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윤설, 「이방인」(2020-1학기 <웹소설창작과비평>)
등록일
2020-07-10
작성자
국어국문학과
조회수
111

이방인

 

 

 

윤설

 

 

 

1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열기가 훅 끼쳤다.

얼굴에서 흐르는 차가운 액체의 느낌과 급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자 그제야 안도한 얼굴이 보였다.

창문으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빛이 없는 걸 보아하니 아직 늦은 밤이거나 새벽일 거 같은데 누나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싶은 생각해 퉁명하게 말이 나갔다.

 

왜 깨워

인혁아. 시간 없어. 누나 말 잘 들어.”

뭐야. 무슨 냄새야?”

 

매캐한 연기가 코로 들어오자 느리게 깜빡이던 눈을 크게 떴다.

내 코와 입에 물에 젖은 옷을 대주는 누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금 집에 불이 났어. 얼른 나가야 돼

?”

얼른 일어나. 얼른!”

 

이불을 젖히며 내 팔을 잡아끄는 누나를 따라 일어서자 창문 밖으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달빛이 이 상황과 안 어울리게 더럽게 예뻤다.

누나의 떨리는 손을 잡고 방문으로 나가자 불길에 타고 있는 복도에 놀라기도 전에 누나가 급히 팔을 잡아끌었다.

나무로 된 계단이 삐걱 커다란 소리를 냈다. 어두워 앞이 잘 안 보여 계단 난간을 잡자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거움에 소리를 질렀다.

 

!”

아무것도 잡지 말고 누나 손만 잡고 따라와

누나... 엄마랑 아버지는?”

일단 나가자. 나가야 해

 

누나는 떨리는 손과 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날 이끌었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몇 계단 내려갔을까 앞이 환해지더니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한 분위기의 거실이 온통 새빨간 불투성이었다. 현관문 쪽인 곳은 불길에 갇혀 보이지 않았고 누나는 주방 쪽 쪽문으로 나갈 생각인지 주방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도 주변을 살피자 주방에서도 불길이 휩싸여 식탁이 불타고 있었고 누나가 멈칫하며 날 돌아봤다.

 

싱크대를 넘어서 가야겠다. 벽 쪽으로 붙어

 

누나의 말에 벽 쪽으로 붙어 불타는 식탁을 피해 싱크대 쪽으로 가 넘어가자 또다시 굉음이 들리며 거실 쪽 불길이 거세지는 게 보였다.

 

인혁아, 이쪽!”

 

주방 쪽문을 열고 내 팔을 잡아끄는 누나를 따라 나가자 매캐한 공기가 아닌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가득 들어찼다.

몇 번 크게 기침하다가 젖은 옷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차고로 가자. 차고에는 아직 불이 안 붙었을 거야

누나 엄마랑 아버지.”

정신 차려. 누나 말 들어

 

억지로 잡아끄는 누나의 팔을 뿌리치자 누나가 순간 휘청했다.

날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두웠던 것 같다.

엄마랑 아버지는 어디 있냐는 질문에 누나가 들고 있던 옷을 던지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단 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까 멀리...”

엄마랑 아버지도 집 안에 계실 거 아냐! 안방에 계실 테니까 내가 들어가서...”

멍청아! 이 불을 낸 게 엄마랑 아빠야!”

?”

엄마랑 아빠가 불을 냈어. 어차피 들어가 봤자 우리만 죽어

누나 그게 무슨.”

멍청하게 묻지만 말고 움직여. 불에 타 죽고 싶어?”

 

누나에 냉정한 말에 울컥 눈물이 솟기도 전에 집에서 한 번 더 굉음이 터지더니 주방 쪽 쪽문에도 불이 붙은 것인지 열기가 느껴졌다.

다시 내 손을 잡은 누나의 손에 이끌려 집 옆에 있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차고로 들어가자 누나가 아빠의 차에 타면서 소리쳤다.

 

얼른 타!”

 

지금 나는 누나의 말에 따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에 타자 누나는 내가 문을 닫기도 전에 시동을 걸며 출발했고 나는 갑작스레 출발하는 차 탓에 문을 서둘러 닫으며 말했다.

 

누나. 엄마랑 아버지가 왜.”

누나 말 잘 들어. 도인혁.”

 

누나가 잔뜩 그을린 옷소매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는 웃기게도 그 순간에 항상 불안하기만 하던 누나의 운전 실력이 생각나 걱정이 들며 안전밸트를 매며 누나를 쳐다봤다.

 

엄마랑 아빠가 집에 불을 냈어.”

...?”

몰라. 물 마시러 주방에 내려가는데 이미 거실에서 불이 났었어. 엄마는 라이터를 던졌고 아빠는 소파에 앉아 있었어.”

 

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게 진실이 맞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누나가 말을 이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차가 계속해서 덜컹덜컹 흔들리는데도 누나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아빠가 순식간에 불에 타올랐고 소리를 질렀어. 엄마는 휘발유 통을 들고 안방으로 달려갔어. 내가 아빠랑 엄마를 부르려는데 순식간에 안방에서도 불길이 치솟는 게 보이면서 엄마가 나오더니 2층 계단 위로 라이터를 던졌고 2층 복도에도 불이 붙었어.”

엄마가. ...?”

난 널 데리러 갔고 네가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협탁에 있던 물을 니 얼굴에 부은 거야.

그리곤 널 데리고 나온 거고. 이제 알겠어?”

 

결국 뚝뚝 얼굴을 타고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누나가 차를 멈추더니 나를 꽉 껴안았다.

 

괜찮아.”

 

누나의 괜찮다는 말에 안심했던 건지 아니면 거짓말 같은 상황이 어이없었던 건지 한참 동안 울었다.

누나가 차를 출발시키고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멀리 불길에 활활 휩싸인 게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혁아. 일단 시내로 가자.”

경찰. 아니 119?”

가서 하자. 핸드폰을 못 찾았어. 전기도 나가고 너 깨우는 게 급해서.”

누나 괜찮아?”

 

그러고 보니 누나의 손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더 크게 덜컹하는 차 탓에 안전밸트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괜찮지 않지만. 우리는 앞으로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누나가 울음으로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위로라고 건넸던 말이 퍽 내겐 위로가 됐다.

그 말에 진짜 앞으로 괜찮아질 것만 같아 나는 안심해 불안한 운전실력을 가진 누나 옆에서 잠이 들었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던 건 커다란 아픔이 찾아왔을 때였다.

그 아픔과 동시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눈을 뜨자 누나가 내 눈앞에 있었다.

 

“...인혁아 괜찮아?”

머리가 너무 아파...”

니 탓 아니야. 알았지?”

누나...?”

 

어두운 차 내부에서 날 끌어안은 건 누나고 내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으며 누나의 몸이 점점 차가워진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꼭 살아

무슨 말을.”

꼭 잘 살아.”

 

그 말을 끝으로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점점 머리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시뻘건 불과 검은 어둠이 아닌 새하얀 천장의 병원이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나는 일주일이나 잠들어 있었고 내가 일어났을 때 이 세상에서 내 가족은 없었다.

 

 

2

 

 

야 도인혁!”

“......”

 

거세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인혁이 눈을 뜨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종범의 얼굴이 보인다.

 

너 여기서 잤냐? 뭘 그렇게 끙끙 앓아대면서 자?”

아침이야?”

. 너 진료실에 없길래 혹시나 해서 숙직실 와봤더니... 왜 여기서 자? 아버지가 집 구해줬다며.”

아직 인테리어 공사 중이래서 며칠만 숙직실에서 자고 있어. 형은 병원에 무슨 일이야?”

 

인혁이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구겨진 셔츠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묻자 종범이 어깨를 으쓱한다.

 

재단 일로 아버지랑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그나저나 아직도 예전 일로 꿈꾸고 그러냐?”

가끔 그래. 컨디션 안 좋을 때.”

이건 뭐. 정신과 의사가 자기 멘탈도 관리 못 하는데 VIP들 진료를 믿고 맡길 수 있겠냐?”

 

종범이 이죽거리며 놀리자 인혁이 픽 웃는다.

 

여기서 제대로 진료를 보러 오는 환자가 몇이나 된다고. 호텔인지 병원인지 구분 못 하고 눌러앉는 나이롱환자를 한국에서 VIP라고 부르는 거 기가 찬다 아주.”

그 나이롱환자들 덕에 병원이 좀 쏠쏠하거든.”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전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인혁이 가운을 입기 전 종범이 일단 아침부터 먹자며 숙직실 밖으로 끌고 나간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문자를 보내는 인혁에게 종범은 잔소리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멘탈관리 몸 관리 잘해. 뭘 한국 들어오자마자 바로 병원에 나온다고 그래. 좀 쉬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넌 너무 너 생각을 안 해. 남의 얘기 들어줄 시간에 너 먼저 챙겨. 알았냐?”

