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이예리, 「Piece of Cake」(2020-1학기 <웹소설창작과비평>)
등록일
2020-07-10
작성자
국어국문학과
조회수
70


 

1

 

 

무거운 안개가 내리깔린 스산한 무채색 도심에 태양을 집어삼킨 핏빛 달이 내리비춰 강렬한 색을 입힌다. 무질서한 한량가와 같은 이 도심 중심에는 모두가 선망하는 고귀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건물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마치 하늘을 베어낼 듯 날카롭게 뻗어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자신이 맡은 인간을 후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마물들로 득실거린다.

그곳은 바로 데스 토피아

여기선 인도의 증표로 령의 조각을 모으는 게 하루 일과이자 성과이고 이를 모두 얻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커다란 목표이다.

그리고 령의 조각 수집의 정상에 다다른 이가 있다.

 

데스 토피아회장의 양딸, 피스.

피스를 보좌하는 매니저는 오늘도 피스의 뒷일을 수습하며 한숨을 길게 내리 쉬었다. 그녀가 인간계에서 벌인 괴이한 일을 인간들이 쉽게 잊게끔 기억을 없애는 데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번 문제를 일삼는 어리숙한 사곳덩어리를 부회장직에 올려두며 보좌하는 것을 데스 토피아의 모든 마물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피스가 당당히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비범한 능력 덕분이다. 데스 토피아에서 그녀를 이겨낼 자가 없다는 후문이 돌 정도였다.

둥둥둥~당당당~

 

분명 한 공간에서 나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홀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울려 퍼진다. 스피커의 진동이 문 너머 매니저의 구두 안을 파고든다.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피스가 있을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

부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무하지만 당연하게도 낮게 깔린 매니저의 중저음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스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선 사무실 안은 반짝거리는 장신구와 귀여운 인형들로 어질어져 발 디딜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턱 끝까지 차오르던 화를 꾹꾹 눌러 담아 가라앉힌다. 그리곤 물건에 파묻힌 스피커를 찾아내 볼륨을 서서히 낮췄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빨리 모은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이제는 핀잔도 안 주시네~”

그렇다고 제 말을 들으실 분도 아니죠.”

"에이~ 왜 이렇게 꽉 막히셨대. 인간계에서 매니저님 같은 사람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진지충이라고 해요~”

! ! !

여럿이 써도 될 만큼 널찍한 화장대에 앉아 길게 찰랑거리는 분홍머리를 뿔처럼 올려 묶던 피스가 거울 너머로 비치는 매니저에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그리곤 곧바로 하얀 리본 끈을 공중에 띄우며 리본 체조하듯 글씨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잔재주에 능한 피스의 흔한 장난이었다.

진지충은 웃자고 한 농담도 정색하면서 받아친다던데. 우리 매니저님이 아주 정석이시네~ 뭐 그건 그렇고 또 왜 그러실까~ 상사한테 찍히셨나? 고백했는데 차였다던가! 아니면~ ”

 

피스의 가벼운 앵앵거림은 날 벌레처럼 매니저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피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보다 힘주어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부분은 부회장님의 임무 일시중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아빠가 그렇게 하래요? ~말 강밭은 분이셔.”

회장님께서는 부회장님 걱정 뿐 이십니다.”

걱정은 무슨, 겉치레인 거 다 알아요. 본인 걱정이나 하라지.”

 

매니저는 피스가 제 허벅지를 팔꿈치로 툭툭 치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니 잘 말해달라는 그녀의 말은 생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지 오래였다.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순진무구한 것인지.’

매니저는 어느샌가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미세하게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 썼다.

 

피스는 다른 마물 들과 다르다.

 

이 세계의 마물로써 살아가지만, 완벽한 마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모든 마물에겐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고, 전생에 죄를 지었던 이들과 소중했던 이들을 인도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죄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그만큼 무거운 죄벌도 없을 테니.

 

그렇게 죄악감으로 키워진 소원이라는 씨앗은 환생이라는 열매로 맺어진다.

 

하지만 피스는 전생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속죄 없이 얻어낸 조각은 그저 손쉽게 아스러지는 설탕 조각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조각을 모으고 헤쳐 나갈 방법을 찾아낸다니.

 

매니저는 어느새 그녀를 연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메마른 입가 끝이 올라간다.

 

나도 같이 동조한 주제에.’

'난 그녀를 연민할 자격조차 없다. 그저 이대로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다.'

 

(null)

 

어휴, 그래서 케이가 누군데!!”

인도자 정보 창에 케이라는 글자가 그녀를 저를 깜빡거린다. 홧김에 정보 창을 향해 인형을 획 집어 던졌다.

마지막이라고 더럽게 깐깐하게 구네. 노력으로 이만큼 이뤄냈으면 된 거 아니냐고!

 

나도 초반엔 이렇게까지 조각 수집에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었다. 마물이라면 본디 해야 하는 일이라 여기며 수집했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목표라면 그저 데스 토피아의 마물들을 뛰어넘어 최고로 잘 나가고 특별해지겠다는 것 하나였다. 나는 그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며 90년 만에 령의 조각을 80%나 모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모았냐고?

 

그건 내가 완전한 마물이 아닌 대신에 얻은 인간계를 오갈 수 있는 권한 덕분이다. 다른 마물들은 많이 모아봐야 10년에 2%였기에 내가 특혜를 받은 게 아니냐며 시기, 질투하는 마물들도 많았다.

 

그래, 나에게 특혜가 있긴 하다. 권한 하나만으로 그렇게 쉽게 조각을 모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버지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 받은 귀걸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귀걸이에는 내가 여태까지 인도한 령의 한이 일부 담겨있어 날을 거듭할수록 인간을 끝없는 외로움과 우울감의 늪에 빠뜨린다. 약해진 인간들을 휘두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1년 사이에 남은 19.5%를 모아 완성도 99.5%까지 도달하면서 조각 수집률 최단 시간을 기록했다. 순탄하게 조각을 수집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아빠는 내가 인간계에 장난치는 건 예민하게 굴면서 내 조각 수집에는 관대했다. 그래 놓고서는 임무 일시중단이라니. 얼토당토않은 발언이었다.

 

코앞까지 왔는데 임무 일시중단? 절대 안 되지!”

사무실 구석에서 자고 있던 러브가 내가 책상을 내리침과 동시에 위로하듯 다가왔다. 다리에 머리를 부비는 걸 보고 있자니 분이 사르르 녹는다.

 

내 일인데 아빠는 왜 이렇게 관여를 못 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니까~ 러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러브의 양 뿔 사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은지 아르릉 거린다.

 

 

띠로 로로- 띠로 로로-

 

자기 이야기 하는 건 어떻게 아셨대~ 답지 않게 회상에 젖어있었건만.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여전하다.

 

- 부회장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중요한 거 아니면 통화하라고 전해주세요.”

- 무조건 면담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 네에~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래도 최근에 얼굴 볼 일은 많이 없었으니까 찾아가 볼 작정이다. 나한테 무관심하더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나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휘둘리는 얼굴 보는 재미가 쏠쏠한 마물이다.

 

아빠, 오랜만-”

으악!!”

 

벌컥-

 

회장실의 문을 여는 순간 호리호리한 몸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왜인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라면 태평하게 얼굴에 팩을 하며 의자에서 마사지를 받는 마물을 보니 애쓴다 싶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 안됐나?

 

언제까지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올 셈이냐!!”

"되게 한가하신가 봐요?"

"네놈 이야기를 잘도 하는구나. 네 놈은 낙서 크기가 삼천 제곱미터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밀밭 한가운데에 낙서로 헤집어 놓을 건 뭣이야!“

 

어우, 왜 저렇게 말이 많담. 그래 봐야 인간들 축구경기장 4배 정도 크기에 지나지 않는가. 버럭 소리를 질러 되는 꼴이 내가 바라던 바지만 귀가 아프니 살살 다독여봐야겠어.

"에이~ 왔다 갔다고 흔적 남기는 거죠. 인간들은 그런 거 좋아하던데요. 저라고 못할 게 뭐 있어요!"

", 표시?"

"마물들이 했다고 생각하는 인간 하나도 없어요! 다들 외계인 짓이라던데. 미스터리 서클이라던가~ 귀엽지 않아요?"

"인간을 흉내도 모자라 이제는 인간이 귀엽다니. 그렇게나 미련한 것들을, ."

"아빠도 좀 귀여워 해봐요. 인간들이 있어야 데스 토피아도 순환하잖아? 안 그럼 그렇게나 좋아하는 권력도 못 누릴 텐데."

……이것이! 당장 나가!”

