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384
1회
1. 모두의 시작,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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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그들만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추구하는 공간.
누구에게나 출입을 허가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아니, 그게 무엇이든.
혼자여도 좋다, 어떠한 기분을 느끼든 괜찮으니 [시장]으로 들어와라.
우리는 이미 당신들의 이야기를 먹을 준비가 됐다.
실은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혼자 사색에 잠긴다거나 시간을 낭비하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이 아닌가.
무엇이 되었든 서두를 필요는 없다.
카페에서 음료 한 잔 마시는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랜 시간을 빼앗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잠시’라는 정해지지 않은 짧은 시간이면 어떨까. 그대 앞에 빈 잔이 놓일 때까지. 원한다면 이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시장]
어느덧, [시장]을 오픈 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세월만큼 한 골목 소상공인들과도 가까워진 이곳에는 여사장인 최종은과 남사장인 유이헌. 두 명의 사장이 존재한다.
오픈할 적, 저기는 카페야? 식당이야? 술집이야? 문구점이야? 등의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이곳을 만든 그들은 상점이라 한다. 상점의 이름이 시장인 것은 시장에 가면 무엇 무엇도 있고 라는 놀이도 있듯이. 시장에 가면 커피도 있고, 시장에 가면 음식도 있고, 시장에 가면 뭐든 판다는 의미로 촌스러운 듯한 이름을 택했다.
숏컷에 가까운 짧은 머리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젊은 여사장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 이야기의 주인, 최종은이다. 그녀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그녀를 손님으로 착각할 만큼 지정석이라도 되는 듯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 갑자기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제야 직원인가? 할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게 일상이다.
한 남성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항상 그렇듯 늦은 오후에 출근하는 [시장]의 남자사장, 유이헌. 누가 봐도 사업 파트너로 보이는 이들의 삶 속을 들여다 볼 것이다.
“장사는?”
“해야지.”
짧은 대답을 남기곤 대화의 내용을 망각이라도 한 듯 다시 하던 작업을 마저 이어 간다. 열심히 그리는 것인지 적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무언가. 그녀는 항상 자신의 노트 위에 네임펜을 칠한다.
창에 비치는 무언가에 몰두한 그녀의 얼굴. 옆모습만 보아도 쌍꺼풀은 없지만 두툼한 입술을 가진 그녀. 어딘가 모르게 그녀의 얼굴은 사람들로 하여금 빨려들게 하는 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시장]은 그녀의 작업실이자 휴식 공간 그리고 장사하는 곳이자 친구를 사귀는 공간이다. 그녀는 때때로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친구가 되곤 한다. 본직은 프리랜서 여행 서적 작가로 독립서적만 추구한다. 종은은 추구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아주 성공을 향한 욕망은 가득하지만,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최종은, 그녀는 인생에 자신과 관련 된 모든 것에는 본인의 손길이 닿아야 직성이 풀렸다. 책을 팔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등의 상업적인 도전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단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동감했으면 했다. 그래서 참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해왔다. 무모한 도전까지도. 그런 그녀는 모험심은 많고 아주 작은 꿈을 가진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는 숨을 쉬는 평범한 대한민국 젊은 이.
오전 일곱 시, 이른 시간이지만 종은은 매일 아침을 일찍 연다.
일찍부터 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침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야 말로 하루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때이다. 그 골목을 지키는 상인들을 위해 모닝커피를 준비하기라도 하는 듯 했고. 어느새 매일 아침마다 첫손님은 인근 상인들이 되었다. ‘오늘은 누가 먼저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출근 길 열려있는 상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갑기 마련이기 때문. 사실 이것 또한 본인의 갈망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시장]의 남자사장 이헌은 종은이 여행길에 오를 때면 버릇이라도 되는 듯 질문한다.
“이번엔 뭐 하러 가냐?”
정말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을 하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 시장을 열기로 했을 때부터 약속된 것이기에 그녀를 막을 수는 없다. 이헌은 언제 떠난다고 할지 모를 종은과 동업하기로 했을 때부터 그녀를 인정했다. 무려 5년 전, 그들이 지금보다 어린 생각을 품고 있을 때였다.
종은에게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한다면 엉뚱한 답이 돌아온다. 항상 뻔한 답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버릇처럼 반복하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
이들이 시장을 열기로 한 것은 스물 셋의 어느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종은의 무모한 도전정신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녀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
5년 전, [2015년]
이것은 이들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다. [시장]이 탄생하게 된 이야기.
그 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대구는 대프리카로 불릴 정도였으며 밖에서 5분만 서있어도 살이 익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온 여름이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년, 종은은 학교에서 이 젊음을 보내버릴 수 없다며 졸업 전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 신청서를 제출했다.