잔소리는. 알았어.”

*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부는 서인 대학교 법학관 앞에 선 이주가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강의실 문을 열자 한창 강의에 집중하던 학생 몇이 뒤를 돌아본다. 재빠르게 정아의 옆에 앉으며 책을 내려놓자 정아가 팔을 툭 친다.

 

나이주 오늘도 지각이야.”

사건이 터져서 그랬어.”

오늘은 뭔데?”

토막살인.”

“...그걸 뭘 먹으면서 입에 담는 너가 참 존경스러워. 알아? 이건 뭐 비위가 좋은 건지 아니면 너무 봐서 익숙한 건지.”

 

이주가 짧게 웃으며 강의에 집중한다.

곧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강의실에서 이주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려 인터넷에 접속한다.

이미 비슷한 제목의 기사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인뉴스 페이지에서 아무거나 클릭한다.

 

연주시 여대생 연쇄 토막살인사건 범인 유모 씨 검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주시에서 여대생을 12명이나 잔인하게 토막 살인한 범인 유모 씨(32)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범인 유모 씨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며 13번째 살인을 저지르려 연주시 백화 역 일대를 돌아다니던 중 잠복수사 중이던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혔습니다.

유모 씨의 검거를 담당한 부일 중앙지방경찰청 긴급수사팀은...-

 

기사를 무심한 얼굴로 읽어내리는 이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정아가 웃는다.

 

오늘도 한 건을 막아냈네. 자랑스럽다 나이주.”

자랑은 무슨. 빌어먹을 이놈의 예견은 꼭 등교하는 길에 나타나지. 내 제적은 누가 막아주나.”

 

이주가 일어나며 가방을 챙기자 정아도 일어나 함께 강의실을 나선다.

학생들이 북적이는 건물을 빠져나와 3월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자 학생들 몇이 이주를 보며 쑥덕거린다.

 

“...쟤가 그...”

“...왜 우리 고등학교 때. 뉴스에서....”

“....예견이란게 진짜 되는 거야? 그냥 사기 아니야?.....”

 

저들끼리 소곤댄다고 목소리를 낮췄지만,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내용에 정아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모여있는 학생들을 째려본다.

매서운 눈초리에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이 조용해지자 이주가 한숨을 내쉬며 정아의 팔을 잡아끈다.

 

아 왜!! 저것들이 너를 뭔 사기꾼 취급하면서 그러는데 넌 그걸 참고 있냐?”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겠지.”

넌 참 참을성도 좋다. 나 같으면 당장 가서 머리채 잡았어. 넌 뭐 보고 싶어서 보냐고!”

내 빌어먹을 능력이 여러 사람 화나게 하네. 박정아씨 좀 참으시구요. 저는 이만 들어갑니다.”

 

저를 대신해서 화내는 정아를 익숙하게 말리며 이주가 교정을 가로질러 간다. 정아는 화를 내면서도 이주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교문 앞에 있는 학생들이 연주시 토막살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정아가 조금 진정이 되는지 심호흡한다.

 

아까 그것들한테 말해줬어야 해. 연주시 토막살인범을 누구 덕에 잡았는지.”

 

이주가 그만하라며 웃으며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에서 팔을 들어 올린다.

 

뭐야. 저녁 같이 먹자며?”

경찰서 들어가 봐야 돼. 이번에 본 게 좀 많아서. 진술서 작성하러.”

 

제 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올라타 창문을 열고 정아에게 손을 흔드는 이주.

정아는 투덜거리다가도 조심해서 가라며 인사한다.

 

예견하고 예언하고 현장 가고 진술서 쓰고. 아주 경찰보다 바쁘지?”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능력께서 이번엔 좀 많이 귀찮게 하네.”

*

부일 중앙지방경찰서 앞을 지나쳐 가는 택시 안에서 이주가 소란스러운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평소와는 달리 꽉 찬 주차장과 기자인 듯 방송사 로고가 적힌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과 주변에 무수히 많은 카메라에 이주가 한숨을 쉬며 택시 기사 쪽으로 몸을 가까이한다.

 

기사님. 이쪽 말고 뒤로 돌아 가주시겠어요? 다음 골목에서 우회전이요. 거기서 내릴게요.”

아이고. 그 뭐야 토막살인범 때문에 저 난리인 거야? 아주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네. 저게 뭐야.”

 

사람이 거의 없는 쪽문이 있는 곳에서 내린 이주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간다.

긴급수사팀이라고 명패가 적혀있는 곳으로 들어가 자연스레 인사하자 낡은 점퍼를 입고 경찰 제복을 손에 든 건일이 손을 들어 흔든다.

 

나이주! 왔냐?”

. 밖에 난리던데요.”

기자들 많지? 뒤쪽으로 왔어?”

그쵸. 괜히 사진 찍혀서 또 무슨 소리를 들으라구요. 사건브리핑 서 팀장님이 해요?”

. 취조 다 끝났고 범인은 바로 송치했다. 워낙 증거가 많아서 속전속결이었지.”

저 진술서만 작성하고 바로 들어갈게요. 아무튼, 브리핑 잘하세요. 저는 이만 진술서 쓰러 갑니다.”

어 그래. 지금 회의실 비어있으니까 거기 가서 해.”

 

이주가 알겠다며 박 경사와 함께 회의실로 가자 건일의 옆에 있던 김 경사가 재촉한다.

 

팀장님 브리핑 30분도 안 남았습니다. 그 전에 좀 씻고 옷 좀 갈아입으세요! 그 잠바 뙈기 입고 카메라 앞에 서실 건 아니죠? 노숙자인지 형사인지 구분도 못 하겠네.”

알았다 알았어. 지금 씻으러 간다고!”

 

*

이주야. 진짜 안 데려다줘도 괜찮겠냐?”

박 경사님. 아직 8시도 안 됐어요. 이 앞에서 손만 흔들면 잡히는 게 택시인데 뭐 하러요.”

하이고야. 그래도. 기다려봐라. 곧 브리핑 끝나면...”

그럼 기자들도 나오겠죠. 그 전에 빨리 갈게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주가 빠르게 인사를 한 후에 긴급수사팀을 빠져나온다.

뒤에서 데려다준다고 소리치는 박 경사에게 대충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부일서를 벗어난다.

기자들은 모두 브리핑 장소로 들어가 휑해진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이주가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빨리한다.

그때 이주의 시야에 자신의 운동화가 아닌 검은색 구두가 들어온다.

정확히 제 운동화와 세 걸음쯤 떨어져 있는 위치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상대와 눈이 마주친다.

 

반갑습니다. 나이주씨.”

“...누구세요?”

그 쪽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하세요.”

“16년 전 신일동에서 일어난 화재사건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주가 알만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앞에 서 있는 인혁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기자는 아닌 것 같고 피해자 유족이나 가해자 유족일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이주가 깔끔하게 인혁을 피해 걷는다.

단숨에 제 옆을 지나가는 이주에게 다급히 따라붙으며 인혁이 질문을 던진다.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사실 그때 사망한 부부의...”

기억 나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귀찮게 구실 거면 다음엔 저기서 만나게 될 테니까.”

 

이주가 턱짓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경찰서를 가리키고는 멈추어 서 있는 택시에 올라타 쾅 하고 문을 닫는다.

무어라 말하려는 인혁의 목소리는 두꺼운 차 문에 닫혀 들리지 않고 곧장 출발하는 택시 창문 너머로 점차 인혁의 모습이 멀어져간다.

시트에 등을 기대며 이주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는다.

*

나이주씨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

그때 당시에 나이주씨가 만났다는 형사는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

정말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때 봤다는 거 아무거나 저한테...”

아 정말 사람 귀찮게 하네.”

 

이주가 아침부터 제 옆에 붙어 질문을 던지는 인혁을 쳐다본다.

제 학교는 어떻게 알았는지 정문에서부터 오분이 넘게 졸졸 따라다니며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기에도 한계가 와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과 귀찮음을 담고 바라보자 인혁이 고개를 숙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주일을 잠들어있어 장례도 못 치르고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사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라도...”

그쪽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건 듣기 싫고요. 왜 따라다닌 건데요. 기억하는 게 궁금한 거에요? 안나요. 기억 못 한다고요.”

나이주씨가 예견한 첫 번째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사건 기사들은 모두 가지고 있어요. 한 번만 더 기억을 더듬어 줄 수는 없습니까? 제겐 정말 인생이 변화한 일입니다.”

 

이주가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계속 걸음을 옮겨 법학관 건물 뒤쪽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이주를 따라가며 제 이야기를 하는 인혁은 이주가 걸음을 멈추자 세 걸음쯤 뒤에 떨어져 이주를 바라본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이주가 사람이 없자 팔짱을 끼며 말한다.