 

나는 알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나왔다. 어휴,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나오고 말지. 자기가 불러놓고는 제 분을 못 이겨 나가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유쾌하게 일이 끝나지 않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져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이 기분을 인형 바다에 몸을 실어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놓은 인형 바다는 온데간데없었다. 내 사무실은 아까 전과 비교되게 말끔히 정리되어있었다. 분명 매니저가 다녀간 모양일 거다. 매니저가 이렇게 깔끔한 체하는 걸 보면 치가 떨렸다.

 

미야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러브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자료 옆에서 식빵 자세로 얌전히 웅크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러브가 책상에 꼬리를 두어 번 탁탁 치더니 자료를 향해 한 번 더 울음소리를 낸다.

 

어차피 조각 수집 통계자료나 신입마물리스트 일 텐데. 급하게 볼 것도 없잖아~”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넘긴 자료의 첫 페이지는 통계자료나 신입 리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놀랍게도 내가 그토록 찾던 케이의 정보 중 일부였다. 비록 일생()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사는 곳만 알면 찾아갈 수 있으니 이걸로 충분했다. 근데 여기에도 이름이 없네~ 뭐 곧 죽을 인간인걸.

 

그런데 매니저는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래?!”

 

혼잣말이었지만 문밖까지 들릴 정도로 목청껏 까랑까랑하게 말했다. 분명 밖에서 매니저가 염탐하고 있을 거다. 내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할 게 분명하다. 꼼꼼하고 철저한 깍쟁이인 그가 내 매니저라는 게 귀찮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한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이런 점에선 매니저로서 꽤 고단수라니까.

 

그런 매니저에게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이다. 인간계에 가지 말라던 이가 '어서 가세요^^'하고 등 떠민다는 것 수상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내심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러브, 이거 두고 간 분 다시오면 전해. 내가 나중에 꼭 갚는다고 말이야~"

매니저가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혜든 빚이든 꼭 갚아드릴게.

 

2

 

 

나는 매니저에게서 입수한 정보를 가지고선 일주일간 씨름했다, 최근 케이의 거주지가 바뀌었는지 찾아내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물론, 난 천재니까 기본적인 정보만으로도 금방 찾았지. 지정 게이트가 좀 멀어서 찾아오는 게 골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찾아낸 케이라는 인간이 어떤가 물어본다면.

 

신원불명이더니 특별할 것도 없잖아?”

오후까지 오피스 룩으로 멀끔했던 인간이 지금은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이다. 더 보태서 편의점 야외테이블에서 깡소주를 마시고 앉아있으니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슬슬 나서볼까?~”

 

(null)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진다더니. 자네가 딱 그 꼴이야.”

죄송합니다. 지점장님.”

, 일은 잘 하더니만. 외적인 건 왜 이렇게 삐걱거리는지. 이래 가지곤 여기서 일 오래 못해!”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난 모르겠고. 내일부터 황금연휴니까 그동안 반성하고. 돌아와서 서로 잘 풀어봐~”

……

 

나는 이번에 있었던 신 프로젝트를 처리하느라 몹시 지쳐있던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계장과 부딪힘이 좀 있었던 게 시발점이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신없이 회식 분위기를 따라가다 그 자리에서 계장에게 쌓아두었던 불만을 삿대질하며 토해냈으니 잘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사람 저번에도 새로 들어온 사원에게 덤터기 여러 사람에게 성깔지랄 맞은 거 알면서 왜 그랬는지.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제어도 못 하고 술주정을 부렸는지. 다행이라면 지점장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거다.

 

제기랄, 확 죽어버리고 싶네.”

눈에 초점이 사라져 뵈는 게 사라지니 입술이 제멋대로 달싹거렸다. 사실 정말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벌인 황당무계한 짓이 꼴사나워 씁쓸했기에 내뱉었을 뿐이었다. 난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병 채 들이켰다. 입안이 퍼석했다.

 

겁쟁이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말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렸다.

 

어머, 내가 보이는 거야? , 상관은 없지. 내 말은 고작 계장한테 미운털 박힌 거 가지고 죽고 싶다고 떼쓰는 게 우스워서 그러는 거야.”

제가 무슨 너덧 살 먹은 애처럼 보인다는 말입니까?”

에이~ 애는 무슨! 아까운 목숨 함부로 굴리면 섭섭하잖아. 그렇게 쓸 거면 나 달라는 거지.”

 

이 여자, 뭔데 나한테 시비지? 아니 그것도 그렇고 생긴 게 꼭 사람 안 같다고 해야 하나. 게임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이었다. 연분홍색 머리칼을 양쪽으로 뿔처럼 말아 올렸고 생김새는 이마와 콧대가 높아 잘 빗어낸 조각 같았다. 그리고 길게 뻗은 속눈썹 안에 숨겨진 새빨간 눈동자는 너무 강렬해 나를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눈동자와 계속 마주하고 있으니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렇게 한참을 뚫어지게 본 것 같다. 눈을 한번 끔벅거리자 앞에 앉아있는 정체 모를 여자가 저를 놀리듯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 쪽팔리네. 나는 창피함에 머리를 강하게 두드리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뭡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집에나 얼른 들어가세요.”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저는 집에 알아서 잘.”

 

그 여자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아니, 그거 말고. 라며 손으로 내 입을 막아 딱 끊어낸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까 이전에 나랑 만났던 인간들이 너랑 안면이 있더라고. 매년 상을 많이 치르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귀엽기는~이건 내 선물! 이라는 말과 동시에 왼쪽 귓불이 찢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아찔하더니 일순간 번뜩이는 빛이 시야를 감싼다. 그러자 서서히 눈앞이 어두워지고 자잘하게 들리던 소음마저도 단절됐다.

 

마치 우주를 떠다니듯 몸이 부유해진다. 그리고 내 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을 등진 채 높게 솟아있는 검붉은 건물을 향한다. 자석에 이끌리듯 조금씩 조금씩 그곳으로 향해간다.

 

(null)

 

 

삐 비비 비 빅-! 삐 비비 비 빅-!

나는 눈도 멀쩡히 못 뜬 채 핸드폰 화면을 더듬어 알람을 끄고는 잠시 멍해졌다. 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맞아, 그 여자 만나서 뭐라 이야기했던 기억이.

 

아씨!!”

핸드폰을 확인하다 9시라는 걸 보곤 순간적으로 몸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이윽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다 털썩- 침대에 반쯤 걸터앉는다.

 

맞다, 오늘 쉬는 날이지.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가 툭 터져 나올 때쯤.

딩동~딩동~

! ! ! !

분명 고모일 거다. 매번 연휴 때면 아침부터 찾아오시니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다가 아차 싶었다. 분명 머리에 까치집이 돋아 헝클어져 있고 어제 술도 마셔서 팅팅 부어있을 몰골을 고모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세수라도 할 걸 후회가 막심하다.

 

어머, 어디 아픈 거야?”

아프긴요. 오늘 좀 늦게 일어나서 그래요.”

네가 웬일로.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지?”

 

멋쩍은 웃음이 먼저 나온다. 나는 애써 그런 거 아니라며 고모의 양손에 들려있는 짐들을 하나둘 내 손에 움켜쥔다. 꽤 무게가 있는 걸 보니 이번에도 찬을 손 크게 하신 만드신 모양이다.

 

내가 씻는 사이 고모가 아침상을 잔칫상처럼 차리며 손짓하신다. 오랜만에 맛보는 담백한 국과 찬들은 내 입맛에 너무나 들어맞았다.

 

오랜만이네. 고모가 만들어주신 집밥.’

 

나는 뭉클해지는 가슴을 달래려 고모에게 안부를 시작으로 요리 솜씨가 여전히 훌륭하시다, 최근 시작한 일은 적성에 맞냐는 둥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그러다 왜인지 내 눈치를 보는 고모가 신경이 쓰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모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라는 말을 하고는 답을 기다렸다. 고모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우물쭈물하셨다. 그 모습에 괜스레 목이 타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셨다. 이런 분위기 너무 어색한데.

 

너희 아버지가 너랑 만나지 말래.”

……

그만하면 많이 키워줬다고.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한지. 키운 정은 정도 아니라니? 나는 늘 널 아들처럼 생각하는데……

 

무언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고모와 언제까지고 이렇게 마주할 수 없다는 걸. 나는 그저 파르르 떨리는 고모의 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위로도 사과도 지금의 고모에겐 의미 없는 말일 테니까.

 

미안하구나. 너희 아버지랑 내 일인데. 너는 신경 쓸 것 없단다. 다 괜찮을 거야.”

……

하하, 내가 괜한 말을 했어. 여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텐데 많이 먹으렴. 그런데 네가 웬일로 귀걸이를 다했니?”

 

귀걸이라니 고모의 물음에 양 귓가에 손 올리니 왼손 끝에서 차가운 금속이 스친다.

뭐지, 이건? 손을 아무리 놀려봐도 귀에 단단히 자리한 귀걸이는 빠질 줄을 몰랐다.