“노는 거 이제 질리지도 않냐?”
“놀고 싶어서 휴학하는 거 아닙니다.”
교수는 학생들의 휴학을 말렸다. 휴학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아르바이트라든, 백수가 되었든, 어떠한 배움도 얻음도 없이 돌아온 수많은 복학생들을 졸업시켰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휴학한다는 학생들이 하는 말들은 뻔했다. 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둥, 계획이 다 있다는 듯 지키지 못할 말들을 내뱉었다.
“그럼 뭐 하게?”
“아직 계획은 없어요. 학생일 때 해볼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요.”
종은은 다른 학생들과는 다리 계획 따위는 없다고 대답했다. 계획도 없으면서 휴학 후 무엇을 할지 하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걱정이었다.
“졸업하고 정착이나 해라.”
종은은 교수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의 대꾸를 붙이지 않았다. 교수는 이미 종은을 꺾을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당장의 계획은 휴학이었으니. 정착이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다기보다 그것이 진정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단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종은은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추억 따먹기를 헀다. 아직 졸업도 못한, 이제 막 복학을 했다거나 혹은 대학에 가지 않은 친구들도 껴있었다. 그녀의 휴학을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술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키는 사람은 정규, 종은, 이헌 뿐이었다. 이야기 주제가 떨어진 것일까? 모두 조용해지자 종은이 입을 뗐다.
“나랑 같이 창업할 생각 없냐?”
“창업?”
“어.”
눈치를 보는 분위기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주었다. 그게 바로 유이헌이었다.
“나. 내가 할게.”
“야, 넌 쟤가 무슨 사업을 할 줄 알고 한다는 거냐?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지 들어는 보고 한다고 해야지.”
“일단 난 지금 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뭐든 해야지.”
“그런 자세 좋아. 도전적인 그대 합격. 일단은 내가 여행부터 갔다 와서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은 안 돼.”
“뭔데? 언제 갔다 언제 오는데?”
“또 제주도나 도쿄나 갔다 온다고 하겠지.”
정규가 놀리듯 말했지만 종은은 진지하게 말했다.
“몰라도 돼. 적당히 하고, 한 달은 못 볼 거니까 빨리 짠 하자.”
그렇게 그날 밤은 아침이 되도록 바닥에 빈 병을 세웠다.
......
그날로부터 일주일 후 종은은 혼자 인천 공항으로 갔다. 아무도 그녀의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산 것이다.
뉴욕에서 만난 안나
뉴욕에서 그녀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목적지 없이 걸음을 떼었다. 아침산책 중 보이는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곧바로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시간을 흘러 보냈다. 손에든 노트에는 아무런 글이나 끄적이는 게 그저 좋았다. 처음 본 외모의 사람에 대한 묘사 혹은 맛있게 먹은 음식의 이름, 들리면 들리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쓰는 것이다.
금발의 잘생긴 소년들. 웃음소리가 특이한 소녀들. 갖고 싶었던 명품을 이미 가진 여자들. 배 나온 아저씨들이 보였다. 그러면 곧장 노트를 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녀의 노트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는 곱슬머리에 검은 피부의 아이와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려 울상인 하얀 피부의 아이...[개 짖는 소리/의성어]‘등이 쓰였다.
“치즈버거 하나랑 감자튀김 라지 사이즈 주세요.”
배가 고프면 맛있는 냄새를 따라 막무가내로 들어간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배가 부르면 정처 없이 걷다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서점으로 들어가 그림책을 구경했다. 그림책을 구경하는 이유는 영어를 빠르게 읽지 못하는 답답함을 참아낼 인내심이 없기 때문도 있었지만 나라마다 색이 다 다른 것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난 지 어느덧 보름이 다돼 가는데 왠지 여행이 지루하게 느껴지려했다. 무언가 찾으려고 떠나온 곳인데,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는 듯한 공허함이 맴돌았다.
그날 저녁, 그녀가 검은 피부의 친구를 만났기에 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었다. 음악가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듯. 종은의 사고를 전환시켜줄 새로운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Unhappy Time 언해피타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지 못한 사람들이여 오늘 저녁만큼은 행복을 찾아가라는 언해피타임. 마치 자신을 나타내는 듯한 타이틀에 종은은 저녁을 뒤로한 채 그곳으로 입장했다.
종은은 맥주에 나초나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엔 또 점심에도 먹었던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언해피타임, 여러 인종이 즐비한 곳인 만큼 그곳에서는 동양인인 종은도 튀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며 취중독서를 즐기던 종은에게 안나라는 흑인 여성이 먼저 다가왔다. 처음에는 언어도 피부색도 다른 낯선 이가 다가와 불안했지만 금세 마음을 열게 되었다.