 

이보세요. 나는 그쪽이 찾은 대로 16년 전에 누군가의 사건을 예언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난 그 후로도 아주 많은 사건을 예언했고 세상은 그런 날 신기해했고 기사에 올리고 내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거 같아요?”

“......”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을 예언하면서 경찰청에 정식으로 수사 협력 공문을 받았고 긴급수사팀이라는 부서도 신설됐어요. 나는 그때부터 내가 예견하는 것들을 국가를 위해 말해야 했고요. 그 이후로 가해자들은 범죄를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내가 저지를 거라고 예언해서 체포된 사람들도 수두룩 빽빽이 에요. 초반엔 그 사건을 전부 세상에 알렸는데 그러면서 나에 관한 관심은 증가했고 나는 원망의 대상이 됐어요.”

 

인기척이 들리자 이주가 입을 다물었고 곧 골목 너머 무리 지어 지나가는 학생들이 보인다.

저들끼리 크게 웃으며 지나가자 곧 다시 조용해진다.

 

체포된 가해자들의 부모는 나에게 찾아와 우리 애는 그럴 리 없다고 위협했고 내가 예언하지 않은 사건 피해자들의 주변인들은 내게 왜 예언을 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했죠. 심지어 내가 예언하지 않은 사건의 가해자들의 부모는 내가 예언하지 않아 본인 자식이 사건을 저지른 거라 했어요. 이제 이해돼요? 나는 언론에 나오면서 그쪽 말고도 아주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어요. 근데 내가 그쪽 사건을 기억해야 해요?”

전 단지 그날 나이주씨가 본 게 궁금한 겁니다. 나중에라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실 순 없습니까? 이건 제 명함인데 언제든지...”

그쪽 인생이 변화한 일을 내가 예견해서, 그래서 나한테 책임을 지라는 건가요?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바라지마세요. 그 무엇도 해줄 마음도 의무도 내겐 없으니까.”

 

더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주가 자리를 피하자 인혁이 답답한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떠난다.

*

커다란 창문을 빗방울이 거세게 때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연스레 이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늦은 밤이지만 불이 켜진 도시가 보이고 그 위로 세찬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다 제 마음만큼이나 어지러운 책상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수업을 마치고 법학관을 빠져나가는 이주에게 다가와 애원하며 귀찮게 구는 인혁을 억지로 떼어내고 집으로 향하는데 인혁이 제 명함과 함께 서류 봉투를 떠넘기듯이 안겨주었다.

책상 위에 잘못 내려놓은 것인지 내용물이 쏟아져 나온 봉투를 치우며 이주가 한숨을 쉰다.

 

진짜 귀찮게 하는 사람이네.”

 

원래 올려져 있던 제 것과 인혁이 주었음이 분명한 오래된 뉴스 기사가 프린트된 종이를 구분하며 이주가 무심한 얼굴로 손을 움직인다.

무심코 들어 올린 종이에 적힌 기사 제목에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칫한다.

그리고는 제 것이 아닌 서류가 가득 찬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서 이주가 종이를 몇 장 더 들어 올려 빠르게 읽기 시작한다.

 

“...이게 뭐야.”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들고 있던 뉴스 기사를 내려놓는 이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있다.

*

그래서. 16년 전에 니가 처음으로 예견한 사건의 피해자 아들이 찾아왔다고?”

.”

뭐 간혹가다 있는 일이긴 한 데 16년 전이면 너무 옛날 아니냐. 일단 신변 보호 단계 강화할 테니까...”

 

어제 빼먹은 부분이 있으니 다시 경찰서로 오라는 건일의 부름에 아침 일찍 수사팀에 온 이주가 진술서를 적어 내려가며 한숨을 쉰다.

 

서 팀장님. 내가 언제 자살을 예언한 적 있었어요?”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 사건이 자살로 종결 났더라고요. 애초에 외부 흔적이 없었대요.”

잠깐만. 그게 무슨. 이주 니가 본 사건은 맞아?”

“...맞아요. 처음으로 예견한 사건이라서 기억하고 있거든요.”

 

건일이 먹던 빵을 내려놓고 이주를 바라보자 서류 가장 아랫부분에 제 사인을 새겨넣으며 이주가 대답한다.

 

난 사람의 죽음을 예견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보는 것들은 모두 범죄고요. 사고나 자살은 범죄가 아니에요.”

 

이주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자 낮은 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린다.

한참을 그렇게 건일과 이주가 대화 없이 앉아있다. 이주가 제 머리를 쓸어넘기며 건일을 바라보며 혼란스레 묻는다.

 

그럼 내가 본 그건 뭐였을까요?”

 

3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럴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밤에 비 온다니까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이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건일의 차에서 내린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이주가 이내 자취를 감췄을 때서야 건일의 시선이 떨어진다.

곧 건일이 홀로 탄 차가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다.

-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침대 밖으로 불쑥 하얀 팔이 나와 협탁을 더듬는다.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고 계속해 들리는 소음에 이주가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을 차내며 핸드폰을 줍기 위해 바닥을 휘젓는다.

벨 소리가 멈추자 이주가 부스스한 머리를 털며 고개를 들어 창문을 확인한다.

 

뭔 비가 저렇게 온대

 

반쯤 열어놓은 창문 탓에 창문 앞 바닥이 흥건히 빗물에 젖어있자 이주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다시 벨 소리가 울린다.

허리를 숙여 차가운 핸드폰이 손에 잡고는 창문을 닫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다.

때마침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이주의 팔로 날리자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전화를 받는 이주.

 

여보세요?”

나이정씨 보호자분 맞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났나요?”

 

이주가 졸음이 가득했던 눈 대신 불안한 기세를 눈 안에 담으며 꽉 잠겨있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새벽 4시라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곤 이주가 다급히 묻는다.

 

이정이 상태가 안 좋은가요?”

아뇨. 나이정씨 삼촌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요. 신분 확인 차 보호자분께 전화를 드린 건데...”

삼촌. 이라니요. 그런 거 없어요. 누구도 만나게 하지 마세요!!!”

하지만 가족관계 증명서를 제출하셔서요. 일단 면회를...”

그런 거 없다구요! 가족은 나 하나인데 무슨 삼촌! 그 사람 이름 뭔데요? 전화 바꿔봐요!!”

 

이정이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어두운 방 안 화장대를 더듬어 지갑을 찾는다.

지갑을 들고 화장대 의자에 올려둔 외투를 들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넘어온다.

 

[오랜만이야]

 

귓가에 댄 핸드폰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자 이주의 손에 들린 지갑이 툭 하고 떨어진다.

떨어진 지갑을 줍지도 못한 채 발에 못이 막힌 것처럼 서 있는데 눈동자가 속절없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탓에 잠시 비틀거린다.

 

[이정이 데려가고 싶은데. 직계가족이 아니라도 가능하다고 해서]

어떻게 거기에...”

[우리 이정이 많이 컸더라. 그땐 엄청 작은 꼬맹이였는데 어느새 숙녀가 다 됐어.]

 

이정이 건드리지 마!!!”

 

이주가 새된 비명을 지르자 반대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들린다.

얇은 반팔티를 입고 있어 하얗게 드러난 이주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성열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넘어온다.

 

[이야 우리 이주 너무하네. 삼촌한테 누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

누가 삼촌이야. 너 당장 나가. 우리 이정이한테서...!!!”

[화나게 하지 마. 나이주. 삼촌 화나면 아주 무서워. 알지?]

 

킥킥하고 한 차례 더 웃음소리가 들리자 이주가 손바닥 흥건하게 땀이 배어 나옴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자 바닥에서 차가운 냉기가 뜨거운 몸에 스며들며 참을 수 없는 한기를 만들어내 이주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곧 만나자. 너도 이정이도]

그게 무슨...!!!”

[아주 많이 보고 싶었거든. 너희 두 사람]

나랑 얘기해. 나한테만...!”

 

전화가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짧은 벨 소리가 울린다.

여자가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이 한 장 전송되더니 곧바로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한다.

 

[이정이가 위험하네.]

 

[지켜야지. 니가.]

 

[뛰어. 그때처럼]

 

이주가 속절없이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고 곧이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한마음 요양병원입니다]

. 나이정 보호자인데 우리 이주는요?”

[, 나이정씨 보호자분! 방금 삼촌이란 분이 그냥 나가셨어요. 나중에 다시 오시겠다고.]

이정이 상태는요? 괜찮나요?”

[. 평소와 다른 거 없습니다.]

. 지금 갈게요.”

 

*

언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왜 언니 사는 데로 가자는 건데?”

여기 병원이 너무 멀어서 너 케어하기 좀 그러니까. 그리고 너도 계속 서울 올라오고 싶다며.”