 

(null)

 

고모가 그렇게 말씀하신 그날 밤 이후로 계속해서 악몽을 동반한 가위에 짓눌렸다.

나는 숨이 턱- 막혀 끙끙거리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몸에 꿋꿋이 힘을 주었다. 겨우 가위에서 풀려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니 이마에서 송골송골 맺혀있던 식은땀이 귀 뒤로 스르륵 흘러내린다. 악몽과 가위가 한 세트처럼 같이 반겨주니 최악이다.

 

기분 더럽네.”

 

정말 기분 나쁜 꿈의 연속이다. 여태까지 내가 떠나보낸 이들이 나를 원망하며 자신을 목숨을 갈구했다. 나는 사지가 묶인 듯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 붙잡혀 엄문당할 뿐이 반론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여자를 만난 이후로 이런 악몽을 보름 동안 꾸고 빠지지도 않는 귀걸이가 자신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하루하루 느끼면서 지냈다. 조금이라도 무엇을 할라치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연휴라고 잡아뒀던 약속들도 죄다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달력 속 일정을 하나씩 지우다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내일임을 깨달았다.

 

지난주에 아버지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었지. 오랜만에 외국에서 걸려온 연락이건만 별다른 말은 없었고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섭섭하지는 않았다. 만나자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예측은 무서우리만큼 정확했고 나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예민하신 분이니까. 아버지라면 나에게 일어나는 이 기이한 일에 대해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연휴가 끝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일이고 뭐고 살아가는 것부터 막막할 테니까.

 

(null)

 

케이의 아버지는 뜬잠에서 깨어나 초조한 맘에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밖은 뿌연 구름에 가리어진 달빛이 어두운 도심을 비추고 있다. 아직 그가 사는 곳은 새벽이다. 그는 근래 들어 케이가 악귀에게 사로잡혀 죽어가는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멀리 떨어져서도 부족함 없이 아들에게 보탬이 되어주는 것과 속죄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 케이의 아버지는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잠잠했던 옛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야만 했다. 절망의 끝자락에 있던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흔들어 엉망으로 만들었다, 케이의 아버지는 그렇게 악몽 같은 그때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이 그런 악몽을 꾼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애가 너덧 살 무렵, 악몽을 꾸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자신의 몸을 한없이 내려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었다. 그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악화할 줄은 몰랐다. 난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체온을 병원치료와 약을 병행하며 달래보려 했지만,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런 애타는 부모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 녀석은 나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면 아내가 너무 그리웠다.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그리워하다 문득 자신을 키워준 할멈이 떠올랐다. 할머니에게서 독립한 이후, 너무나도 까마득했지만 난 최후의 선택으로 할멈에게 아들의 이상징후에 대해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난 할멈에게 참으로 염치없고 버릇없는 자식 녀석이었다.

 

전생서부터 딸려온 악귀구먼.”

전생?”

쯧쯧, 내가 말했잖여! 너 서부터 명이 꼬였다고!”

"할멈, 어떻게 안 될까? 나한테는 할멈이랑 애. 둘뿐이야."

 

그래. 이제는 조금이나마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진다. 난 아들을 얻은 대신 내가 제일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다. 나에겐 정말 어릴 적 키워준 무당 할멈과 아들이 전부였기에 아들의 회복을 간절히 또 간곡히 바랐다.

 

"이리되려고 이 늙은이 저버리고 성당서 눈 맞고 애도 놓은 겨?"

"할멈……제발……"

"하이고- 그래, 내가 좋은 신 붙여줄테니께. 다시는 발도 들이지 말어!”

 

할멈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아들 녀석에게 정성을 다해주었다. 물론, 좋은 신도 붙여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악귀에게 잡아먹힐 뻔한 아이는 다행히도 몇 달 만에 악몽에서 벗어나 울음 없이 깊은 잠을 잤다. 그렇게 지독하게 아들을 괴롭히던 악몽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멀어져 아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래, 그걸로 끝맺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그때를 회상한들 이 불안한 예견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해결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들을 살리려던 욕심이 눈덩이처럼 커져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젠 더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손도 대지 않던 차디찬 핸드폰을 집어 들어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오랜만에 전화를 건 상대는 아들이다. 금방이라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초조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맘을 달랬다. 분명 한국은 오후일 텐데 전화를 곧잘 받지 않는 걸 보니 이런 아버지에게 진력이 난 걸지도 모르겠다. 난 복잡한 심경을 가다듬으며 수화음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 아버지. 여태 전화를 못 드렸네요. 잘 지내셨어요?"

"됐다. 다른 건 제쳐두고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비울 수 있니?"

 

 

 

3

 

 

어제보다 한 층 더 달아오른 열은 육체에 무게를 더해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난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불구덩이 같은 밖을 나선다. 인산인해한 연휴 기간의 길거리는 나에겐 지옥과도 같았다. 따가운 태양 빛이 맹렬히 아지랑이를 펼쳐대니 걸음을 뗄 데마다 숨이 턱턱 막혀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라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어.‘

 

딸랑~

 

-어서 오세요.

 

분명 일찍이 나섰건만 약속 시각보다 20분 늦은 120분에야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은한 바람이 미적지근하게 볼을 스쳐 지나간다. 분명 에어컨 바람일 텐데 시원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떠들썩한 목소리로 메워진 카페 1층을 지나 곧바로 2층을 향했다. 계단 하나하나가 곤욕스러웠지만, 마지막 계단까지 잘도 밟아냈다.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 바라보는 아버지 모습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차마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고르지 않은 숨을 가다듬으려 사리물었다. 내가 다가가기를 주저하자 아버지는 담담하게 얼른 와 앉으라며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래, 담담하게.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3년만인가.”

……역시 안색이 안 좋구나.”

질 나쁜 꿈을 꾼 거죠. 너무 염려는 마세요.”

"너도 느끼고 있겠다만 허투루 넘겨선 안 돼."

 

맞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느끼고 있을 터이다. 지금 이렇게 담담한 척하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그래서 말이다. 이 아비랑 떠나는 건 어떻겠니?"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자기랑 같이 미국으로 떠나자는 거야? 여태껏. 몇 년 동안 날 혼자 뒀으면서?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너에겐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난 늘 고민했단다."

매 졸업식 때 나에게 언질을 주었다는 말은 나에겐 변명과도 같았다. 졸업식 때에만 얼굴을 비추는 것도, 이렇게 운수가 안 좋을 때는 아빠 노릇을 하겠다며 나타나는 그에게 속상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게 싫다면 다른 방도는 있다만.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아무 말 않는 나에게 아버지는 이마를 닦으라며 손수건을 내어주신다. 이마를 훔치니 매달리듯 달려있던 식은땀들이 맥없이 훑어진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아내고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이 손수건 시원하네.

 

"그 방도가 뭔데요?"

"그건 말이다……"

 

아버지는 말을 고르듯 한참을 가만 계시더니 입을 떼셨다. 어릴 적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나에게 있었고, 그래서 자신을 키워준 무당 할머니에게 부탁해 나를 살렸다고 하신다. 믿기지도 않고 어이도 없었지만, 나의 상태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건 아버지가 유일했다.

 

"그럼, 답 나왔네요."

"설마 찾아가려는 게냐?“

 

아버지의 말투에 섭섭함과 걱정스러움이 뒤섞여 내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내가 가길 바라지 않는다면 애초부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면서 저런 말을 한다. 아버지는 내가 어쩌기를 바라는 걸까.

 

",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몸으로 뭘 어쩌려고!"

아버지의 말은 날카롭게 내 말을 서걱- 잘라낸다. 말로 단번에 아픈 곳을 찌르니 할 말이 없었다.

 

"어디인지만 알려주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연락드릴게요."

 

아버지를 가까스로 설득한 끝에 알겠다는 아버지의 끄덕임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겉가죽이 해어진 다이어리 제일 앞쪽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얼굴을 흘깃 보시더니 안쪽에 있던 쪽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신다. 그리고는 내가 내려뒀던 손수건 위에 쪽지를 살포시 얹어놓으시더니 여기라며 손가락으로 글씨를 가리키신다. 글씨가 작지 않음에도 눈앞이 뿌옇게 되어 가늘게 떠야만 했다.

 

[기닉산 중턱, 바윗돌 표지판에서 서쪽 샛길, 해울 암무당]

정말 이걸 주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가늘게 떴던 눈을 비비며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보내니 입을 길게 늘이신다.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매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니란다. 가도 괜찮을는지……

"아버지가 독실한 신부라서요?"

"글쎄, 그분이 독실한 무당이라서?"

 

방금 하신 말씀……말장난이겠지? 내가 대꾸를 안 하자 이번엔 손수건 옆에 내 이름과 아버지 이름이 나란히 적힌 명찰 목걸이를 내려놓으신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 전화번호도 적혀있었다.

 

"이건 왜요?"