안나는 자신이 ‘폴리아모리’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어느새 사적인 대화까지 가능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처음 만난 그날 말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몸짓과 눈짓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했다.
“폴리아모리?”
“응.”
살면서 처음 들어본 단어에 설명이 필요했다.
“그게 뭔데?”
물음은 분명 종은이 했다. 안나는 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니?”
“당연하지!”
“지금까지 몇 명과 사랑을 나눠 봤어?”
안나가 자꾸만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은 주지 않고 질문을 반복하자 종은은 짜증이 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종은은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나의 설명에 아차 싶은 듯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네가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몇이냐는 말이야... ... 난 동시에 여러 사람을 좋아해. 그렇지만 그들도 날 존중해 줘. 날 좋아한다는 새로운 남자아이가 고백했을 때 이미 난 남자친구에게 실증을 느끼고 있었지. 그런데 그 아이가 싫진 않았어. 그래서 말했지. 각자의 연애를 존중하는 연애를 하자고. 아직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니?”
“음...”
“그러니까 말 그대로 서로의 연애에 대해 서로 존중과 충고,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거야.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비독점적으로 내 연인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거라고. 그렇지만 집착은 금물이야. 그럼 그 관계는 더 이상 끝.”
안나는 종은에게도 그러고 싶었던 적이 없냐고, 그랬던 적은 묻고 싶었던 것이다. 당장의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 헤어지기 전까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강요도 강압적인 의도도 없었다. 단지, 본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종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번에 둘 이상의 남자를 만나.”
종은이 흠칫 놀라는 듯하자, 놀라지 마라는 듯 웃으며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한국에서는 이런 인식이 전혀 없는 거야? 물론 서로의 합의 하에 연애가 시작 되는 거야. 만약 서로가 비밀로 한다면 간통이 되겠지.”
대화가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종은은 그 후로 이어진 대화 동안 과거에 겪었던 혹은 현재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지난 대화 주제를 곱씹었다. 본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술집에서 만난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틀은 함께 지낸 것 같다. 외모도 언어도 다르지만 서로의 삶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어느새 완전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드디어 미국으로 떠나온 보람을 느낀 것이다. 첫 수확은 안나 라는 친구였다.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말 속에는 무언가 가미된 듯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화를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안나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고, 납득이 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이곳으로 떠나온 목적을 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혼자만의 자신을 찾으러 온 시간을 위해 온 곳에서 실수를 범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녀와 다음을 기약하기로 결심했다.
“안나, 이제 다시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찾으러 가야겠어. 그래도 너와의 시간은 헛되지 않다고 생각해.”
“미안해.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니야?”
“아냐. 그래도 너와의 대화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는걸? 기회가 되면 한국으로 초대할게.”
“꼭 그러길 바랄게.”
아쉽지만 헤어짐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자꾸만 안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 ‘폴리아모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실은 본인도 폴리아모리인 걸 그런 개념조차 알지 못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 온간 잡생각과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얼굴이 새빨개지기도 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밤까지도 혼자만의 고민과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훗날에 대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최종은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른 여행지라고 해야 할까? 영감을 얻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장소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음 목적지를 정해두었다.
이곳에서 난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가 생각하던 불합리라기보다는 불리한 자들의 입장을 듣기도 했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들과 본 것들을 간직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할 일이 생겼다.
2회
2.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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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한명 쯤 존재할 것이다. 나에게는 [시장]을 함께하는 동업자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 파는 ‘[시장]’을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존재.
-최종은의 메모장 中 어느 한 페이지-
종은은 늘 남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싫은 소리를 하거나 듣게 되는 부정적인 인간이고 싶지 않았다. 종은은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변들로 인해 그녀는 그렇게 판단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본인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에도 쉽게 부정하지 못하게끔.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라는 걸 속으로는 무수히 내뱉었다.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을 찾아보려 5년 전 혼자 뉴욕으로 떠났던 것이다. 시장에 전시 된 종은만의 지구본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곳을 찍었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시장]에서 타인의 선택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가지고 싶은 것을 사도 쉽게 사용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소비 욕구를 참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시장]이라는 상점을 여는 것이었다.
사자!
가지고 싶은 것을 사버리자. 그리곤 그것을 되 팔면 되잖아. 내가 좋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 아닐 것이야. 내가 선택한 것이 다른 사람들의 선택 곧 인정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지. 원하는 자들에게는 기꺼이 보내줄 생각으로 모으고 모은다. 타인의 선택을 받기 전까지만 소유하면 그로 만족한다.