그건 3년 전부터 계속 그랬구요. 근데 왜 지금 와서 들어주는 건데. 수상해 나이주? 오늘만 해도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오고! 내가 일어나자마자 언니 봐서 얼마나 놀랐는데!”

 

침대 위에 앉아 쉼 없이 종알거리는 이정과 달리 이주는 커다란 가방에 착착 짐을 담기 시작한다.

병실 안으로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의사가 이주를 보곤 가볍게 눈인사하곤 이정에게 말을 건다.

 

이정이 드디어 시골 탈출이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그럼 뭐해요. 어차피 서울 가도 맨 병원에 있을 텐데.”

얼씨구. 아까는 서울 간다고 병원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 자랑하고 다니더니?”

 

이정이 입술을 삐죽이며 못 들은 척 하자 이주가 옷장에 걸린 옷을 건넨다.

 

갈아입고 와. 의사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고 있을게.”

알았다고 알았어. 쌤 뭐 이상한 얘기 같은 거 하지 마요! 내 욕 같은 거!”

 

이정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이주가 닫힌 문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쉰다.

의사는 옆구리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건네며 미간을 좁힌다.

 

이정이 진단서랑 약물 처방전입니다. 요즘 들어 발작이 좀 잦아서 병원 옮기시는 건 추후 안정된 후에 하셨으면 하는데...”

신경 써주시는 건 감사한 데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제 눈에 닿는 곳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당장 서울 가는 거 많이 위험한가요?”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이 크니까요. 다만 서울에선 여기처럼 조용한 요양병원은 찾기 힘드실 것 같은데. 알아두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아니요. 이제 조용한 곳 찾을 필요 없어요.”

 

*

언니. 나 그럼 병원 어디로 다녀? 통원치료야?”

최근에 발작 잦아서 통원은 좀 더 생각해보자. 일단 입원 치료로 하고.”

나 괜찮은데...”

 

이정이 툴툴대며 버스 밖을 바라보자 이주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이정의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언니가 방학이면 괜찮은데 지금 학기 중이라서 너 케어하기가 좀 그래. 방학하면 통원 치료받자. ?”

알았어. 나 애 아니니까 그렇게 달래줄 필요 없어. 오히려 서울 가면 언니랑 자주 보니까 좋은데?”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서 팀장님이 너 온다니까 고기 사준다는데. 저녁엔 팀장님이랑 먹자.”

우와 고기! 서 팀장님은 잘 지내셔? , 그럼 나 언니 집 갔다가 거기 근처에 와플 집 가고 싶어. 저번에 딸기 올라간 거 먹고 싶었는데 시즌 과일이라서 안된다는 거야! 근데 지금은 될 거 같아서...”

 

이정이 혼자 종알거리면 실없는 이야기를 할수록 날 서 있는 이주의 신경이 느슨해지고 입가에 미소를 매 단 이주를 확인한 이정이 방긋 웃는다.

 

언니. 난 언니가 내 언니라서 진짜 좋아.”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냥. 아 그러면 서울 가자마자 일단 언니집 가서 씻고 서팀장님 보는거지?”

그래. 그렇게 하자.”

*

나이정? 너 화장실에서 뭐 하는데 안 나와! 온종일 씻어?”

 

이주가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리며 이정을 재촉한다.

그때 거실에 올려둔 이주의 핸드폰이 벨 소리를 내며 울리자 문을 한 번 더 노크하고는 밖으로 향한다.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건일에게서 온 메시지가 뜬다.

 

[회의 좀 늦게 끝날 것 같아서 10분쯤 늦을 것 같다. 아파트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그때 내려와]

 

그나저나 얘는 언니 말을 어디로 듣는 거야. 나이정! 너 진짜 빨리 안 나올래?”

“......”

한 팀장님 30분쯤 후에 오시니까 얼른 준비해야지!”

 

이주가 문을 쿵쿵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화장실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댄다.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는 것과 달리 이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주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안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나이정? 이정아 대답해봐. 이정아!”

 

이주가 문고리를 잡아당기지만, 안쪽에서 잠긴 문이 열리지 않고, 급하게 거실로 뛰어나가 서랍을 열기 시작한다.

열쇠를 찾는 이주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곧 화장실 열쇠를 찾고는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나이정. 언니 들어간다?”

 

문을 열자 욕조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정과 샤워기가 바닥에 엉켜있다.

몸을 잘게 떨며 발작하는 이정의 모습에 이주가 다급히 다가가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이정아! 나이정! 정신 차려. 언니 여기 있어. 구급차. 119... 나이정!!!”

 

이주가 핸드폰을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이정이 크게 발작을 일으킨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의 화면이 켜진다.

 

[곧 만나러 갈게]

 

성열이 보낸 것이 분명한 메시지와 이주와 이정이 함께 요양병원 바깥으로 나오는 사진이 화면에 떠있다.

이정의 발작 원인을 찾음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함과 두려움이 이주를 휩싼다.

 

*

나이주씨?”

왜 그쪽이 여기서...”

선생님. 이분이 나이정씨 보호자세요.”

“....”

 

병실 안 잠든 이정의 손을 잡고 있던 이주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인혁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간호사가 인혁에게 차트를 넘기자 이주의 눈이 빠르게 두 사람을 번갈아 훑는다.

 

그리고 이건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 떼어오신 진단서랑 약물 투약 처방전인데 아무래도 입원 치료가 필요하신데 지금 우리 병원엔 TO가 없어서요. 근처 다른 병원으로 후송조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보호자분은 따로 저랑 얘기하시죠.”

 

이주와 인혁이 마주 보고 앉아있는 인혁의 연구실 안.

인혁이 진단서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까 간호사한테 들었겠지만, 현재 1인실이 공실이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후송조치 해드릴게요. 우선 오늘은 8인실에 있다가...”

“...여기 병원이 좋은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

근처 다른 대학병원에 공실이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연결...”

아뇨. 경찰서가 인근 5분 이내에 있었으면 하는데 그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여기뿐이에요. 언제 TO 나는지 알 수 없을까요?”

 

인혁이 잠시 이정의 진단서와 차트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차트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일정한 소리가 나고 이주는 불안한 듯이 두 손을 꼭 부여잡는다.

 

“....도와드릴게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쪽이 원하는 게 제 능력이잖아요. 제가 그날 뭘 보고 뭘 기억하는지. 제 예견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 날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예요.”

4

 

 

잠시만요. 살인이라니요? 나이주씨 제 부모님은...”

“16년 전 1225일 신일동에서 일어난 별장 화재에서 죽은 부부. 그날 그 별장에서 살아나간 사람은 당신이랑 키 큰 여자. 머리는. 한 이 정도 길이였던 것 같은데.”

 

이주의 손이 길이를 가늠하듯 움직이다 제 가슴께에서 멈춘다.

인혁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범인까지. 단 셋뿐이에요.”

아니요. 나이주씨 제 부모님은 자살하신 겁니다. 경찰에서 사인이 그렇게 나왔고 저는 단지 두 분이 그런 선택을 하기 전에 당신이 뭘 봤나 해서 그쪽을 찾아다닌...”

난 사람의 죽음을 예견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는 것들은 모두 범죄고요. 사고나 자살은 범죄가 아니라구요.”

 

인혁이 들고 있던 차트를 소리가 나게 책상에 내려놓는다.

이주가 차트 위에 선명히 적힌 이정의 이름을 보고는 입술을 말아 문다.

 

누나가 부모님이 불을 내는 걸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찰 조사에서도 외부인의 흔적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살인이라고 확언하는 거죠? 내가 그쪽 뭘 믿고 그걸 들어야...”

그럼 내가 예견을 하는 건 어떻게 믿을 건데요. 나는 내가 본 것만 말해요.”

“......갑자기 왜 태도를 바꿨습니까? 이전에는 알려줄 마음도 의무도 없다면서요.”

여전히 의무는 없어요. 단지 협력을 바라는 거에요.”

 

이주의 손가락이 이정의 차트 위를 짚는다.

 

도인혁씨가 이정이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최대한 나도 도인혁씨한테 협력할게요.”

나이주씨가 내게 협력한다면 나는 뭘 얻는 겁니까?”

당신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찾을 수 있겠죠.”

 

자신을 바라보는 올곧은 이주의 시선에 인혁이 잠시 책상 위에 둔 가족사진으로 향한다.

어린 티가 나는 교복을 입은 자신과 그 옆에 서 웃는 것 인해.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부모님까지.

인혁이 굳은 얼굴로 이주를 향해 입을 연다.

 

*

언니? 뭐 하고 있는 거야?”

“......”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있길래 거기다 물을 부어?”

 

이주가 들고 있던 물통과 접시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짓는다.