"산에 오를 때 이걸 목에 걸고 갔으면 좋겠구나."

"……제가 할머님 찾아뵐 거라고 예상하셨나 보네요."

내심 섭섭하다만 예상은 했었지.”

그래도 저는 그분한테 가봐야겠어요.”

 

(null)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쪽지 속 기닉산을 알아보고 갈 채비를 하느라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사실 또 악몽을 꾸게 될 게 뻔해서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지 않았지만.

 

두세 시간쯤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갈아타면 도착한 기닉산은 생각보다 높았다. 눈앞이 흐릿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도에선 700m라던데 좀 더 편하게 갈 만한 길은 없는 걸까? 아마 나와 어제부터 함께한 동료가 있었다면 절대 못 갈 거라며 걱정스러운 맘에서라도 면박했을 것이다. 밤새 못 잔 몸이 버스에서 잠을 청할까 봐 청심환을 두 알이나 씹어먹었더니 피곤함과 두통이 중첩돼서 반쯤 한계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죽을 것 같다 싶으면 119 부르면 되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시원한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초등학생처럼 내 이름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찰 목걸이를 걸었다. 손목에는 누르면 사이렌이 울리는 시계도 메 놓았다. 거기에 등산 가방과 모자까지 더해지니 예전에 봤던 보이스카우트 같았다. 다 큰 놈이 조난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완전무장했다는 것이 쪽팔렸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얼마나 올라가야 할지도, 표지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냥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산행한 지 1시간은 지났을까? 아니, 실루엣만 보이는 시곗바늘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않은 듯했다. 처음이랑 다를 게 없네.

 

몸은 꼬꾸라질 듯 잔뜩 굽어진 채 겨우 견디고 있고 시야는 흐릿해져서는 앞에 뭐가 보이지도 않는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 심장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다며 빠르게 뛴다. 머리를 제외한 몸뚱이가 심장처럼 요동쳐 오는 게 섬뜩할 지경이다.

 

", 돌겠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산이라지만 사이렌이 울리면 누구라도 들어 줄 거라고. 그렇게 간절히 믿으며 전력으로 사이렌 버튼을 눌렀다.

 

-위 윙~ 위우웅~ 위이이이이잉~

 

, 진짜 돌아버리겠네. 한번에 힘을 써서 누르니 사이렌 소리가 기닉산이 떠나갈 정도로 울려댔다. 그 사이렌 소리가 귓구멍을 지나 머리통 울려댔고 난 정신이 아득해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삐이이이~

 

, 조용하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귀울림마저 선명하게 들려온다.

설마 지금 나 잠이 든 걸까? 하지만 최근까지 매번 꾸던 꿈속 장면은 아니다. 부들거리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지니 눈앞에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푸르른 들판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니 낙원에 온 기분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억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한다는 것. 그리고 나를 향해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누군가. 이런 기분 어디서 느껴봤었던 걸까? 낯설지만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 환한 웃음이 나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한다. 조금만 더 가깝다면 들릴 것 같은데. 전혀 닿지를 않는다. 그저 멀리서 희미한 음성만이 들릴 뿐이다.

 

…………

놈아?’

 

 

"! 이놈아!"

 

 

갑자기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아까 보였던 아름다운 낙원은 순식간에 핸드폰 화면이 꺼지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남은 건 어둠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무슨 소리지? 거기다 분명히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눈꺼풀이 굳게 닫혀 떠지지도 않는 상태였다. 새로운 유형의 가위인 건가? 결국엔 체력이 버티지를 못하고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대입 때의 체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어진 모양이네. , 이 가위를 어떻게 벗어나지!?

 

"정신 단디 안 붙잡어!"

아까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더니 퍽- 배 부근에서 엄청난 충격이 치고 들어온다. 동시에 떠지지 않던 눈이 확 띄어지면서 순간적으로 빛이 눈을 찔러 된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어르신 한 분이 투박하고 주름진 손을 탈탈 털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으으--"

"다 큰 녀석이 엄살은."

", 혹시 절 구해주신건가요?"

나의 물음에 어르신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알아서 무엇할 거냐며 정신 차렸으면 이제 집에 가란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늙은이는 제 말이 다 끝난 듯 무섭게 문을 탁- 닫고 나가셨다.

 

", 어르신! 할머님!"

나는 반사적으로 튕겨 나가듯 일어나 문밖의 어르신을 쫓아갔다. ? 몸이 너무 가벼운데. 뭐지? 잠깐의 뜀박질이었지만 전율이 일어 우뚝 멈춰섰다. 생각해보니 악몽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 몸이 펄쩍 날 것 같고 그려?"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어르신의 물음에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을 글씨가 보였다. 잠깐, 해울 암무당?!

 

"어르신, 혹시 이해울 아시나요?"

날 짓누를 듯 노려보는 어르신에 눈빛에 괜히 배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손 치워보라며 명찰 목걸이를 툭툭 건드리신다. , 이걸 보신 건가.

 

", 인사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이 해울씨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님 손자입니다."

"손자는 무슨. 난 아들놈도 손자 녀석도 없어!"

어르신은 기다렸다는 듯 꾸벅 인사한다고 낮아진 내 머리통을 팍- 때렸다. 아야야야. 아까부터 왜 이렇게 세게 때리는 거야.

 

"……할머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닮지나 말 것이지! 일단 따라와 봐."

 

할머님을 따라 들어간 공간은 화려한 원색의 동상과 병풍, 재기들이 가득 메워진 화려한 모습에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웅장함이 느껴졌다. 바깥을 수수한 시골집 외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덧붙여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냄새가 여기가 무당임을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다. 최대한 요란하지 않게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님이 이리 와 앉으라며 눈짓하시는 걸 보니 생각보다 내가 많이 얼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넌 모르겠지만 어릴 때도 그랬고 최근에 이상한 놈을 만나고 또다시 악몽을 꾼다는 말인게지?"

", 그런데 아까는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지 않았어요. 지금도 아프지도 않고……"

난 할머님에게 한동안 겼었던 온갖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도 모르는 어떠한 실마리를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만 앓고 있던 이야기를 하니 속이 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문뜩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최악의 몸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몸 상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도 맑고 쌩쌩했다. 몸도 뻐근함 없이 가볍고 유연해진 기분이다. 이렇게나 완벽한데 이제 다 나은 게 아닐까?

 

"너 방금 다 나은 거 아닌가~생각혔지?"

", 그게…………"

"어림도 없지. 기닉산이 기운을 숨겨줘서 그런 거다. 내려가면 또 반죽음일 테지."

 

,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런 신비한 일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걸 보니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는 게 아닌가 싶다. 이 할머님 아까부터 날 계속 때리시던 게 꿈이 아니란 걸 자각시켜주시려는 걸까? 할머님께서 그렇게 속 깊어 보이지는 않지만……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우선은 여기서 지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정말 잠시뿐이었다. 아까는 정신없어 보지 못했던 바깥 풍경이 창문 틈으로 살며시 드러났다. 창밖의 풍경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녹색의 소나무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다. 거기에 청연이 드리우니 금방이라도 신선이 나타날 것 같다. 이러한 풍경은 하루 이틀 보기엔 참으로 좋겠지만 내가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사는 건 포기하는 게 좋겠어.

 

"그럼, 예전처럼 좋은 신을 저한테 붙여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평범한 사람을 수호신이 참으로 달가워하겠구나. 잡귀면 모를까."

"잡귀는 절대 안 되죠!"

안 그래도 악몽으로 죽은 사람들 잔뜩 보느라 심신이 지쳤다. , 그만 생각하자.

 

그려~모르는 게 속이 편하지. 이 늙은이는 온갖 귀들이란 말도 섞고 접신도 혀. 작두도 타지.”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아마……이곳에 있으면 금방 네 기운을 찾을 게다. 악귀가 기운을 삼켜버린 통에 수호신도 맥을 못 추리는 거겠지."

 

(null)

 

그날 밤, 악몽을 꾸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향냄새가 그나마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아 주는 듯했다. , 역시 잠자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네.

 

"와 아악!"

 

어 우 씨……저게 뭐야. 눈을 감고 있어도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눈을 조심스레 뜬 순간 내 시선이 닿는 천장에 희미한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형체는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한 떠 있었다. 형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괴이한 무언가는 몸에 걸친 옷자락을 휘날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와 같았다. 말갛게 웃는 얼굴은 티 없고 순수해 보였고, 팔다리는 곧게 뻗어 훤칠했다. 빛을 사람으로 만들면 저렇게 생겼을까? 뒤에 날개와 후광이 일렁이니 정말 천사가 맞겠지?

 

"그리 놀라는 걸 보니 재미있네요."

"사실 좀 더 지켜보고 싶었어요. 피스가 당신을 집어삼킬 때쯤."

"그 말은……당신이 제 수호신입니까?"