그렇게 종은은 항상 소중한 것들을 시장이라는 자신의 가방에 담아 왔다. 비워지고 새로 채우는 게 종은의 주 업무였다. 그저 즐거웠다. 10년을 지켜봐온 이헌은 시장을 열고난 후 점차 발전하고 변화하는 종은이 좋아보였다.
종종 남자 사장만이 자리를 지키는 기간이 있다. 바로 종은이 여행을 떠날 무렵이다. 1년에 한두 번 그녀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저 자신만의, 자신만을 위한 여행.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헌에게 휴가를 요청했다. 그럴 때면 이헌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풀어주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들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곳을 횡단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하나같이 누가 봐도 종은의 안목으로 진열 된 것들뿐이었다.
[다시 과거, 2015년]
돌아온 종은
종은이 귀국했다. 이헌은 한 달 동안 고민이 많았다. 정말 종은이 창업할 생각인 것인지. 본인과 함께해 줄 것인지. 이들은 학창시절부터 5년을 친구로 지내왔다.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겠냐는 이들도 많지만, 이들은 정말 그냥 친구였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서로에게 호감이 없으면 남녀사이든 동성이든 친구가 되기도 쉽지 않다. 이들 또한 서로에게 호감이 있기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성적인 만남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서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소중한 친구를 잃기 싫었다. 친구라는 사이에서는 싸우면 화해하면 되지만 연인은 헤어지면 다시 만난다기란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둘이 사귀게 된다면 이제 서로는 영원히 친구를 잃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오랜만이다.”
“선물은?”
“없는데?”
“에이. 장난이지?”
“아니, 진짜 없는데?”
한 달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정규는 여전했고, 종은의 눈에 이헌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야, 왜 이제 오냐?”
“누가 보면 보고 싶어 하기라도 한 줄 알겠다.”
종은은 못 본 사이 한국에서 있었던 친구들의 이야기와 본인이 미국에서 겪은 일들, 경험한 것들 그리고 안나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오랜만에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고, 그곳에서 찾아온 생각들도 풀어 놓아야했다. 우선 가장 기다렸을 이헌을 위해서라도.
“걱정한 거지. 어떻게 한 달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없냐?”
종은은 무시했고, 이헌의 차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어디로 가?”
“일단 밥부터 먹자. 최종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미국 느끼한 것만 먹었을 거 아냐?”
“음...딱히 먹고 싶은 건 없고. 오랜만에 셋이 술이나 먹자.”
“또 술이야?”
“환영주 마셔줘야지.”
“먹고 싶은 거 없냐며. 한국 술, 소주.”
낮부터 아무도 없는 술집에 단 이들만의 세상인 듯 센터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단골 술집. 나이 스물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무렵부터 줄곧 찾은 곳. 아제는 주문하지 않아도 사장님은 늘상 같은 메뉴, 같은 자리만 고집하는 이들에게로 알아서 가져다주신다.
“이렇게 셋이 다 모인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동안 얘가 없었거든요.”
정규가 종은을 가리키며 친근한 듯 말했다.
“어디 멀리라도 다녀왔나?”
“네. 저 해외 나갔다가 오늘 귀국했어요.”
“어유 그럼 이런 걸로 안 되지. 번데기 탕 어때? 미국에도 번데기가 있나?”
장난기 많은 사장님은 농담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뭐했는지 말 좀 해봐라. 궁금해 죽겠네.”
“그러게. 뭐했는데 선물 하나 안 사오냐? 열쇠고리라도 사올 줄 알았더니...”
“또 선물 타령이냐?”
“니는 좀 그만 설쳐.”
“그냥 여기 저기 구경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떠돌다가 왔지. 그래도 한국이랑은 달라서 새로운 것도 많더라.”
갑자기 사장이 서비스라며 번데기 탕을 놓고는 사라졌다.
“사장님은 여전히 귀여우셔..”
귀엽다고 말한 사장은 사실 그렇게 귀여운 외모를 소유한 자는 아니었다. 다만 외모와 달리 행동이 너무 아기자기해서 이들이 붙인 별명이 큐티남일 뿐. 무성한 수염에 험악한 얼굴, 사계절 내내 반바지를 고집했기 때문에 길 가던 아이들은 두목님이라고 피하곤 했다.
정규와 이헌은 다시 종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네 폴리아모리가 뭔지 알아?”
‘폴리아모리?’ 이헌과 정규는 동시에 그게 뭐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비독점적 연애주의.”
종은은 둘에게 폴리아모리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 주었고, 이헌에게 질문했다.