이정이 툴툴대며 협탁에 놓인 휴지를 뽑아 건네며 접시를 이주의 손에서 받아든다.

 

물 두 번 달라고 했다간 접시가 아니라 나한테 물 붓겠네.”

그냥 둬. 내가 치울 테니까...”

혹시 뭐 또 봤어? 그래서 그런 거야? 서 팀장님한테 전화할까?”

 

이정이 커튼을 치며 주변 환자들을 슬쩍 보곤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이주가 나붓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근데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그냥. 어제 본 게 좀 뒤숭숭했어.”

이번엔 뭐 봤는데? 연쇄? 토막? 아니면 그냥 살인?”

넌 무슨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 남들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해.”

 

이주가 그만하라며 이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때 건일에게서 전화가 오자 이주가 잠깐만 하곤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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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가 이정의 침대 커튼을 열자 텅 빈 침대가 보인다.

다급히 병실 밖으로 나가 간호사의 팔을 붙잡고 이주의 행방을 묻자 의아한 낯을 하곤 간호사가 대답한다.

 

나이정 환자분. 상담 치료 시간이에요.”

상담 치료요?”

입원하실 때 발작 증세 심하게 오신 것 때문에 다른 병원 가실 때 진단서 필요하실 거라고, 상담 짧게 진행하신다고 하셔서 조금 전 상담실까지 동행해드렸어요.”

 

이주가 상담실의 위치를 묻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

“...얼추 상담 시간이 다 되었네요. 뭐 따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있습니까?”

. 근데 선생님. 저희 언니한테는 저 나아지고 있다고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이정의 말에 무언가를 적던 인혁이 멋쩍게 웃는 제 앞의 환자를 쳐다본다.

환자복 위에 어설프게 두른 카디건은 이 전날 이주가 입고 있던 것이었다.

 

언니가 제 걱정이 좀 유별나서... 일도 안 하고 자꾸 저한테만 붙어있으려고 하잖아요. 언니도 자기 인생이 있는데...”

환자분 처방에 대한 거짓말은 보호자께 전달해드리기 어렵겠습니다만.”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점차 나아지고 있다구 금방 나을 수 있다구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이주씨가 그걸 믿겠습니까?”

 

인혁의 입에서 나오는 이주의 이름에 이정이 눈을 크게 떴다가 가늘게 좁힌다.

 

뭐에요? 우리 언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 혹시 제 미래 형부?”

나이주씨 능력에 도움. 받은 사이죠.”

우리 언니가 경찰 말고 의사랑 관련이 있는 사람인 건 처음 알았네. 어쨌든 그럼 성격도 잘 아시겠네요. 사람이 엄청 칼 같은데 알고 보면 좀 여려요. 그 능력 때문에 되게 많이 힘들어하기도 하구요.”

 

이정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자 인혁이 책상 위에 놓아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잠시 후 시계를 흘긋 보고는 이정에게 묻는다.

 

언니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나이정 환자는 아무렇지 않은가 보네요.”

뭐가요? , 그런 거 보고 그러는 거 이상하지 않냐 그런 거에요? 지금?”

그렇죠. 보통은 꺼리니까요.”

참나 울 언니가 그 능력 팔아서 번 돈으로 내 병원비 내주는데 그런 능력이 있다고 내가 언니 꺼리는 게 더 이상해요. 능력이 있든 없든 나이주는 제 언니잖아요. 뭐 어때요. 그럴 수도 있지.”

기특하네요.”

그리고 언니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거 아니니까요. 누구 죽는 거 보는 게 뭐 좋겠어요. 하루하루가 고통이지. 그래도 나 때문에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주에게 말 좀 잘해달라며 이정이 배시시 웃는다.

인혁이 상담실 밖으로 나가는 이정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책상 위에 올려둔 액자를 집어 든다.

 

*

사건기록서를 열람하게 해달라는 건 알겠는데 16년 전이면 너무 옛날 아니냐? 도대체 뭐가 보고 싶은 건데?”

“1225일 날 일어난 신일동 별장 화재 사건이요.”

스읍- 기다려봐라. 너무 옛날 자료기는 한데. 아 있네. 자료보관실에 있단다.”

 

곧 손에는 얇은 파일철을 든 박 경사가 이주의 앞에 서서 묻는다.

이주가 파일을 받아들고 안에 적힌 사건기록서를 빠르게 훑는다.

 

어제 본 건 연쇄라며. 이거랑 뭔 관련이 있어? 슬쩍 보니까 부부가 불내고 자살한 거로 사건 종결이던데? 뭘 또 봤냐?”

이거 좀 보고 갖다 드릴게요.”

 

이주가 가방에 파일철을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종이컵을 들고 이주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나오며 박 경사가 목소리를 낮춘다.

 

그러던가. 아니 그래서 뭔데. 또 뭔 일 터지냐 그래?”

그건 아니구요. 뭘 좀 확인해보려고요. 저 이만 가볼게요. 이정이 병원에 혼자 있어서.”

그래 알았다. , 팀장님 오셨네.”

 

경찰서로 막 들어오는 건일에게 박 경사가 경례를 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이정의 병원에 갈 거면 같이 가자며 건일이 제 차로 향한다.

 

이정이 신변 보호 단계도 강화할 거니까 걱정 말고. 보닛 열어봐. 그거 가져가서 이정이 채워줘.”

이게 뭐예요?”

웨어러블 호출기. 그거 누르면 바로 경찰이 출동할 거야. 바로 주변 파출소로 긴급구조요청 가도록 설정되어있어.”

 

건일이 차근차근 설명하고 이주가 호출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핀다.

곧 차가 병원 지하 주차장에 멈춰서자 이주가 호출기를 다시 박스에 집어넣는다.

 

오늘은 본 거 없고?”

아직은요. 어제 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너 말대로 안재역 근처 탐문 수사 중이야. 최근엔 계속 그것만 봤다고 했지?”

.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네 번이에요. 이건 더 안 봤으면 좋겠는데. 보고 나면 특히나 기분이 더러워요.”

우리도 지원받아서 수사 중이니까 금방 잡을 수 있어. 일단 이정이 병원 옮기는 날 나오면 말해.”

 

차에서 내리자 건일이 창문을 내려 이주를 부른다.

 

이정이한테 그거 씻을 때 제외하고는 빼지말라 그래. 알았지?”

 

이주가 픽 웃으며 박스를 가방에 밀어 넣고는 병원 안으로 향한다.

 

이까짓 거 백 개 차고 있어도 전 경찰 안 믿어요.”

 

*

왔어? 나랑 상담한 선생님이 언니 찾던데?”

도인혁씨?”

, 아침에. 그래서 언니 경찰서 갔다고 했지. 근데 그 선생님 일반 병동 의사 아니더라. VIP 전담 의사래.”

알아. 나 왜 찾는지는 말 안 했고?”

그건 모르지. 그냥 나중에 다시 온다고 했는. , 오셨다!”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혁을 보며 이정이 히죽 웃는다.

잠시 대화 좀 하자는 말에 이주가 가방에서 웨어러블 호출기를 꺼낸다.

 

이거 손목에 차고 있어. 씻을 때 말고는 빼지 말고. 이렇게 두드리면 경찰서로 호출 간다고 하니까...”

설명서 있네. 이거 읽을 테니까 언니는 선생님이랑 얘기나 하고 와.”

 

못 미덥다는 눈을 하는 이주의 등을 밀며 이정이 몰래 인혁에게 입 모양으로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한다.

잠시 후 인혁의 연구실에서 저번과 같이 마주 보고 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인혁이 이주의 앞에 커피를 밀어주며 묻는다.

 

저희 부모님이 살해. 당했다면 그날 범인을 보신 겁니까?”

정확하게 얼굴을 보진 못했어요. 그렇지만 분명히 봤어요.”

당시에 수사는 어떻게 끝났는지 전 못 들었습니다. 저번에 말했듯 일주일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지냈고 깨어나니 수사는 종결됐고 장례도 끝났다고 들었으니까요.”

고작 중학생한테 수사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경찰은 없을테고요.”

 

이주가 가방에서 파일철을 꺼내 인혁이 놓아둔 커피잔 옆에 내려놓는다.

파일 맨 앞에 붙은 빛바랜 견출지 위에 쓰여 있는 사건명에 인혁의 눈이 짧게 떨린다.

 

당시 사건기록서에요. 나는 도인혁씨가 내 조건을 수용해준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을 도울 거에요. 그게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도 기꺼이요.”

조건이라면. 나이정 환자의 치료입니까?”

이정이 치료는 의사로서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건 이정이의 안전이고 보호에요. 외부인과의 접촉이 최소한이었으면 좋겠구요.”

 

파일을 손으로 덮으며 이주가 인혁에게 눈을 맞춘다.