"그런 셈이죠.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일이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으니 구원은 해드릴 겁니다. 염려는 마세요."

 

분명 아까는 판타지 영화를 3D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수호신의 모습에 빠져들었는데. 그가 입을 여니 그저 재수 없는 사람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나를 구원해 준다는 말을 믿어도 될지도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그런데 아까 당신이 말한 피스는 누구죠? 절 집어삼킨다니……"

"그대도 보았는걸요. 아주 얄궂은 길고양이 같은 녀석이죠. 분홍빛 머리에 붉은 눈."

 

나는 무심결에 귓불을 매만졌다. 여전히 요지부동인 귀걸이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역시 걔 때문이구나.

 

 

 

 

 

 

 

 

 

 

 

 

 

 

 

 

 

 

 

 

 

 

 

 

 

 

 

 

 

 

 

 

4

 

 

그래도 수호신이 빨리 나를 도우러 와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앞에 지금 이 순간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 것이니 안심이다. 그래도 우선은 그 피스라는 애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좋겠지? 혹시 모를 일이다. 내 힘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설득한다거나 한풀이해준다거나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 피스라는 애는 뭐죠?”

이해를 돕기위해 저승사자라고 해두죠. 제가 주목하는 아이 중 하나입니다.”

걘 뭐길래. 열심히 아득바득 사는 인간사를 뒤틀어 놓는 거죠? 그걸로 재미라도 본답니까?! 이득이라도 되나 봐요?!”

 

잔뜩 날 선 나의 어조에 수호신은 눈썹을 치켜들고선 서서히 몸을 가라앉힌다. 공기 중에서 휘날리던 옷자락이 지면에 닿아 흐트러지고 수호신의 형체가 다박다박 서서히 다가온다. 은은한 광이 내 눈앞에 다다르자 그의 손이 내 왼 귓불. 그러니까 귀걸이에 닿았다. 수호신이 가늘게 웃는 낯은 그야말로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가끔은 무지한 편이 더 좋을 때도 있답니다. 당신이 피스에 대해 안다 하여 좋아질 리 없는 것처럼요. 그저 이 귀걸이 주인이 오기를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그렇게 한가한 인간은 아니라서요. 이거 당신이 못 떼줍니까?”

당신한테 잘 어울리는데요. .”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가볍게 내쳤다.

내 심장박동을 따라 깜빡거리는 귀걸이는 영화에서나 보던 위치추적기를 연상시킨다. 금방이라도 나에게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꺼림칙한데 내가 미쳤다고 그 피스라는 애를 기다리겠어?

 

피스는 당신을 포함한 주변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어요.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악연이죠.”

제가 걔한테 죄라도 지은 겁니까?”

오히려 그 반대라면요?”

그럼, 벌 받을 자는 따로 있네요. 죄 없는 순결한 인간이 아니라! 죄 없는 인간을 해한 악랄한 저승사자에게! 심판을 내려야죠!”

당신이 말하는 당연한 순리가 깨진 모양이네요.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바쁘신 인간은 어서 주무시길.”

 

잔뜩 골이나 예민해진 나를 달래듯 그의 따스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을 내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아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향해 수호신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점멸하듯 사라졌다. 몽글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몸에 힘이 쫙 풀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마취 주사라도 맞은 것 같이……

 

 

요 녀석아!! 니가 여 짝으로 서양놈 부른겨!!”

 

 

흐으으……네에?”

나는 귀청 떨어질 듯 큰 호통에 먹먹해진 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잠든 건진 모르겠지만 몸이 한결 편안하다. 그런데 서양 놈라니? 나도 오는 길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줘. 아침부터 무슨 말씀……

 

이 할망구가 모르면 네놈이 아는 녀석이겄지. 네 이름도 알더만.”

잘 주무셨어요?”

, 뭐야. 당신이 왜 여기서. 왜 그러고 있는 건데?”

어안이 벙벙하다. 어젯밤에 본 수호신이라는 놈이 뻔뻔하게 날개랑 후광만 빼놓고 인간행세를 하고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낙낙한 반소매남방과 슬랙스를 맞춰 입으니 대학생 새내기처럼 풋풋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빠진다.

 

저희 어제 보기로 했잖아요.”

그려, 머리 샛노란 놈이 니 데리러 왔다길래 내쫓으려던 거 들여보냈다. ? 여기서 살라고?”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수호신이 저렇게 무당집에 대놓고 와도 되는 거야? 인간행세는 잘도 했지만 남다른 자태는 감출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다른 세상 사람 아니냐고.

 

얼른 내려갈 준비 하세요. 당신 한가하지 않잖아요?”

전에 한번 그렇게 말했다고 엄청 놀려먹네. 인간 놈 바쁘다는 게 그렇게 거슬리나?

 

나는 얼떨결에 해울 암무당을 나설 채비를 했다. 예상보다 이르긴 했으나 수호신이 직접 걸음 해줬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음을 가졌다. 결국엔 그 수호신을 믿어 볼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묵묵부답인 할머님 이상하다가 여겨졌다. 할머님은 내가 인사드리러 갈 때까지 어떠한 것도 묻지 않으셨다. 수호신이라는 걸 벌써 눈치채셨을 분이신데.

 

할머님,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세 지고 가네요. 아버지께 안부 꼭 전해드릴게요.”

안부는 무슨- 잘 먹고 잘살기나 혀! 이 늙은이 죽으나 사나 너들이 신경 쓸 것 없으니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친구 잘 도와주겠습니다.”

하하, 우리가 어깨동무할 만큼 친했던가? 크흠, 그래도 제가 나중에 아버지랑 함께 찾아뵐게요.”

 

그렇게 난 찝찝한 마음을 안고 해울 암무당을 떠나 하산하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질수록 묘한 기분에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걸으면서도 시선은 계속 뒤에 꽂혀있었다. 이대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괜찮은 걸까.

 

그러다가 목 돌아가겠어요. 혹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신 건가요? 할머님이 좋은 분이긴 하시죠.”

 

맞다, 나 재수 없는 수호신이랑 같이 있었지. 너무 자연스럽게 인간행세를 해서 정신없이 휘말린 기분이다. 어제 분명 알아내려고 했던 피스의 정보나 내 이상징후에 대한 궁금증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었지. 지금부터라도 하나둘씩 정보를 캐내야 한다.

 

하나만 물어보죠. 피스라는 애는 왜 죽지도 않은 저를 데려가려고 안달복달인 거죠?”

피스와 같은 이들은 인간이 죽으면 각자의 죗값에 따라 인도해주는 게 일이죠. 그리고 제 몫을 다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피스가 저지르고 있는 결례는 제 몫을 다하기 위한 자신만의 지름길인 거죠. 물론, 그것이 옳지는 않습니다만. 이례적인 일이라 꽤 경탄했었죠.”

 

결국엔 자기 이득을 보겠다는 거잖아. 악마같이 생긴 놈이 하는 짓도 어째 악마 같은 것인지. 이번에 또 만나면!! 만나면……그러고 보니 저번에 만났을 때 나한테 상에 관해 이야기한 것도 다 자기가 한 짓을 떠본 건가?

 

 

내 주위 사람들을 죽인 게 그 자식인 거야?

 

 

이렇게 나처럼 악몽에 시달려서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던 거야?

 

 

그래서 잘 지내던 사람들이 내 주위를 하나둘씩 떠났던 거야?

 

 

나는 그게 다 내 탓인 줄로만 알았었다. 어머니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채 떠나보낸 일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줄곧 내 주변인들을 떠나보낼 때도. 내가 흉인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소중한 사람들을 멀리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다 내 탓이 아닌 거잖아. 다 그 자식 때문인 거잖아? 나는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잃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 주위 사람들을 앗아간 그 피스라는 자식을 없애서 복수해야만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진정될 것 같았다.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역시 내가.

 

지금 그× 보러 가는 겁니까?”

생각보다 한 성깔 하는 분이시네요- 만나면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네요.”

내가 그 소원인가 뭔가를 이루도록 놔둘 것 같으세요? 끝까지 쫓아가서 갚아 줄-”

, 마중을 나와주셨네요. 착하셔라.”

 

기닉산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수호신이 미소 띤 낮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그 자식이다. 술이 들어가 제대로 못 봤었지만, 감탄이 절로 나 올 정도로 아리따운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예쁜 얼굴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저 녀석에게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몸 전체에 뻐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힘껏 쥐었던 주먹도 미미한 떨림과 함께 풀려가고 있었다. 아까까지 품고 있던 거대한 분노가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으로, 두려움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기닉산 입구에 도착했지만, 피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더는 걷지 않고 서 있자 수호신이 실례하겠다는 말을 뒤로 유유히 앞장섰다.

 

안녕하세요. 유명인사를 실제로 보니 반갑네요.”