“나랑 동업할 거야? 내가 어떤 사업을 해서 어떻게 망할지도 모르는데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뭐할 건데? 일단 계획이나 들어보자. 미국까지 간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종은은 무시하고 말했다. 동업할 사람은 본인과 비독점적 연애를 시작해야한다고. 그래서 제안했다. 본인과 비독점적인 연애를 시작하겠느냐고.
그리고 ‘시장’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상점을 오픈할 것이라고. 그곳은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싶다고. 그곳을 함께 운영할 동업자를 찾는데 조건이 있었다. 이헌은 종은과 동업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5년을 이끌어 온 상점이 [시장]이다.
상점 오픈 준비는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 됐다. 위치는 인적이 드문 골목 모퉁이로 정했고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곳.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곳. 인테리어 또한 대충대충. 손이 가면 가는 대로 눈이 가면 가는대로 정리했다. 각을 잡거나 색을 맞추지도 않았다. 색감이란 오로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객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팔기도 했고, 책을 팔기도 했다. 여행하다 모은 기념품을 팔기도 하는 그곳에선 최종은의 욕심으로 가득했다. 아마 그녀의 욕심을 팔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아무도 모를지 몰라도 유이헌은 알았다. 최종은이 본인의 욕심을 모아 팔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욕이 아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냈다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 직업이 뭐라고?”
“저기 간판 없는 옷가게 사장. 그런데 보기보다 나이가 좀 많더라.”
“몇 살인데?”
“서른 넷.”
“왜 만나는데?”
“가정적인 면이 좋아서?”
처음엔 육체적인 사랑 혹은 의견 차이에 대한 소재로 연인과 또 다른 연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그렇게 6년째 여러 형태의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를 공유했다. 둘 사이 서로의 연애에 대해선 어떠한 비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의 고민을 털어 놓았고, 해결책을 찾아주기도 했다.
둘 사이 장애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들의 연애는 순조로웠다.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비밀이라도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는가. 소수의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3회
3. 사고의 전환 그리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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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토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덤벼보자!
두려움에서 벗어나 저지르고 보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살아가며 몹시 많은 것들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작에서부터 겁쟁이가 돼버리곤 한다.
그것을 보완해줄 수 있는 매체가 있는가?
먼저 둘러보는 게 좋을 것이다.
있다면 꼭 붙잡아야만 한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에 붙잡고 있는 존재처럼.
종종 시장의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정규가 찾아온다.
“ 나 왔다.”
아직 시장에서의 시간을 즐기는 손님들을 위해 누구도 정규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친구가 왔다고 괜히 상점 안 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야, 왔냐?”
마지막 손님이 나간 후에야 정규에게 관심을 주는 친구들. 하지만 그렇다고 서운해 하는 정규가 아니다. 익숙하다는 듯.
“얼른 문 닫아. 간판 불 꺼!”
이날이 절대 잊히지 못할 날이 될지는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몰랐다.
‘시장’의 간판 불을 끄고 블라인드를 내렸고, 매장 안 깊숙이 넣어둔 캔맥주를 꺼냈다. 창고에 박아둔 우유박스 몇 개를 꺼내와 뒤집고는 그 위에 날로 남은 디저트를 얹어 놓고 그들의 담화까지 더해지면 최고의 술안주가 되었다.
정규의 고백을 들은 순간 종은은 뉴욕에 머무르고 있을 안나가 떠올랐다. 아니, 안나가 아닌 그녀의 친구 잭슨이 떠올랐다.
뉴욕에서 만났던 안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단짝 친구인 잭슨, 안나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성애자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중학교 다니던 시절 잭슨을 따돌리던 아이들과 안나의 피부색을 놀려대던 아이들이 같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로 그 둘은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속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개월 이후 둘은 괴롭히던 아이들을 괴롭혔다고 말했다. 물론 상상으로만...
“그러다가 내가 잭슨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졸업식에서야. 궁금하지 않아?”
“뭐가 궁금하단 건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잭슨 비밀.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아니다. 그날도 난 그렇게 놀라지 않았어.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하던 난 이해가 안 갔어. 숫기 없던 잭슨이 어떤 애한테 다가가더니 고백을 하더라고.”
“사춘기 소년이잖아,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게다가 졸업식인데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안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남자였다면 상황은 달라질 거야.”
종은은 놀랐다. 안나에게는 들키지 않으려 표정을 감추었다.
섭리를 거스르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고백 받은 남자애 반응은 어땠어?”
“걔뿐만 아니라, 고백 받은 애까지도 주위에서 듣고 있던 모든 졸업생들의 놀림감이 됐지.”