 

어떡하실래요. 제 조건, 받아들이실 건가요?”

5

 

 

우와 대박. 언니 여기 봐. 화장실에 샤워실도 있어!”

“.... 그러네.”

무슨 호텔 같다. 엄청 넓네. 와 소파도 있어 대박!”

 

이정이 널찍한 병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대며 이주를 올려다본다.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는 표정을 확인하고는 슬쩍 눈치를 살핀다.

 

언니가. 여기로 옮겨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

...”

뭔가 착오가 있었나? 여긴 너무 비싸 보여. 9층이면 VIP 병동만 모여있는 층 아냐? 간호사 선생님께 가서 물어볼까?”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갈 것처럼 굴자 이주가 진정하라는 의미를 담아 어깨를 누른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동안 이정이 지낸 요양병원의 1인실이나 방금까지 있던 6인실과는 다른 모습에 이주가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그 모습에 이정이 다시금 일어나려 이주의 손을 피한다.

 

. 언니. 무리할 필요 없어! 나 이렇게 좋은 데서 치료받을 필요 없고 그 사람도...”

아니. 너 좋은 데서 치료받으라고 언니가 돈 버는 거야. 무리 아니고.”

그래도...”

 

이정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구경할 때와 달리 눈치를 보며 눈만 슴벅이자 이주가 미소짓는다.

그때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의료용 트레이를 든 간호사가 소파에 애매하게 걸터앉은 이정을 보며 손짓한다.

 

나이정 환자? 이쪽으로 오세요, 혈압 좀 체크할게요.”

“......”

뭘 눈치를 봐. 얼른 가.”

 

이주가 계속 눈치를 보는 이정의 팔을 잡아끌어 베드에 앉히자 간호사가 능숙한 손길로 혈압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이것저것 상태를 물어보고 이정이 착실하게 대답한 후 궁금한 것을 묻는다.

 

선생님. 제 주치의 선생님은 누구예요?”

밑에서 도인혁 선생님께 진료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같은 분이세요.”

? 진짜요?”

 

언니는 알았냐는 듯이 이정이 쳐다보자 이주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간호사는 웃으며 이정의 링거 줄을 정리하며 말한다.

 

“VIP 병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도인혁 선생님 한 분이세요. 그리고 보호자는 이따가 출입증 받아 가세요. 들어오실 때 출입 카드 있어야 가능하세요.”

, 그럴게요.”

그럼 불편하신 거 있으시면 바로 호출 벨 누르시고 이따 회진 때 뵐게요.”

, 감사해요……. 언니 뭐야! 나 진짜 여기서 치료받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그래. 너무 비싼 것 같고...”

 

간호사가 베드 끝에 환자 정보 차트를 붙이고 나가자마자 이정이 눈치를 보며 말을 쏟아낸다.

이주는 이정의 차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제 팔을 잡는 손에 이정을 쳐다본다.

어색한지 눈만 굴리며 이럴 필요 없다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팔을 잡은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나이정. 너 아니면 언니 돈 벌 이유 없어. 너 치료를 위해서도 맞는데 이건 나를 위해서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계속 자리 비울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불안해지고 싶지 않아. VIP 병동이니까 보안도 철저하고 무슨 일 생겨도 도와주실 분들 많으니까 언니 입장에서도 안심이 돼. 그러니까 여기서 치료받아.”

그럼 차라리 통원치료를 하자. ? 여기 병실이 하루에 얼마일 줄 알고...”

통원치료하다가 저번처럼 그 인간 찾아오면? 그때처럼 언니가 옆에 없으면 어떡하려고. 내가 그러려고 돈 버는 줄 알아? 이번엔 언니 말 들어.”

 

이주가 물러설 생각 없이 단호하게 내뱉자 이정이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 누우라며 베개를 정리해주며 보조 의자에 앉자 이정이 등을 기대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매트리스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엉뚱한 모습에 이정의 잇새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흐른다.

 

뭐해?”

언니 여기 침대도 엄청 좋아. 푹신거려.”

그래? 어디 봐봐.”

엄청 푹신 거리지? 언니 집에 있는 침대 같아.”

그 침대 엄청 좋은 거야. 나중에 너 퇴원하면 더 비싼 거로 사줄게.”

약속했다? 손가락 걸어. 아니 각서 써!”

 

속닥거리며 장난치며 웃자 이주가 그 모습에 따라 웃는다.

때마침 병실로 들어가려던 인혁이 반쯤 문을 열다 들리는 대화 소리에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간다.

 

*

나이주씨.”

얘기 나눌 시간 있어요? 회진 끝날 시간이라고 해서 온 건데.”

. . 일단 들어오시죠.”

제가 퇴근할 사람 붙잡는 건 아닌가 싶네요.”

 

퇴근하기 위해 연구실 밖으로 나온 게 맞았기에 인혁이 가볍게 미소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사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전한 것 같아서요. 이정이 보호를 요청했는데 이렇게 병실을 옮겨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보호에 최적화된 곳이기도 하고 믿을만한 의사를 요청하셨으니까요. 이 정도면 괜찮습니까?”

, 감사해요. 혹시 사건기록서는 다 읽어보셨나요?”

 

인혁이 마침 돌려드리러 가는 길이었다며 가방에서 파일철을 꺼내 건넨다.

 

사실 여러 번 읽었는데 별로 이상한 점은 못 봤습니다. 목격자도 없고 과학수사대가 외부흔적이 아예 없다고 했던데.”

그게 문제죠. 그것 때문에 자살이라고 사건 종결이 뜬 거에요. 외부흔적이 아예 없으니까.”

 

이주가 파일철을 넘기며 사건 현장 사진을 가리키고 불에 타긴 했지만 인혁은 그 장소를 한눈에 알아본다.

 

주방 쪽에 난 문이라고 하던데. 도인혁씨랑 어떤 여자분 이쪽으로 나가던데. 맞죠?”

. 유일하게 별장에 있는 쪽문입니다. 누나랑. 같이 나갔고요.”

차에 타서 같이 빠져나갔고요. 운전은 누나분이 하셨던데.”

“....... 거기까지 다 보신 겁니까?”

 

마치 현장에 있던 사람처럼 술술 그날의 일들을 꺼내는 이주를 보며 인혁이 머뭇거리며 묻는다.

이주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건기록서를 뒤적인다.

 

혹시 두 분은 조사받은 적 있나요?”

“......아니요.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건이 종결된 후였습니다.”

그러면 두 분이 나갔을 때 흔적이 남았을 텐데, 거기에 관한 이야기는 없어요. 내부에서 사람이 빠져나간 흔적이 있으면 다 수집했을거고. , 차량 내부에 블랙박스가 있었어요?”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이런 식이면 같이 있던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거든요. 누나는 운전했던 걸 보면 성인?”

 

인혁의 시선이 이주에서 책상 위에 놓인 액자로 향한다.

대답이 없자 기록서만 들여다보고 있던 이주가 고개를 들어 인혁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인혁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증거가 확실히 나오면 사건 종결이 되긴 해요. 다만... 도인혁씨 부모님 같은 경우는 너무 빠르게 종결된 케이스죠.”

 

그때 창문을 누가 두드리듯 작은 타격음이 울린다.

빗방울이 몇 번 부딪히더니 곧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이주가 톡톡 기록서를 손끝으로 두드린다.

 

자살이라는 정확한 증거가 안 나왔잖아요. 유서도 없고. 가족끼리 여행을 목적으로 놀러 가서 일가족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그것도 방화로? 이건 사실 흔한 스토리거든요.”

흔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살인을 자살로 꾸미는 거요. 사건 현장에 있는 모든 인물을 죽이면 목격자 없고 다 태워버리면 증거까지 전부 타버리거든요. 그리고 자살이라고 생각한 증거가 이거 하나잖아요.”

 

이주의 손끝이 외부흔적 없음이라는 글자에서 멈춘다.

 

고작 외부흔적 없는 거로 사건을 종결한 건 특이한 케이스죠. 사건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의식불명이라 해도 일주일도 안 기다리고 종결하고 장례까지 치른 건 확실히 서두른 감이 있어요.”

잠시만요. 나이주씨. 제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조금 천천히 이야기해도 될까요?”

, 미안해요.”

 

이주가 경찰서에서 제가 예견한 것을 말하듯 줄줄 말했다는 게 생각났는지 말을 멈춘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너무 태연하게 이야기했나 싶어 이주가 슬쩍 인혁의 눈치를 살핀다.

마른세수를 하며 잠시 물을 떠 오겠다며 인혁이 연구실 밖으로 나간다.

 

“...비 엄청나게 오네.”

 

이주가 어둑한 바깥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를 몇 분, 인혁이 다시 들어와 앉는다.