자칭 제일간다는 디케 님께서 이런 데 그런 꼴로 있어도 되는 거야?”

그건 제 맘이죠. 그래도 저 나름 괜찮지 않나요?”

 

나는 전봇대에 묶인 개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자코 그 둘의 대화를 지켜봐야만 했다. 저렇게 같이 있으니 확실히 판타지 영화를 관람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듣게 된 그 둘의 짧은 대화로 나는 그들의 관계를 유추했다. 분명 디케는 피스에 대해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처음 처음 보는 듯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검은 속이 훤히 보인다. ‘역시 한패는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생겼다.

그나저나 이 짧은 순간에도 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역시 할머님이 눈에 밟힌 이유가 있었다. 이럴 걸 알면서도 내려온 내가 원망스러워 머릿속으로 제 가슴을 한없이 내리쳤다. 다 내려오지 말고 한 중턱 중에서 대기할 걸 그랬어.

 

난 다른 사람 사정 이야기는 딱 질색이야~ 사담은 집어치우고 내가 너 뒤에 있는 인간이랑 볼 일이 있거든. 얄팍한 수를 쓸 작정이라면 나도 가만히는 못 있지-!”

 

피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산에 메아리쳐 울리고 나와 수호신이 있는 곳에 흙먼지가 일렁여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수호신이 뿌연 형체로 자리하고 있었다. 난 이 와중에 당혹스러운 이 상황에서 수호신이 있으면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독이고 있던 사이에 흙먼지의 장막을 걷어낼 만큼 화려한 붉은빛의 기운이 나와 수호신 주위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마치 리본체조를 연상케 하는 광경에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화려한 움직임에 정신이 빼앗긴 순간 매서운 강풍이 주변의 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물건들이 떨어지고 뒹구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들으니 폭풍과 정면으로 마주치기 전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다가오는 강풍에 주위에 잡을 것부터 찾아볼 애썼다. 하지만 뿌연 시야에선 당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어떻게든 두 발로 버티려 해보았지만, 힘이 부쳐왔다. 그 와중에 수호신은 마실이라도 나온 듯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가 수호신에 정신이 팔린 사이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한 번 더 덮쳐왔다. 아까보다 더 압박하는 바람에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

 

난 몸이 붕-뜨는 걸 느끼며 날아가다 뒤통수를 묵직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하지만 비명은 지를 수도 없었다. 소리를 지를 기력도 정신도 순간적인 힘으로 묻혀버렸다.

 

(null)

 

케이는 피스가 일으키는 강풍에 끝내 이기지 못하고 십여 미터까지 튕겨 나갔다.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곧게 솟은 소나무에 머리를 부닥쳤다. 본래 성인이라면 창피해서라도 자리에서 털며 일어났을 법하지만 기닉산을 벗어난 시점에서 케이의 육체와 정신은 쇠약 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케이는 곧바로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피스는 케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에 흠칫 놀라며 눈동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예상한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피스는 그제야 이 그림의 붓을 쥔 자가 디케라는 것을 직감했다. 디케는 피스가 만들어낸 모든 일격을 모두 되받아쳐 케이를 향하게 하는 것을 보노라면 피스가 디케에게 놀아나고 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을 거다. 그러니 피스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데스 토피아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강했기에 존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도자는 소중히 대해 주셔야죠. 당신이 죽이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하잖아요?”

웃기지 마! 너 때문이잖아!”

이게 다 제 물건에 손을 대셔서 그러는 겁니다- 지금도 뻔뻔하게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피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어이없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 서렸다. 디케는 아까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빙산 같은 매섭고도 차가운 느낌이었다. 피스는 예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피스의 두려움은 아는지 모르는지 디케는 나비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스는 신속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양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디케를 향해 불던 강풍이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정면이 아닌 양옆 쪽이었다.

 

쪄 적- 쪄 적-

 

양옆에서 바람이 몰려들자 흙먼지만 흩날리던 공기 중이 나뭇잎과 나뭇가지들로 더 해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정신없이 휘날리는 방해물은 누구라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방어책이었다. 피스는 더 견고한 방어책을 만들기 위해 양옆으로 불고 있는 강풍의 세기를 최대로 늘려 굵직한 나무들에 집중시켰다. 피스는 통나무를 이용해 장애물을 만들 궁리였다. 족히 100년은 넘게 살았을 법한 나무들이 하나둘씩 맥없이 픽-- 쓰러져 디케의 형체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걸어오던 길목을 완전히 통제시켰다. 굵은 나무들을 잔뜩 쓰러트린다면 인간행세 중인 디케를 못 오게 하기엔 충분했다. 피스는 디케의 발을 묶었을 거라 자신하면서도 빠르게 디케가 말하는 그 물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거라면. 바람 정령의 팔찌를 말하는 건가? 내가 능력을 쓰니까 알아본 거고. 하지만 자기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이 귀걸이일지도 모르겠네.’

 

피스가 짐작해나갈 때쯤, 갈라지고 부러져 맥없이 쓰러졌던 굵직한 나무들이 하나둘씩 원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영상을 되돌리기 한 듯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 뒤로 가려 보이지 않았던 디케가 가소롭다는 듯 피스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말하는 물건! 이 귀걸이 말하는 거지? 근데 어쩌지? 이건 아빠한테서 받은 거라서 말이야. 비슷한 걸 보고 착각하는 거 아냐?”

, 역시 글로미의 소행이군요. 하지만 그걸 악용한 건 피스 당신이니 벌은 달게 받으셔야겠습니다.”

커억-끄으윽……

 

디케는 피스가 운을 띄우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 소리 없이 빛처럼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디케는 피스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여유로워 보였다. 반짝거리는 금안은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절 잘 보세요. 당신과 똑같지만, 색이 다른 귀걸이 하고 있죠?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으윽…………라는 거야.”

이제는 잘 들을 차례입니다.”

 

디케가 그렇게 말하며 목을 조르던 손을 놓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피스의 몸이 털썩 주저앉았다. 피스는 디케를 노려보며 막혔던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죠? 그게 당신을 괴롭게 하고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모아온 그 증표들이 의미 없다는걸.”

아는 척하지 마!”

아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아는 거겠죠. 당신의 전생을 되찾고 싶지 않나요? 소원을 이루고 싶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5

 

 

지금 놀리는 거야?!! 내가 우스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왜 당신만 전생이 없는지, 왜 완벽한 마물이 아닌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아버지가 당신을 입양해놓고 내버려 두는지.”

 

피스는 디케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날카로운 가시 날에 찔린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아무렇지 않게 바로 앞에 대고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속이 아려왔다. 피스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디케의 멱살을 힘껏 끌어 잡았다.

 

날 완전히 바보 취급하고 있네- 그런 건 이미 느끼고 있었어. 그걸 알아내는 건 내 능력 밖이었으니까. 외면하는 게 최선이었다고! 이제 됐어?”

영원한 비밀이나 불변하는 진실은 없어요. 언젠가는 밝히게 되어있죠. 그걸 막고 있는 게 그 귀걸이와 모시네입니다.”

 

피스는 그의 말을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여놓는 꼴이 마치 사기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피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멱살을 움켜쥔 한쪽 손을 제 오른쪽 귓불에 가져다 댔다. 케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낀 귀걸이는 끝에 매달린 술 장식만 가볍게 흔들릴 뿐 요지부동이었다. 원래라면 자신이 빼고 싶을 때 뺄 수 있는 기능만 없다면 평범한 장신구였다. 피스는 수상한 점이 가득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솔깃하다는 생각했다.

 

모시네?”

관심이 생기시나요?”

그러라고 나한테 이야기한 거 아냐? 불만 있어?!”

피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잡고 있던 디케의 멱살을 분이라도 풀려는 듯 쥐고 흔들었다. 디케는 태연스럽게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워어-진정하세요. 모시네는 제 파트너이자 리드마인의 관리인입니다.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기록하고 그걸 보호하는 게 그의 임무죠. 그런데 그가 당신의 아버지와 작은 거래를 했다더군요.”

그게 뭔데? 설마 나랑 관련이 있는 거야?”

그건 직접 찾아가서 듣는 거로 하시죠.”

 

? 라며 눈썹을 꿈틀거리는 피스의 말을 뒤로 땅이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땅바닥이 마치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그리곤 아담한 연못 크기의 게이트가 서서히 입구를 들어내며 올라왔다. 피스는 그 광경을 보며 못마땅한 토끼처럼 다른 세계와 연결된 게이트를 발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로 가면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거지?”

그건 당신에게 달린 일이죠.”

으윽, 사람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또 어딜 내빼려고.”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던 케이가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를 내며 피스에게로 다가갔다. 아까 전 지진으로 잃어가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갓 태어난 망아지같아 우습기도 안타깝기도 하였다. 피스는 케이가 깨어난 것에도 놀랐지만 디케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나랑 내 주변 사람들 비참하게 만들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절대 그냥은 못 보내줘.”

