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912
1회
[프롤로그]
“잘 잤니?”
잠을 깨우는 인사와 함께 눈이 떠졌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으며 곡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거야. 또 많은 상처를 받겠지.”
“더 잃을게 있었던가요? 이제 더 이상 상처받을 것도 슬퍼질 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걱정해주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부러진 검들과 창, 여러 총기들이 널브러진 끝이 보이지 않는 복잡한 대지를 계속 해서 걸어 나갔다.
처음 보는 장소임에도 마치 수십 번을 와본 듯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기...... 저...요?”
뒤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는 여태까지 걸어왔던 땅은 온데간데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다가오는 어둠만이 있었다.
그 어둠이 서서히 나의 몸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하였다.
숨이 막히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져 비명을 지르려하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 ◆ ◆ ◆ ◆ ◆ ◆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당알바, 새벽에는 편의점 알바, 가끔 공휴일은 놀이동산 알바.
알바만이 가득한 이 인생의 당첨자는 바로 윤민수였다.
그가 처음부터 고단한 인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윤민수가 13살이 되던 해 5년 전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른 후 집안의 모든 것이 틀어졌다.
윤민수의 어머니는 세 아이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시다 과로로 쓰러지는 것이 빈번했다.
성인이 된 윤민수는 어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잠 깨셨으면 이거 계산해주시죠.”
눈을 뜬 윤민수의 앞에는 10대 후반정도의 외모로 보이는 금안을 가진 소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과자 2봉지를 내밀었다.
가게 뒤편 산을 두고 있는 이 편의점은 술 먹고 오는 취객이나 야식거리 사러 오는 손님들 이외에는 손님이 없어 이곳에서 새벽알바를 하던 윤민수는 2시간가량 단 한명의 손님도 없어 그만 잠이 들었었다.
“아,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졸아버렸네요. 바로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윤민수는 몽롱한 기분으로 과자봉지를 바코드 스캐너로 찍었다.
“총 3,300원 되겠습니다.”
“얼음 조심하세요. 많이 차가울 겁니다.”
“네?”
두서없는 대화에 당황한 윤민수를 뒤로 하고 살며시 미소를 짓던 소년은 금빛 안광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저기 결제…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귀신같은 것들을 많이 보아온 윤민수이었기에 무섭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팔과 다리는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이젠 하다하다 귀신이 물건 들고튀네.’
계속해서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윤민수는 휴대폰을 꺼내어 신문 기사를 뒤적이기 시작하였다.
새벽 편의점 알바 도중 할 것이 너무 없어 생긴 취미 중 하나였다.
기사를 뒤적이던 중 조회 수가 많은 기사하나가 윤민수의 시선을 끌었다.
서울 중심으로 퍼진 사이비 종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교주를 필두로 한 사이비 종교 집회가 금일 오전 11시경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세상이 곧 종말을 맞을 것이며 심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짤막한 기사와 동영상과 함께 사이비 종교 교주라고 여겨지는 인물의 사진이 있었다.
조회 수가 많은 것 치고는 별거 없는 내용이라 김이 샌 윤민수는 휴대폰을 끄고 바깥 청소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세상 망할 거면 빨리 망해주지 않으려나. 에휴…… 청소나 해야지.”
윤민수는 불평을 내지르며 편의점 바깥 테이블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짜증나네.’
문득 청소 도중 귀신에게 물건을 도둑맞은 것이 생각난 그는 분노를 엄한 맥주 캔을 짓밟으며 풀었다.
그런 그의 엄한 분풀이는 누군가 그에게 다가옴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 ◆ ◆ ◆ ◆ ◆ ◆ ◆
푸석푸석해 보이는 백발과 말라서 쩍쩍 갈라진 피부에 RPG게임의 마법사라면 이러한 옷을 입어야 마법사라는 느낌의 로브와 손에 색색의 보석이 박힌 장신구들을 하고 있는 이 사내의 이름은 켈른 베르노로 그는 현재 무언가에 쫓기듯 수풀을 헤치고 뛰쳐나왔다.
켈른은 거친 숨을 내쉬다 피를 토하며 울분을 내 뱉었다.
“헥.......헥.........캬학..... 개 같은 것들 이 켈른 베르노는 아직 죽을 수는 없단 말이다!!”
그의 신체 곳곳에 깊은 자상이 새겨져있었으며 왼쪽 팔 하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어딘가 숨을 장소가 필요하다. 타이밍 좋게 나온 구멍으로 나와서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빠르게 생존할 수단을 찾아다녔다.
‘찾았다!!’
“자네, 내가 가지고 있는 보석을 줄 테니 어딘가에 나를 숨겨줄 수는 없겠는가?”