‘그럴 만도 하지.’ 최종은의 입이 움찔 거렸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에이즈란 원숭이들의 병이었다는. 인간이 유인원과의 교미를 통해 변형 바이러스가 생성이 되었고. 이제는 인간에게까지 감염되는 전염병이다. 동성애자들에게는 특히나 전염성이 더 높은 병. 현재 의학으로는 불치병은 아니지만 난치병,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하는 취약한 병이다. 그들을 나무라자는 것은 아니지만 왜 본성을 거스르려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했는데?”
“아무렇지 않았어. 주위에서 수군대던 다른 아이들만 내 눈에 거슬렸달까? 그냥 아무렇지 않게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지.”
사실 종은은 잭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규를 잠깐 스치듯 떠올렸다.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졸업식 날의 안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정규를 인정해 주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동성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 것일까? 자신이 너무 갇혀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그래서 니들 내가 이상해? 듣고 나니까 친구도 못하겠어?”
“언제부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나더라고.”
종은은 생각을 정리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 있어?”
그녀의 물음에 오히려 정규가 더 당황한 듯했지만 어느새 그들은 서로의 연애관에 대한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내 남자친구 한 번 볼래?”
4회
4. 브레이크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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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은 개인이 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나는 이야기했다. ‘잠시’라는 불특정한 짧은 시간을 내어달라고. 애매한 의미의 시간은 확실하게 특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각자의 시간을 할애할 만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거나 지루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실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종종 쓸데없이 걱정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잠시였으면 하지만, 이 또한 곧장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중요한 사실도 금세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잠시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무한한 긍정과 부정을 표현하고, 결국 남는 것이 후회뿐이라는 허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자신을 속이고 가면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솔직함이 오히려 실수를 덜어줄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며 굳이 나까지 나를 각박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오후 2시,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종은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종종 낮잠을 자기도 하고 잠시 차를 끌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들어오곤 한다. 오늘은 점심을 사러 간다며 이헌을 혼자 남겨두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난 시간이라 한가했다. 혼자인 틈을 타 음악 감상이나 하려는데 좋아하는 엘피판을 골라 턴테이블의 바늘을 얹자마자 입구에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안면이 있는 남자였다.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Izzy Bizu 의 Faded 이 매장에 울려 퍼졌다. 인근 편집숍의 사장이었다.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친하진 않지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종은에게 익히 들어왔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에 난 덥수룩한 수염 독특한 옷차림. 그러나 지저분하다거나 답답해 보이지 않은. 오히려 밋밋한 그의 페이스를 꾸며주는 것 같달까? 들어왔던 것처럼 자신을 잘 알고 어떻게 행동하고 보여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마치 신사라도 되는 듯. 걸음걸이는 튀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이헌은 그가 시장에 온 것이 음료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종은 때문이란 걸 알았지만 모른 체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을 걸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문득 갑자기 아는 척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이스 라테 한 잔 주세요.”
음료를 제조하는 동안 이헌의 정신은 온통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저 궁금했다. 그리고 신기했다.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었다. 종은이 왜 저 남자를 사랑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매장 안에 단 둘뿐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대화가 오갈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정적을 깬 건 전화벨 소리였다. 들이 동시에 핸드폰을 찾았다. 전화벨의 주인공은 남자였다. 이헌은 남자의 테이블에 음료를 놓아주고는 다시 카운터에 앉았다.
어. 집에 들어갔어?
응.
숙제는? 벌써 3신데 얼른 가야지.
얼른 간식 먹고 가~
그래. 나도 사랑해.
일부러 통화내용을 엿들은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남자의 말소리만 들리니 귀에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종은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그녀는 낯 간지러운 ‘사랑한다’라는 말이라든지 전혀 저 대화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본인에게는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표현한 적이 없었기도 했고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일단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헌: 야 최종은!! 그 남자 왔음
종은: ??
이헌: 있잖아
수염 있고
편집숍 사장인가?
종은: 아 화성 씨?
이헌: 이름이 화성이야? 되게 독특하네
암튼 그렇다고
종은: ㅇㅇ 나 곧 감
5분은 지났을까? 정말 몇 분이 채 안 돼 그녀가 도착했다.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성을 발견하곤 반갑다는 듯 그의 옆자리에 앉아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본인과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행복해 보였다. 이는 질투가 아닌 축하의 마음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은 화성이 시장에서 통화 속 상대방이 누군지 알았다. 화성은 이 연애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종은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직접 봤을 때 꽤 괜찮은 사람인 듯했다. 그 처음 시장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그의 통화내용을 듣기까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된 강요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우리’라는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정규는 본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고백한 후로는 여러 명의 애인을 만난다고 했고 가끔은 소개해주기도 했다. 시장엘 데리고 오기도 했고, 이별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어떠한 조언도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디어 그의 자아를 찾은 것에 만족하고 아픔 또한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세상이며 종은은 그런 생물들을 감상하며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한번은 정규가 시장에서 여느 연인들이 하듯 흔히 하는 사랑싸움을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무척 격앙된 어조의 두 남자의 싸움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겠냐?”