 

케이는 있는 힘을 주먹에 가득 실어 몸을 내던지듯 피스에게 달려들었다. 체중이 가득 실린 주먹질 이였음여도 피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쉽게 막혀버린 자신의 몸부림이 원망스러웠던 케이는 이번엔 피스의 어깨를 한껏 밀쳐냈다.

 

너 잘되는 꼴은 절대 못 봐. 절대 못 본다고!”

기력도 없는 인간에게 결코 밀려날 피스는 아니었지만, 케이의 장단이라도 맞혀주려는 듯 살짝 뒷걸음질 쳤다.

 

 

덜커덩-

 

그 순간, 바닥에 만들어냈던 게이트에 피스의 발이 닿으면서 그녀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래에 있던 우물과 같은 게이트도 동시에 닫혀 없어졌다. 케이는 황당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몇 번씩 끔뻑거렸다.

 

방금 당신이 피스를 보낸 겁니다.”

제가요?”

케이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벅찼다. 마른세수를 반복하다 그대로 얼굴을 손바닥 안에 파묻곤 한숨을 내리 쉬었다.

 

낙담하셨나 보군요. 당신이 더 강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이겼겠죠. 분명 이길 겁니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죠?”

당신이 이길 기회를 드리는 거죠.”

터무니없는 장난치지 마세요.”

 

케이는 피스가 밟고선 사라진 자리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표정은 복수심과 두려움 등의 복잡미묘한 심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null)

 

나는 밀쳐짐과 동시에 세상 빛이 없어진 듯 새까만 공간으로 이동했다. 처음엔 디케의 함정이라고 의심했지만, 그 사이 리드마인 입구에 이동해있었다. 정말 눈 깜빡하는 동안이었다. 내가 줄곧 써오던 게이트는 정해진 구역으로만 다닐 수 있는 것에 반해 아주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순간이동과 같은 장치라니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부러워 한 적은 없었는데 이런 건 조금 부럽네. 그나저나 하필이면 바로 뒤에 게이트가 있었다니. 웃기지도 않다. 어찌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인간과 실랑이를 더 벌였다면 여기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이번 일은 꽤 성가시겠어.

 

나는 리드마인의 입구에서 건물을 쭉 올려다보다 목이 다 꺾일 지경이었다. 외벽에는 온갖 방어술을 빼곡히 새겨넣어 지나가는 불행도 소멸할 것 같았다. 역시 인간들 인구만큼의 기록이 있다는 게 느껴진달까. 데스 토피아보다 높다랗고 넓어 마치 거대한 산맥 하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뭐 봐줄 만은 하다. 그래도 우리 데스 토피아가 예술적인 측면에선 더 뛰어난 건물이니 놀라거나 꿀린다고 생각할 것도 없지.

 

나는 내 몸집의 열 배는 더 커 보이는 건물 입구 앞에서 멈춰선 호출 벨 여부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이 정도 기웃거렸으면 뭔가 하고 살펴보거나 열어주는 게 맞지 않는가. 나는 아까 수차례 붙잡혀 고생한 목을 다독이려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저기요~ ! ! ! ! ! ! ! ?!”

-구궁-

 

나는 문 너머까지 들리라는 생각으로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내질렀다. 안 나오고 배기겠어.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마법의 동굴이 열리듯 천천히 안의 로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진작 열어 줄 것이지. 난 다 열릴 때까지 한참 걸릴 것 같은 문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문 바로 앞에는 보초라도 서고 있을 줄 알았건만 기대와는 다르게 더럽게 넓은 로비뿐이었다.

 

뭐야, 손님이 왔는데 환대도 안 해주는 건가~모시네~실망이네~”

 

내 목소리가 넓은 로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누구라도 와보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고개 하나 내미는 이가 없다. 기분이 확 나빠지네.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로비에 있는 방들을 들락날락했다.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정말 그냥 방이었으니까. 기록하고 보호한다더니 이게 뭐야?

1층을 다 둘러보고 흥미를 잃은 나는 상승기를 타기 위해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데 상승기 옆에 자리한 하강기에서 거대한 형체의 실루엣이 비치는 것이 아닌가. , 드디어 물어볼 수 있겠어. 나는 아직 내려오지도 않은 하강기 문 앞에 서서 대기했다. 잠시 후 그 거대한 실루엣이 1층에 다다름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하강기 안에는 아까 위에서 내려올 때보다 네다섯 배는 더 커 보이는 괴이한 마물이 있었다. 건물이 엄청나게 클만하네.

 

크흠, 저기 모시네라고 아세요? 제가 그분한테 볼 일이 좀 있어서요.”

나는 최대한 예의를 차린 어투로 조곤조곤하게 물었다. 그런데 이 군데군데 알통처럼 혹이 달린 덩치 큰 마물은 필요 이상으로 달린 눈 3개를 껌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 동네는 나랑 쓰는 말이 다른가? 왜 대답을 안 해요?”

“...내가 그 모시네인데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 거지?”

디케의 도움을 받고 왔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자기가 모시네라던 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곤 바보 같은 얼굴을 하더니 제 머리에 나 있는 혹을 긁적였다. 생각보다 어리바리한 모습에 기대했던 맘이 싹 사라졌다. 대체 이런 녀석에게 뭘 맡기는 거야. 아버지도 그래. 무슨 거래를 한 거지?

 

그래, 여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믿어주도록 하지. 심부름을 온 거라면 여기 있는 기록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지나가 줬으면 좋겠어. 오늘은 나 혼자 밖에 없어서 일이 생기면 곤란해서 말이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하지만 티 없이 헤실거리는 모시네의 얼굴에선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착한 마물이나 인간은 싫다니까.

 

제가 그 녀석 심부름꾼으로밖에 안 보여요?! 전 데스 토피아의 부회장, 피스! 제 전생을 찾으러 왔다고요!”

“...피스라고? 글로미가 말한 그 아이?”

 

모시네는 눈뜨고 코 베인 거처럼 입을 쩌억 벌린다. 그러고는 황급히 하강기에 몸을 실으려 했다. 당황하는 거 보니까 역시 날 아는 모양인데……어딜 도망가려고!

 

저기요~ 저 손님으로 온 거거든요. 손님맞이 좀 해주시죠. 다과도 준비해주시고요.”

 

내가 모시네의 옷자락을 힘껏 잡아당기자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에서 속내가 다드러나는 것이 우스웠다. 나는 단체 회의실만 한 응접실에서 모시네가 가져온 다과와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 더럽게 큰 공간과 모시네를 번갈아 쳐다보니 진짜 다른 세계라는 게 실감이 갔다.

 

전생을 찾으러 왔다고 했었나?”

~ 빨리 어디에 놔뒀는지 말이라도 해봐요. 어우, 답답해!”

그건 곤란해. 너도 알겠지만 이미 너와 한참을 떨어져 있던 전생인걸. 그냥 돌아가도록 해.”

저희 아빠랑 거래한 거 다 알아요! 계속 발뺌하실 거에요? 당신이 내 전생을 숨긴 거잖아!”

 

과묵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향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그 둘이 서로 계약했다는 것뿐이었지만 모시네를 속이기 위해 당당하게 모두 아는체하며 이야기했다. 모시네는 내 압박하는 어조에 혼나는 것처럼 풀이 확 죽었다. 왜 자기가 그런 표정인 건데. 짜증 나.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네 상태에서 전생의 기억을 한꺼번에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지도 몰라.”

 

, 내가 자결할 거라고? 나에게 있어서 그럴 일은 이 마물로서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 없을 거다. 나는 어이없는 그의 발언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거만하게 그를 노려봤다. 그럼 다른 마물들은 다 죽고 없어야 하는 거 아냐?

 

피스 너는 전생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너희가 인도해주는 인간들은 전부 전생과 연관되어있어. 그게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넌 엄청난 죄악감과 절망감의 늪에 빠지게 될 거란 말이야. 특히나 케이는 네가 꽤……아끼던 녀석이었던데.”

당신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관리할 것도 많다며.”

, 그건! 내가 직접 특별히 보호했으니까. 넌 내가 기록한 그 어떤 인간들보다 불행했어. 생애의 첫 순간부터 끝까지.

6

 

 

인간에게 있어 불행한 삶이란 건 무엇일까? 억울하게 누명을 써 무기징역형을 받아 감옥에 가는 것?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휩쓸려 모함을 듣고 핍박받는 것? 아니면 내 사람을 잃는 것? 모시네가 본 내 전생 때의 인간은 얼마나 비참했기에 겹겹이 두꺼운 벽을 쌓아 내막을 가리려는 것일까. 나의 전생이 어떻든 난 목적 없는 길을 계속 걸어왔다. 그런 의문을 가진 나에게 드디어 마스터키를 손에 넣을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꼭 내 손에 쥘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한다 하여도 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갈 것이다.