우연히 도착하게 된 편의점을 청소하던 윤민수를 발견한 켈른은 기쁜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 부탁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처음 온 장소의 언어가 같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켈른의 말을 윤민수는 알아듣지 못했다.
“저기, 음… Can I help you? Go to the hospital?”
갑작스레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켈른을 외국인이라 생각한 윤민수는 영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였다.
“하…… 언어체계조차 다른 건가.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미안하게 되었네. 잘 가게, 이계의 남자여.”
“영어… 할 줄 모르시는 건가요? 다른 외국어는 못하는데….”
더 이상의 의사소통은 무의미하다고 느낀 켈른은 윤민수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벗어 그의 손에 쥐어 주고는 빠르게 지나갔다.
“어!? 저기요? 오늘 무슨 날인가.... 심하게 다치신 거 같던데 119에 연락이라도 해야...... 폰은 또 왜이래?”
분명 청소전까지 잘 사용했던 윤민수의 휴대폰의 전원이 꺼진 상태로 있었다.
휴대폰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보조배터리를 연결해보기도 하였으나 전원이 켜지지 않고 오히려 켈른에게 받은 장신구들만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뿌드으득!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한기와 함께 무언가 뚫리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빛나는 장신구들을 바라보던 윤민수의 앞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어딘가 연예인이라 해도 될 정도의 외모와 하얗디하얀 피부와 금색의 눈을 가진 그녀를 보며 심장이 요동쳤다.
정확하게는 요동쳤어야했다.
요동쳐야 했을 윤민수의 심장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이물감과 함께 몸이 차가워지자 정신을 차린 윤민수는 그제야 그녀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그 무언가가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어!?째……ㅅ…”
문득 윤민수의 머릿속에 오늘 만난 귀신의 말이 맴돌았다.
‘얼음 조심하세요. 많이 차가울 겁니다.’
그의 몸이 서서히 얼어붙으며 감각이 사라져 손에 들고 있던 모든 물건을 떨어뜨렸다.
흐려지는 시야 속 그는 자신을 찌른 여성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완전히 얼어붙었다.
1. 개전(開戰)
끝없이 어두운 장소에 또 다시 혼자 남겨졌다.
매번 꿈 속 마지막 장소였던 곳이었으나 이번엔 처음부터 이곳이다.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어머니와 동생 둘을 남겨두고 온 것이 걱정 된다.
슬픔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에 얼어 죽어서 그런가.
사후세계 어쩌고 하더니 역시 그런 건 없는 건가.
이런 장소면 외로워서 또 죽을지도 모르겠네.
즐거운 삶…은 아니었……네
“땡!”
“땡!”
“땡!”
편안한 잠과 같은 것을 즐기고 있던 윤민수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과자 2봉지를 뜯어간 귀신 놈이 있었다.
“얼음 땡 몰라? 땡 하면 움직여야지. 반응이 너무 느린 거 아니야? 하긴 그래서 창 맞았지?”
“난 죽은 거야? 넌 귀신이 아니라 저승사자였어? 여긴 대체 어디고? 그릭.......”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훔쳐간 과자를 윤민수의 입에 넣어 말을 끊고 질문의 대답을 하였다.
“죽었긴 하지 한 80%정도? 안타깝게도 난 귀신도 저승사자도 아니야. 그리고 이곳은 네 영혼 속이지. 텅 비었네. 텅 비었어. 일단 우선 앉아서 이야기 할까?”
그의 말이 끝나며 윤민수가 80%정도 죽기 전까지 일했던 편의점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신기해 할 틈도 없이 자리에 강제로 앉혀진 윤민수는 질문을 이어갔다.
“80%죽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죠? 그리고 왜 이런 곳으로 온 거죠?”
“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일단 살아날 수 있게 됐어. 축하해!”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윤민수는 당장이라도 싸우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쿱! 왜? 잘못된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끝! 간단하지?”
정말 어이없는 말이긴 하였으나 딱히 뭐라고 불만을 토로할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기에 윤민수는 계속 해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하였다.
“간단해. 이 <케리어넨>에 참여 해줬으면 해.”
“<케리어넨>?”
“음…… 일종의 게임 같다고 보면 되. 던전이 열리고 그걸 클리어 하면 보상이 내려지고… 그래 너를 죽인 그 여자, 신명 : 프리지아. 헬의 계약자로 이게임의 참여자야.”
윤민수는 이곳에 오기 직전의 장면이 다시 떠올라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나보고 지금 살인게임에 참여하라는 거야?”