“응. 말을 해야 알지. 내가 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하…. 답답해 죽겠다. 정말.”
정규의 열변이 끝났다. 정규의 남자친구인 아인은 고함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종은과 이헌은 그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이 귀엽다는 듯 몰래 웃었다. 이제 막 사랑을 알게 된 정규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과거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는 듯 곧 저러다 말리라는 것도 안다는 듯.
아마 그때 둘은 같은 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날은 종은이 선을 넘은 날이다. 솔직히 연인이 더 나은 연애를 더 나은 선택을 했으면 하는 게 당연하다. 둘의 연애에서 처음 실수를 범한 날이자 다시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날이다.
5년 전, [2015년, 가을]
서로의 합의로 연애와 창업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싶었다. 그러던 중 이헌에게 먼저 새로운 여차 친구가 생겼다. 종은은 처음엔 축하해 주었고 서로 새로운 그녀에 관한 대화도 많아졌다. 그녀는 이헌이 다른 여자와 사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먼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관계를 맺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이 그녀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예송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여태껏 이헌이 여자친구라고 소개해준 사람 중에 가장 얼굴이 하얗고 키도 컸다. 그냥 예뻤다. 예쁜 게 아닌가? 참하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인 것 같다. 시장이 오픈하고는 종종 시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종은과도 인사는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그러던 사이 종은도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
둘은 서로 다른 연인들과 있었던 일 혹은 불만 등을 토로하며 고민거리를 해결했다. 심지어 상대와의 잠자리까지도.
심술이 난 걸까? 그녀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다짜고짜 이헌에게 예송과는 헤어지라 말했다. 이헌이 화를 냈다. 그는 웬만해선 화 내는 법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연인들과의 사이에서 지시나 강요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종은이 명령조로 말했다. 예송과 헤어지라고.
이헌은 몹시 화가 난 듯 보였다. 종은이 예송과 헤어지라 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화를 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야, 네가 뭔데?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데!”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하…. 답답해.”
종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과 함께 뱉어낸 말에 놀랐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그것도 면전에 대고 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누구나 극한 상황에 닥치면 인지하지 못하고 속마음이 튀어나오곤 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는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이후 둘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듯, 결국 참다못한 이헌이 정색하며 먼저 말했다. 진짜 넌 내가 꼭 싫어하는 말만 골라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후 그는 종은의 수십 번의 사과에도 호응하지 않았고 시장을 뛰쳐나간 뒤 일 주일간 들어오지 않았다. 이헌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간 서로가 서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헌이 돌아온 후로 다시는 서로의 다른 연인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상처만 줄 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뿐더러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상대의 고민과 연애상담은 지속되었지만, 더 이상의 서로의 연애관에 대해 충고나 간섭 따위는 하지 않기로 각자 결심한 것이다.
항상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던 이헌의 마음 한켠에도 아픔이 존재했다. 겉으로는 우직하고 든든한 듯 보였지만 가슴 한 구석 패인 상처. 유이헌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거의 모든 이야기를 공유했다.
“헌아, 쇼핑갈까?”
“좋아요!”
특히 그는 엄마에게는 딸 같은 존재이다. 남동생과 이헌, 아들 둘뿐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딸 같은 구석이 많은 아이였다. 연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엄마와 꼭 붙어 걷고 대화도 끊이지 않았다. 가끔 엄마는 어린 이헌에게 형 노릇을 바랄 때가 있었다. 고작 그의 나이 다섯 살. 말을 갓 뗀 때였을 때였다. 동생과 연년생으로 태어나 친구처럼 지내왔다. 지금까지도.
그러나 유년 시절의 이헌 본인은 항상 결핍 속에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이헌에게 첫째라는 이유로 바라는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헌을 타박한다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이헌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어우 답답해. 왜 말을 안 해?’ 이헌이 울고 있는데 엄마의 왜 우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린 이헌은 자신도 아기인데 동생만 두둔하는 것 같은 느낌에 서러워서 운다고, 나도 아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말을 내뱉는 순간 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일까? 어릴 적 엄마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답답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때부터일까 답답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인지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헌은 그 단어가 너무나도 싫었다. 본인은 절대 답답하다는 말을 뱉지 않기로 했다.