 

내가 괜찮다고! 내가!”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신경 써준답시고 나에게 관여하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왜 다들 날 가만히 못 둬서 안달이야. 얼굴도 본 적 없는 내 사정을 모시네가 굳이 살펴봐 줄 이유가 어디 있다고. 모시네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 그를 처음 본다.

 

내가 말한 문제점도 있지만, 전생 봉인해제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어. 글로미와 계약할 때 그랬거든.”

그 조건이 뭔데?!”

피스, 너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르는 거야?”

아차, 실수다. 똑바로 말하지도 않는 데다가 천천히 느릿하게 말하는 꼴을 보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조급해서 섣부른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이거 책잡히게 생겼네. 하는 수 없지.

 

사실 디케한테서 아빠와 네가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용은 몰라. 걔가 직접 너한테서 들으라고 했단 말이야.”

, 디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한 거람.”

짧게 탄식한 모시네가 내 손 두 배만 한 커다랗고 투박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파트너라더니 서로 이야기도 안 나누나? 생각해보면 성격도 하는 일도 전혀 맞지 않은 둘이다.

 

좋아. 디케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 것 같네.”

뭐야? 뭘 알았다는 거야. 서로 말 안 해도 안다 이건가.’

나는 사실 글로미와 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

계약할 당시에 난 글로미가 꾸미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뿐더러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생각으로 동의했었지.

그래서 왜 파기하려고 하는 건데?”

급하기도 하지. 흐흠, 난 나중에 알게 되었어. 글로미는 불생불사하고, 영원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너를 이용하려고 이 계약을 나에게 강요했다는 걸.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았겠지.”

 

불생불사와 영원한 권력을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이야기를 가만 듣다가 뱉어지지 않는 숨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모시네의 말이 맞는다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그를 궁지로 몰아세우고 싶었다. 말 못 할 화가 치고 올라와 치가 떨려온다.

 

자세히 말해봐!! 뭘 어떻게 이용했다는 건데?! 설마 내가 모아온 령의 조각으로 자기 소원을 빈다. 이거야?”

맞아……정확해.”

왜 하필 나야?! 데스 토피아에 널린 게 마물들이야! 다른 마물도 나랑 똑같이 령의 조각을 모아서 소원을 빌 수 있는데 왜? !!!”

 

그까짓 소원 못 빌어도 그만이다. 내가 마물로 늙어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내가 쌓아온 결실들을 한순간에 제 것으로 만들려는 게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

 

글로미는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거야. 아마도 네가 대상이 된 이유는 마물 중 전생의 업이 가장 많아서 조각을 완성했을 때에 영향력이 상당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일 거야. , 소원을 빌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이야기지.”

 

괘씸하다. 어리석다. 어찌 그리도 아둔한지 머릿속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아비라는 자가 나를 양딸로 들인 이유가 고작 자신의 사리사욕 충족이라니. 결국, 난 그의 소원을 위해 사육된 가축이나 다름없다. 아니, 사육도 아닌 방목이겠지. 내 손이 분에 서려 떨려오는 것이 느껴지니 그제야 앞에 앉아있는 모시네 눈에 들어왔다.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획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모시네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글로미가 나에게 너의 전생을 봉인해달라고 계약한 일은 령의 조각을 더 죄악감 없이 빨리 모으고, 조건인 수집률 100%가 충족되었을 때에 너를 전생의 기억으로 죽게 하려는 계략일 테지. 그렇게 되면 주인을 잃은 소원은 자연스럽게 직계가족인 그가 거머쥐게 되겠지.”

 

단순히 생각하면 내가 조각 수집에 손을 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빠아니 그 자식 성격이면 케이를 억지로라도 끌고 와서 인도하게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난 내 전생이 몹시 궁금했다. 다른 마물들은 다 알고 있는 전생을 나만 모른다는 게 그저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좋지는 않을 걸 알면서도.

 

피스, 조각을 다 모으면 글로미에게 자동으로 신호가 갈 거야.”

그렇지만 내 전생을 알고 싶어.”

역시 디케 말대로 고집불통이구나.”

내가 어떻다고 그래!”

 

내가 툴툴대며 소리치자 모시네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허공에 스크린 창을 띄웠다. 그 스크린 창에는 모시네와 처음 우연히 만났던 리드마인의 로비가 보였다. 그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모서리 쪽에서 디케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디케를 따르는 케이의 모습도 스크린에 드러났다.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 와중에 디케가 얄궂게 화면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댄다. 뭐야,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건?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이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거? 꼬투리 잡을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어?”

디케가 조각을 모으지 않고도 전생을 볼 방법이 있대.”

그 방법이 도대체 뭐길래 케이가 여기로 온 거냐고?!”

케이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거든요.”

내 말과 동시에 응접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디케가 눈웃음치며 답해왔다. 나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보란 듯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 목으로 졸라매던 녀석 말을 고분고분 들어줬더니 이제는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니. 그가 무슨 생각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인간을 여기로 어떻게 데려온 거야?”

짜잔~ 어때요?”

, 너 케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문턱 너머에서 한 발도 꼼짝하지 않던 케이가 디케의 불음에 쭈뼛거리며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케이의 모습은 우습게도 마물의 모습이었다. 인간일 때와 다름없는 ?? 외모와 검은 머리였으나 머리 양옆으로 뿔이 굽어져 나고 눈에는 붉은빛이 감돌았다. 인간이 마물 모습인 것도 맘에 안 들지만 나도 없는 멋진 뿔이 나 있다니 맘에 더 안 든다. 그나저나 인간계에 있을 때는 나를 죽일 듯 달려들더니 지금은 봉인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듯 분노라는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눈앞에 있는 저 마물은 케이와는 사뭇 달랐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없는 알맹이처럼 느껴졌다.

 

, 케이가 아닌 거 아냐? 날 속일 셈인 거?”

속이다니요. 절 너무 속물주의로 보시는군요.”

근데 왜 이렇게 딴 판이야?”

귀걸이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 거겠죠.”

 

디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 귀걸이는 본래 그런 힘을 지닌 물건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부족했다. 이미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마물에 육체로 옮겨진 거라면 귀걸이가 효력을 드러낼 리 없다. 그런데 왜 저렇게

 

그래서 네가 말하는 방법이 뭔데?”

그건……

 

(null)

 

낙담한 얼굴이네요. 당신이 더 강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이겼겠죠. 분명 이길 겁니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죠?”

당신이 이길 기회를 드리는 거죠.”

터무니없는 장난치지 마세요.”

터무니없다니요. 해봐야 아는 거죠. 이번엔 그녀와 동등하고 겨뤄보는 겁니다.”

 

수호신의 말이 정답이긴 하다. 청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이긴 했지만, 그 피스 녀석에게 갚아주어야 이 희망이라곤 없는 절실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난 피스가 사라진 자리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 보자. 이대로면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더 잃을 거도 없다. 나는 수호신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호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으로 맞받아치더니 내 등을 툭 밀쳐 넘어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유체이탈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게 무슨……

 

갑자기 사람을 밀치다니 황당무계하기만 하다. 난 등을 툭툭 털어내며 한마디 하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뒤를 돌자마자 나는 당황스러워 입도 제대로 못 땐 채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난 이렇게 잘만 살아있는데 맨땅에 패대기쳐진 나를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게 일생을 살면서 경험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게 유체이탈이라고? 언제 한번 희한한 걸 좋아하는 친구에게서 유체이탈 명상 이야기를 들어봤던 것 같다. 그렇다. 말도 안 된다는 거다.

 

……죽은 겁니까? ? 죽은 거냐고요?!”

잠시 서랍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겁니다. 다시 돌려놓을 수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당신도 동의한 거로 아는데요?”

 

뭐를 말하는 것인지……대체 왜 날 이렇게 만든 거지? 설마 동등하게 겨뤄보라는 게 똑같이 죽은 자가 되라는 말이었던 건가……내가 원한 건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전개이지 않은가. 신들은 원래 이렇게 다 막무가내로 인간을 농락하는 존재인가……

 

저기,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뭘 할 수나 있는 겁니까?”

물론 할 일이 있습니다. 그저 이 게이트만 통과하시면 됩니다.”

여기를……들어가라고……?”

 

아까 정신없이 실랑이를 벌여서 뭔지도 제대로 못 봤었는데, 수호신이 다시금 그 이동장치를 만들어낸 걸 보니 딱히 어디론가 갈 것처럼은 안 생겼다. 보통 영화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건 허공에서 뾰로롱- 나타나서 이동할 반대편이 보였는데 현실에서는 짙은 보라색 독극물을 우물에 잘못 흩뿌린 듯한 비주얼이라 손끝이 닿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 와중에 보랏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오묘하게 예쁜 색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

갑자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