“살인…… 그건 네 선택에 달린 거고, 그래서 해? 말어? 안 할 거면 그냥 여기 있으면 알아서 영혼 인도하러 오니 뭐.”
“오케이, 알았어. 하면 되잖아!”
고민할 시간도 없이 윤민수가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눈앞에 계약서와 박쥐인형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거 집에 있던 인형이잖아?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눈앞의 박쥐 인형을 윤민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주고 간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영혼 속이니 네 기억에 있는 건 뭐든 꺼낼 수 있지. 도우미 AI야. 자세한 사항은 그거에게 물어봐.”
곧바로 사인을 끝낸 계약서를 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윤민수는 박쥐인형을 집어 들었다.
{마력 반응 확인 : 가동}
기계음이 나오며 인형이 움직였다.
“안녕하십니까. <케리어넨> 도우미 AI 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페티오님.”
“레페티오라니?”
“신격을 가진 존재와 계약을 하면 받게 되는 이름입니다. <케리에넨> 생활을 오래 하시다보면 아마 본명보다는 이쪽 이름을 많이 사용하시게 될 겁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많은 상황을 따지기 위해 윤민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으나 바쁜 듯 움직이는 그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자세한건 저거에 물어보라니까? 일단 네 몸 좀 빌리자. 여기서 열심히 뭐든 하라고.”
다시 한 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윤민수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긍정의 표시를 보냈다.
“아 맞다 나는 뭐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면 돼. 이름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
해맑게 웃으며 하반신부터 흐릿하게 사라지는 그를 보며 윤민수는 속으로 다짐하게 되었다.
‘미친놈.....’
2회
“단장,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리고 왜 연…락…을?”
프리지아에게 불만을 표출하려던 사내는 그녀의 창이 심장을 꿰뚫려 전신이 얼어붙어 있는 윤민수와 당혹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레임?! 여기 던전 속이지? 그런 거지?”
그녀에게 레임이라 불린 남성은 「현자의 서」의 주인으로 그의 머릿속은 현재 장소의 정보가 빠르게 모였다.
그는 이곳이 어떠한 장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대답이 현재 프리지아의 당혹감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음....... 여긴, 단장. 침착하게 들어. 지금 최악의 상황이야. 여긴 <케리어넨>이 만든 던전이 아니야.”
프리지아는 레임의 대답에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놓고 털썩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살인은 금지. 약자를 지키며 행복하게!’라는 마음으로 <케리어넨>의 세계를 살아온 그녀였기에 이번 일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뭐?! 던전 속 엘리트가 그딴 작은 구멍 하나 생겼다고 밖으로 나온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이거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지? 그저 엘리트를 처리하기 위해 가는 길에 있던 몬스터 하나를 잡았을 뿐이지? 그래.... 여긴 아직 던전인거야.”
불안감에 속사포와 같이 빠르게 말을 내뱉는 프리지아가 레임은 걱정되었으나 현재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린 지금을 정리해야만 하였다.
‘예상보다 큰일인걸....’
<케리어넨> 2규율 : 던전 참가 후 차폐 진행 혹은 과부하 전까지 나갈 수 없다라는 규칙이 무너졌다.
불과 20분 전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리지아와 레임 이하 <거짓된 평화> 단원들은 치명상을 입고 도망친 엘리트를 추적하여 던전의 끝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최후를 맞이할 엘리트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그곳에는 아무리 강한 충격을 가하더라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던전의 경계가 칼로 베인 듯 세로로 찢긴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균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단원들과 의논하던 중 단장의 ‘감’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균열을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상황이란 말이지..... 응?’
주변을 둘러보던 레임은 얼어붙은 윤민수의 발밑에 떨어져있는 장신구를 주워들었다.
‘아티펙트...... 환영계열인가...’
아티펙트, 던전을 클리어하면 주어지는 보상 중 하나로 마정석에 저장되어 있는 마나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도구로 신체능력 강화계열, 환상형 계열, 속성 강화·저항계열, 저주계열 등의 종류가 있다.
그 중 환상형 아티펙트는 등급이 높을수록 실체와의 차이가 줄어든다.
이 환상형 아티펙트의 존재를 알 리 없던 프리지아는 윤민수를 자신이 쫒던 엘리트라 생각하고 찌른 것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기를.”
사고사로 처리가 될 윤민수의 명복을 간단하게 빌어준 레임은 패닉에 빠진 프리지아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콰득! 쿠드득!
“아으, 이번에는 책벌레인가.... 귀찮네.”
몸 주변에 붙어있는 얼음을 깨며 윤민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심장을 꿰뚫었던 창은 어느덧 그의 왼손에 들려있었으며 찢어진 윗옷을 제외하고는 어디 한군데의 상한 곳도 없이 멀쩡히 서있었다.
