비슷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시우는 눈을 피하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뭐라고 해….
애초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시우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남자는 책 한 권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현금 결제를 한 후, 빠르게 서점 밖으로 나간다.
뭐야….
시우는 나쁜 감정은 털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서점 밖을 나섰다.
시우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우의 가방엔 얇은 가디건이 어느새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