세수하고 왔는지 앞 머리카락이 축축이 젖은 모습에 손수건을 꺼내 건네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인혁이 묻는다.

 

그렇다면 나이주씨 생각은 뭡니까? 이렇게 종결된 건...”

제 생각에 서둘러 자살로 종결했다면 어쩌면 경찰 안에 협력자가 있었을 수도 있어요. 사건 종결하라고 압박했다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죠.”

누가 압박을 한다는 겁니까?”

누구겠어요. 이 사건이 더 이상 커지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요.”

 

이주가 파일철을 덮으며 덧붙인다.

 

범인밖에 더 있겠어요?”

 

*

나이주. 너 오늘 왜 이렇게 맥이 빠져있냐. 어제도 경찰서에서 밤샜어?”

그게 아니라 이정이 병원에서 자느라.”

 

강의실 책상에 엎드리며 이주가 고개를 내젓는다.

정아가 이것 보라며 핸드폰 문자를 보여주자 이정이 보낸 듯 먹고 싶은 음식이 나열된 내용에 이주는 짧게 웃는다.

 

나한테 먹고 싶은 거 사 들고 병문안 오랬어. 가자. ?”

나 오늘 경찰서 가봐야 해. 나중에.”

나 혼자 가면 되지. 서인 대학병원이라며? 걸어가도 10분이면 가. 몇 호야?”

외부인 면회 절차가 좀 복잡하고 이정이는 면회 철저히 금지돼있어서 안돼.”

. 대학병원은 원래 그래? 아니면 이정이 상태 안 좋아?”

 

얼마 전 쓰러졌던 것 때문에 그러냐며 정아가 목소리를 죽여 묻자 이주가 때아닌 질문들에 고개를 내젓는다.

 

그게 아니라 이정이 VIP 병동에 있어. 그래서 면회 제한이고. 혹시 몰라서 그렇게 해뒀어.”

나이주 돈 벌어서 다 쓰네. 이정이 상태는?”

그러려고 버는 거지 뭐. 요즘 상태 최고야. 나중에 나랑 같이 가자.”

 

정아가 알겠다며 다시금 수업에 집중하자 이주가 노트에 끄적이던 글자를 내려다보다 혼란스러운 듯 노트를 덮는다.

 

*

나이정. 얼굴만 보면 잠복근무하고 온 형사가 따로 없다?”

농담하지 마요. 범인 잡았다면서요.”

, 지금 취조실에 있어. 가자. 얼굴은 확실히 봤지?”

. 저번에 정확히 봤어요.”

 

이주가 취조실 맞은편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인다.

곧 경찰서 복도를 걸으며 건일에게 묻는다.

 

자백은 받았어요?”

아니라고 잡아떼지. 근데 집에서 증거물 쏟아져서 조만간 검찰로 송치 예정. 이건 보면 기분 특히 더럽다며. 이제 그만보겠네? 축하한다.”

 

장난스레 이주의 어깨를 툭 치는 건일을 보며 이주가 종이컵에 든 커피를 목으로 넘긴다.

한숨을 뱉자 숨에 섞인 커피 향이 잠시 퍼진다.

 

그래봤자 또 다른 거 보겠죠. 하나가 잡힐 때까지는 그것만 죽어라 보여주니까.”

너 덕에 우리 지역 연쇄살인범은 검거율 1등 하겠다 야.”

그럼 수당이나 올려줘요.”

 

이주의 농담에 건일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제 생각났다며 이주에게 묻는다.

 

저번에 그 너 찾아왔다던 그 사람은. 이제 안 나타나냐?”

도인혁씨요? 안 그래도 물어볼 거 있었는데 한 팀장님 16년 전에 신일동 파출소에서 근무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거기가 첫 근무지 아니였냐. 그때만 해도 내가...”

그럼 크리스마스에 별장 화재사건 기억해요?”

크리스마스에 별장 화재? 사망자도 있었나?”

. 서인대학병원 전 병원장 내외가 사망했어요.”

 

이주가 가방에서 사건기록서를 꺼내 건네자 건일이 하던 말을 멈추고 이주를 쳐다본다.

둘 사이에 정적이 감돈다.

 

6

 

 

, 기억났다. 서인대학병원 전 병원장이랑 그 부인 분신자살?”

맞아요. 혹시 그때 출동하셨어요?”

아니. 난 그때 음주 검문인가. 아무튼 다른데 나가 있었지. 근무 끝나고 파출소 가니까 형사들 와있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혹시 그때 출동하셨던 경감님 연락하고 지내세요?”

 

건일이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가 고개를 내젓는다.

기대를 담고 바라보던 이주의 얼굴이 한순간에 아쉬움을 담는다.

 

얌마. 그때가 16년 전이다. 벌써 다들 은퇴하시고. 아니 가만있어보자. 그때 아마 출동했던 순경 놈이랑은 가끔 연락하는데. 근데 너 이거 왜 묻는 거냐?”

어쩌다 보니 제가 도인혁씨를 좀 돕게 돼서요.”

도와? ? 니가 뭐 도의적인 책임이나 그런 게 있지는 않을 테고.”

이정이 주치의 선생님이에요. 따로 이정이 일로 더 도움도 받고 있고.”

그럼 니가 본 첫 사건이 그 신일동 별장 화재사건?”

 

이주가 맞는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건일이 대충 기록서를 훑고는 이주에게 묻는다.

 

자살로 종결인데. 니가 봤다면 아니라는 거네.”

. 이게 첫 예견이었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안 들어줬지만.”

그래서. 이때 죽은 부부의 아들이 이정이 주치의한테 도움받아서 이때 사건 범인이라도 잡아주겠다 그렇게 약속했어?”

잡긴 뭘 잡아요. 내가 아무리 인생의 반이 강력계라지만 형사는 아닌데요.”

그니까. 근데 왜 사건기록서를 가지고 있어. 그때 출동한 경사님은 왜 찾고.”

협력하기로 했거든요. 범인을 잡고 말고는 그 사람 생각이고요. 만약 잡는다 그러면 도와줘야겠죠.”

 

건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계단에서 올라오는 형사가 건일에게 인사를 건넨다.

형사가 떠나자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주변을 살피고는 이주에게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래 뭐.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라. 일단 그 순경했던 놈한테는 연락해보마.”

, 감사해요.”

그래. 들어가라. 뭐 또 보면 연락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온 이주의 등을 밀며 건일이 담배를 입에 문다.

이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롯가로 향한다.

건일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 사이로 이주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가려지는 모습을 보며 건일이 크게 숨을 내쉰다.

 

*

어라? 그쪽 병실 들어가시려고요? 혹시 환자 보호자세요?”

, 그런데요.”

혹시 도인혁 선생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요?”

 

이주가 이정의 병실로 들어가려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는 종범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린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는 모습에 종범이 명함을 꺼내 건넨다.

 

아아, 너무 인사도 없이 본론으로 물어봤네요. 저는 서인 대학병원 재단 이사장 도종범입니다. 인혁이 사촌형이구요.”

“......, 그러시구나.”

 

이주가 떨떠름하게 명함을 받아 감흥 없는 얼굴로 내려다본다.

이주의 반응에 종범이 턱을 매만지며 소파를 가리킨다.

 

지금 나이정환자 없어요. 상담 치료 가서 병실 청소 중.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이주가 병실 문을 열어 확인하자 청소 담당 직원이 침대 시트를 갈다가 문소리에 뒤를 돈다.

다 하려면 10분쯤 걸린다는 말에 이주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옆 소파에 앉는다.

종범이 가리켰던 옆자리 소파가 아닌 마주 보고 앉은 모습에 머쓱하게 손을 내린다.

 

환자분. 언니인가? 맞나요?”

. 맞아요. 그런데 왜 여기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인혁이 보러 왔는데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상담 치료 갔다고 해서요. 기다리면 여기로 온다던데?”

. 그러시구나.”

 

이주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종범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묻는다.

 

그래서 진짜 인혁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아까부터 왜 자꾸 그걸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인혁이가 환자 한 명 병실 잡아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VIP 병동에서 병실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래서요. 뭐 문제라도 있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재단 이사장으로서 궁금하니까요. 사촌 형으로서도 궁금하고. 혹시 여자친구?”

아뇨.”

자꾸 질문해서 귀찮으시죠. 죄송합니다.”

 

이주가 자꾸만 말을 거는 종범에게 불편하단 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대답하자 종범이 서글서글 웃으며 사과한다.

곧 종범은 핸드폰을, 이주는 가방에서 꺼낸 책을 읽으며 청소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책장이 몇 번 넘어가자 병실에서 직원이 나오고 이주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선생님은……. ? 언니!!!”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내리며 대화를 나누던 이정이 이주를 발견하고 하던 말을 멈춘다.