‘미친!! 죽은 거 아니었어? 지금 상태의 단장이면 전력 외니, 다른 단원들의 위치 또한 파악 되지 않고 있으니…. 일단 단장의 대피가 우선이다.’
“다…ㄴ 크헙!”
레임은 그녀의 얼음을 부수고 나온 분명 일반인이었을 남성의 모습에 불안감이 생겨 「현자의 서」의 힘을 통하여 남성의 정보를 가지고 도망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 시야에서 사라진 윤민수가 레임의 눈앞에 나타나 그의 머리를 땅에 내리 꽂아 버림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정보 확보가 우선이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쥐새끼처럼 행동하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레임에게 윤민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현자의 서」의 주인이 그저 머리에 든 것만 많은 사람은 아닐 텐데 말이야. 허락된 선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느껴질 텐데? 물론 볼 것도 없긴 하지만…… 안 그래 기록관?”
레임이 가지고 있는 「현자의 서」는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이계의 지식 또한 담겨있는 기록서로 그것이 어떠한 위치에 있던 주인이 원하는 대상의 정보를 알 수 있다.
덤으로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 존재이자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레임은 강제로 「현자의 서」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레임의 눈앞에 펼쳐진 공허한 화면은 그를 당황시켰다.
단 한번도 이러한 경우는 없었다.
하다못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조차 짧게나마 정보가 있었다.
온몸이 격통을 호소하고 있었으나 처음 겪는 상황에 레임은 경고를 받았음에도 당혹감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째서 비어……있는 겁니까.”
“허! 미친놈.”
레임의 집착에 질린 윤민수는 마지못해 그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선을 넘었거든. 아니 넘다 못해 다시 그렸어. 나-는. 이정도면 충분한 대답이겠지?”
“당신은…요. 그……렇습니까.”
윤민수의 대답이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으나 그의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레임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거 잠시 빌린다?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 하니까 말이야.”
윤민수는 손에 든 창을 흔들며 아직까지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프리지아에게 대답을 원하지 않는 일방적인 질문을 하였다.
그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프리지아는 분명하게 숨이 끊어졌을 윤민수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당혹감보다 안도감이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다…다행이야. 죽지 않고 살아있었?’
문득 확실히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해서 살아나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저기, 혹시 언데드라거나 그런 비슷하신 건 아니죠?”
프리지아는 이쪽세계 사람에게는 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상한 사람취급 받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까랑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라…’
“언데드? 크하하하! 아후... 뭐 이 녀석은 그런 부류이긴 하지. 그보다도, 저기 쓰러져있는 책벌레 외로워한다. 가서 도와줘.”
윤민수는 한바탕 웃으며 쓰러진 레임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프리지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잘 봐둬.”
“예?”
쓰러져 있던 레임에게 가고 있던 프리지아는 고개를 돌려 윤민수를 바라보았다.
“『★◆■▲★★※◆▼※』”
그는 창을 앞으로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을 중얼거리며 두 눈에서 붉은 두 줄기의 선혈이 흘러내렸다.
중얼거림이 멈추자 그의 주변에 모든 것을 얼려버릴 정도의 한기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저승의 망자들이여, 명을 받들라. 나의 적을 이곳으로 끌고 오거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던 마지막 구절과 함께 그는 창을 바닥으로 내리치며 주변에 있는 한기를 밀어냈다.
밀어내진 한기가 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잠깐 주변을 맴돌다 이내 갈피를 잡아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방금 그거 『기동식』 이죠? 대체…”
“신기하지? 너도 모르는 걸 나는 어떻게 하는가를. 심지어 계약도 하지 않았으면서 말이지.”
상위 아티펙트나 신과의 계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기」는 특정한 『기동식』을 이용하여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나 「신기」의 경우는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지아는 윤민수가 그녀의 마음속에만 담아둔 말을 그대로 입으로 내버리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저...그.그.그..ㄱ..ㅔ.....”
오늘만 대체 몇 번이나 당황하는 것인지 생각하면서 그녀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변명을 하려 하였으나 말 또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와 계약한 녀석을 믿어봐. 힘들다는 건 알겠지만 신은 언제나 믿음에 대답하니까.”
비웃음 당할 줄 알았으나 의외의 답이 돌아오자 프리지아는 멍한 표정으로 윤민수를 바라보았다.
“아! 왔네. 그럼 이제 이 지긋지긋한 첫 만남을 끝내볼까.”
3분전 한기가 지나갔던 방향으로부터 검은 로브에 감싸인 켈른이 날아와 윤민수의 발치에 처박혔다.