선의의 거짓말
이런 게 선의의 거짓말일까? 아님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니라면 혹시 그녀가 나를 속이는 것일까? 분명 그저 연애 못 한지 오래 된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서로의 연인을 다른 곳에서 보았다거나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발언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만약 종은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이것은 말이 달라진다. 연인관계 혹은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솔직히 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여행을 떠난 지 보름이 되었을까? 우연히 그 남자를 마주쳤다.
“아빠~”
“학교 다녀왔어?”
그리고 그 남자에게 달려오는 아들도. 아이는 그를 몹시 닮아있었다.
5회
5. 악마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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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인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자신을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한 인간이란 존재하기는 할까? 문명의 발달로 많은 것들이 생겨났고, 생활은 편해졌다. 그만큼 불필요한 것들도 무지막지해졌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옷 따위의 천 조각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 천은 점점 자신을 꾸미기 위한 장신구로 변했다. 얼굴을 분장할 화장품이라는 도구를 발명했고, 심지어는 손발톱까지 꾸미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할까? 사실 잘 모르지만 한번 알아보려한다.
‘함께 출근하는 날이면 나는 시장에 깔리는 음악 선곡을 그 아이에게 양보하곤 했다. 때때로가 아니라 거의 항상. 이런 혼자 있는 날들이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랄까?’
하지만 매일 오픈시간을 지켜야한다는 건 고문과도 같았다. 때때로 10분씩은 기본으로 지각을 일삼았다. 이번 주는 유난히 혼자 사색에 잠기곤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오늘도 역시 지각인데 절대 급하게 구는 법이 없다. 그것보다 아침부터 그 남자, 화성의 편집숍이 눈에 띄었다.
그 남자에게 달려오던 아이는 그를 몹시 닮아있었다.
종은이는 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이 마치 자기 옆에라도 함께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최근 알게 된 화성이라는 남자. 그는 가정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어 만나기 시작했고, 곧 연인사이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어쩐지 맞은편 모퉁이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편집숍에서 옷가지들을 여럿 사오는 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했다. 그 덕에 이헌은 자주 옷이나 액세서리 등을 선물 받았다.
종은의 말만 들어도 그는 몹시 종은을 보듬을 줄 아는 어른 같았다. 이헌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그. 그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들의 약속은 약속이니까. 서로가 피곤해질만한 일들은 만들지 않기로 비밀 또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유이헌이라고 합니다.”
“전 종은 씨 남자친구 화성이라고 해요. 종은 씨 통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종은이 처음으로 다른 연인을 소개해준 이가 바로 그였다. 처음엔 뭔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에게도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수밖에 없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임이 분명했기에. 시간은 흐르고 지나가는 것. 유유히 흘러가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 같다.
6회
6. 잡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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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나를 기록하는 수단이자 기억 보관함으로 정의 내리려고 한다. 사실 일기를 쓴다기보다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적은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번씩 꺼내어 보면 그때 당시를 느낄 수 있다. 과장하자면 냄새까지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랄까? 그래서 보관함이다. 그 속에 나를 담는 것이다.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았거나 새로운 만남, 간직하고 싶은 장소들을 끄적인다. 현대화 된 모바일 시대에 굳이? 굳이. 굳이 그러는 이유는 그냥이다. 왠지 곱씹으면서 한 번 더 되새기고 싶달까? 가끔 술에 취해 적었던 글들을 보면 괜시리 웃기고 슬프고 그립다.
대개 마음대로 하는 편. 사람들은 내가 별나다고 하지만 내 시선에선 나를 그렇게 판단하는 그들이 별나다. 도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격이라도 주어진 것처럼 행동한다. 알고 보면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생각보단 행동이 앞선다. 어딘가 떠날 때면 항상 메모지나 종이 쪼가리와 네임펜을 갖고 다녀야 안정이 된다. 필수품이랄까? 여자들은 화장품 없이 특히 립스틱이 없으면 불안함을 느낀다. 초조해하며 금단현상 비슷한 이상증세를 보인다. 소지품들 중 종이와 펜이 없으면 꼭 그런 것 같다.
여행은 혼자가 좋다. 혼자만의 여행이야 말로 진정한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여행은 혼자 떠나 바다를 보는 것도 좋다. 작은 레이를 빌려 후방주차를 한 후 트렁크를 열고 앉아 김밥 한줄과 컵라면은 환상적이다. 비가 오거나 날이 좋아도 말이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객들은 혼자 왔다 하면 용감하다며 더욱이 용기를 북돋아 준다. 사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아니 나쁘게 말하자면 자기중심적인 일과의 시작일 뿐인데. 뚜벅이들을 태워주기도 하며 각자의 직업관 혹은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