이주를 부르며 달려간 이정과 달리 인혁이 제게 인사하는 종범과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낯으로 묻는다.

 

형이 왜 여기 있어?”

왜 있기는. 재단 일로 좀 들렀어. 아버지가 너 보고 가래서 너 어딨느냐고 물으니까 여기 있다고 해서 왔다. 그게 인사냐 너는?”

그러면 연구실에서 기다리지 왜 병동에서 기다리냐고. 올라가자.”

아니. 얼굴 봤으니까 됐다.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종범이 이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인혁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이정이 이주를 바라보며 누구냐며 입 모양으로 묻는데 인혁이 이주에게 늦은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 학교 갔다가 경찰서 좀 다녀오느라...”

헐 맞아. 언니 그 자식 잡혔더라! 언니가 예언한...!!!”

이정아. 들어가서 얘기하자.”

 

인혁이 병실 문을 열며 이정의 말을 부드럽게 끊는다.

세 사람이 병실로 들어가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종범이 방금까지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 복도를 바라본다.

 

예언?”

 

저도 모르게 이정의 입에서 나왔던 단어를 뱉으며 종범이 턱을 매만진다.

 

*

, 그럼 언니 당분간은 안 보려나?”

글쎄다. 최근에 좀 자주 봤으니까 쉬지 않을까.”

직장인은 휴가라도 있지. 언니는 그게 뭐야. 맨날 보면 경찰서 달려가고. 형사가 따로 없어. 형사보다 언니가 더 바쁜 거 같아.”

 

이정이 침대에 누우며 투덜거리자 인혁이 익숙하게 링거 줄을 정리해주며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아니라 언니가 맞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나중에 우리 언니 비타민 같은 거라도 놔주세요

너는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얼른 제대로 누워.”

 

이주가 제가 하겠다며 이정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자 인혁이 편히 누운 이정을 보며 이따 오겠다며 병실 밖으로 나간다.

인혁이 나가자 이정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언니 정아 언니 언제 온대? 올 때 와플 좀 사 오라고 해주라. 저번에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잖아. 그리고 나 오늘 옥상 가봤는데 예쁘더라.”

너 돌아다니는 거 조심해. 웬만하면 사람 없는데 가지 말고.”

알아알아. 이것도 잘 차고 있잖아.”

 

이정이 손목에 찬 웨어러블 호출기를 보여주며 웃자 이주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그거 믿고 막 돌아다니지 마. 늘 조심해. 알았어?”

아우 언니는 어떻게 된 게 잔소리가 매년 늘어? 대학 가서 그런 거만 배워?”

나중에 니가 가봐. 그런 거 배우나 안 배우나.”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못하겠어.”

 

*

나이주씨. 잠깐 얘기됩니까?”

 

늦은 밤.

갑자기 병실로 찾아온 인혁이 이주를 부른다.

이주가 침대에서 곤히 자는 이정을 확인하곤 곤란한 낯을 한다.

 

이정이가 자고 있는데...”

보안요원한테 얘기해놓겠습니다.”

 

인혁이 곧 보안요원 두 명과 돌아오자 이주가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하고 병실 앞에 서 있는 것까지 확인하곤 인혁을 따라간다.

 

이정이가 가진 트라우마 때문에 불렀습니다. 본인이 얘기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 .”

특정 인물에 대한 트라우마성 장애가 있다고 전에 있던 병원에서 의사 소견서가 있긴 한데 정확히 알아야 제가 치료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수월해서요.”

 

이주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자 인혁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혹시 말씀하시기 어려우십니까?”

, 아뇨. 16년 전에 부모님이 살해당하셨어요. 그때 이정이가 살인을 직접적으로는 아닌데 간접적으로 목격했어요. 같은 공간에 있었거든요.”

 

이주가 잠시 생각하다 결심한 듯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인혁이 앞에 놓인 차트에 적으려 펜을 휘갈기다 들려오는 말에 멈칫한다.

 

나성열이라고. 아버지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어쨌든 삼촌이라고 따른 사람이 부모님을 살해하는 걸 봤어요. 그 이후에 이정이도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현장에서 경찰한테 검거됐고요. 이정이가 그 이후로 가끔 발작을 하더라구요.”

이전엔 발작 증세가 심했던데.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 인간이 출소했더라구요. 아직 5년은 더 남았는데……. 말같지도 않게 모범수라나 뭐라나.”

 

이주가 기가 찬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그때 이정이를 찾아갔었어요. 그래서 제가 병원도 저랑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고 한거구요. 언제 이정이를 찾아갈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정이한테 문자를 보냈더라구요. 그거 보고 발작한 거에요.”

알겠습니다.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혁이 무어라 적으려던 차트 위 종이를 찢어내고는 펜 뚜껑을 닫는다.

이주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인혁에게 묻는다.

 

그럼 제가 저번에 얘기한 건 어떻게 됐어요? 별장 관리인이나 운전해주신 기사분이 있다고 했잖아요. 연락해 봤어요?”

아니요. 두 분 다 연락처가 남아있질 않아서요.”

흥신소를 찾아가든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야 해요. 혹시 수상한 사람을 목격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인혁이 이미 그렇게 했다며 연락이 오면 얘기하겠다며 대답한다.

이주가 낮에 경찰서에서 그날 현장에 출동한 순경과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말을 전한다.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뭘요. , 부모님께서 원한 사실 일은 하지 않았다고 했죠?”

. 혹시 몰라서 병원에 무슨 일이 있었나 찾아봤는데 그때 병원에 문제는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그날 특별한 일 같은 건 없었어요?”

특별한 일이요?”

 

이주가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움직인다.

손톱과 책상이 맞닿으며 짧은 타격음이 울린다.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예를 들면 뭐 평소 안 입던 옷을 입었다던가, 아니면 원래 타던 차가 아닌 다른 차를 타고 별장에 갔다던가 그런거요.”

글쎄요.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쉽네요. 언제든지 기억나는 거 있으면.....”

. 그러고 보니 그날 방을 바꿔서 잤습니다.”

 

인혁이 기억나는 게 있는지 중얼거렸다가 이건 필요 없는 얘기 아니냐며 묻자 이주가 더 얘기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는 1층에 있는 방에서 묵는데 그날은 누나가 2층에서 잘 거라고 해서 저랑 누나 둘 다 2층에 있는 방에서 잤습니다.”

그래요?”

. 원래는 사용하지 않는 방문은 잠가두는 편이라 그날은 관리인한테 스페어 키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 스페어키 위치를 물어봤는데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에요 아니면 밤에 자기 전이에요

밤에 자기 직전에 물어봤습니다. 제가 누나 침대에 주스를 쏟아서 자기 싫다고 했거든요.”

 

이주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린다.

 

외부흔적 없이 거의 완벽한 밀실을 만들었는데 변수가 발생했네요.”

변수요?”

도인혁씨랑 누나분이 살아나간 거요.”

 

이주가 저번에 읽었던 사건기록서를 떠올려보라며 그때 분명히 휘발유는 1층에만 뿌려져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입에 올린다.

 

별장 계단이 나무였잖아요. 1층에 불을 지르면 2층까지 번지는 건 순식간인 거죠. 아마 그날 그 별장에서 살아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거고. 근데 두 분은 살았고 그래서 빨리 사건을 종결하려고 했겠죠. 살아난 두 분이 이상한 소리를 할 수 없도록.”

누가.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정말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인혁이 답답한 듯 마른세수를 하며 한탄하자 이주가 창밖을 잠깐 바라봤다가 인혁과 눈을 맞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히자 이주의 입술이 열린다.

 

분명한 건 두 분의 죽음으로 이득이 있는 이가 살해했다는 거에요.”

“......”

그리고 일가족을 전부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죠.”

그렇다는 건...”

증거가 안남길 바래서 다 태웠지만 살아난 사람이 있었고 서둘러서 부모님의 분신자살로 마무리 지은 거에요.”

 

이주가 제 의견이라며 내놓은 말에 인혁이 침묵으로 대답을 일관하며 물을 들이켠다.

 

혹시 누나분이 그날 보거나 기억하는 건 없나요? 괜찮다면 제가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나이주씨가 모르는 것 같아서 말씀드릴지 말지 고민했는데. 누나는 그날 죽었습니다.”

 

이주가 인혁의 말에 한 대 맞은 듯 멍하게 있자 인혁이 나이주씨? 하고 부른다.

그 이후로도 계속 멈춰있던 이주의 팔을 가볍게 건드리자 이주가 버튼이 눌린 기계처럼 흠칫 놀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잠깐. 잠깐만요. 누나분이 죽었다고요?”

. 그날 저를 데리고 나오다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사고는 분명 크게 나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날 내가 본 죽음에서 당신 누나는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