“크학! 쿨럭! 케헥!”
땅에 처박힌 충격으로 켈른은 피를 토하며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존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고개를 들어 올려 윤민수와 눈을 마주쳤다.
피로 덮인 얼굴과 파충류 눈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의 적안과 금안의 그가 안광과 함께 숨쉬기조차 힘든 살기로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런 윤민수의 손에는 켈른이 주었던 환상형 아티펙트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가 아둔하여 당신이 아끼시는 인간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켈른은 자신의 본능이 필사적으로 빌지 않으면 죽음이 코앞이라는 것을 경고하여 온몸이 고통을 소리를 지르고 있었음에도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윤민수의 다리를 잡고 처절하게 빌었다.
“이 녀석에게 이걸 주지 않고 도망갔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도망하나조차 제대로 못가는 거냐? 살고 싶다며?”
무표정한 윤민수의 싸늘하고 조롱 섞인 대답은 켈른의 당황한 마음을 차갑게 식히기에 충분한 대답이었다.
“설마....... 당신이 ㄱ..캬학!”
머리를 최대한 굴리던 켈른은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하여 입을 열었으나 그의 가슴팍을 관통한 창 때문에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잡이와 창날에 룬 문자 「헬의 권능」이라 새겨진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
그의 수십 수만 마리의 실험체를 베고 찔러 파괴하였으며, 그의 팔 하나를 앗아갔다.
그의 아티펙트로 인하여 희생될 뻔한 청년의 방식과 똑같이 켈른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게 되었다.
시야가 어두워져가는 도중 켈른은 언어가 통하지 않던 던전과 이세계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윤민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멍청한 흑마법사의 복제품, 그곳에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길어야 2분인가……’
흙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켈른을 뒤로 하고 육체가 얼마 버티지 못함을 느낀 윤민수는 프리지아에게 다가갔다.
“저게 죽으면서 던전이 클리어 돼서 너희 단원들도 탈출했을 거야. 이거를 너희들의 아버지에게 보내. 그러면 나머지는 알아서 되겠지. 그럼, 그대에게 헬의 축복이 있기를.”
윤민수의 손에서 붉은색의 스파크가 튀며 트럼프 카드하나가 생겨났다.
울상의 검은 가면 반쪽과 웃고 있는 나머지 흰 반쪽의 가면이 합쳐져 있는 왼쪽 귀퉁이에 J가 새겨진 카드를 프리지아의 창과 함께 손에 쥐어주며 쓰러졌다.
3회
“꿈도 아니고, <케리에넨>이라……. 이제 뭐 나도 날아다니고 뭐 마법이라도 쓰려나?”
보통사람이었으면 기절이나 부정이라도 했을법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이 상황이었으나 윤민수는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반복 되는 일상을 경험하고 있는 그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흠, 내 영혼이라 했던가?’
어디가 바닥이 모래 같은 재질로 이루어져있다는 것 이외에는 벽이고 어디가 천장인지 알 수 없는 장소였다.
‘계속 이런 곳만 반복 되는 건가?’
슬슬 지루해져가는 때였기에 윤민수는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정말 어이없는 호기심이었다는 것을 멈춰 후회하기를 10여분, 다시 계속해서 걷기를 30분.
결국 윤민수의 호기심이 꺾였다.
‘내가 미쳤지. 뭘 하겠다고 이렇게 걸었는지….’
푸드덕 푸드덕
윤민수는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미친놈이 놔두고 간 AI 백이 날개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크기의 날개로 날아오고 있었다.
“<케리어넨>에..헥 관한..후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질문과 함께 백은 지친 기색을 보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풉! 날 수 있었던 거야? 전혀 그렇게 생기지는 않은 인형이었는데.’
쓰러진 백의 모습에 윤민수는 살며시 조소를 지으며 백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그래, 뭐든 알아야 잘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또, 그……. 이해 할 수 있으려나…….”
서서히 얼어붙어 가던 몸과 그런 자신을 보며 당황하던 프리지아의 모습이 윤민수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며 관통 당했던 부근이 쓰라려 왔다.
‘분명 이 게임에 발을 들이면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열람 가능한 정보들을 정렬해 드리겠습니다.”
백이 말을 끝맺자 A4정도 크기의 화면이 나타나며 윤민수의 시야를 가렸다.
기본정보
규율 ▼
콜레이션 ▼
던전 ▼
아티펙트 ▼
기타 ▼
짧은 5개의 목차외의 다른 내용이 없었으나 비정상적으로 화면의 크기가 컸다.
‘흠… 이건가.’
윤민수는 당연하게도 규칙이라 표시되어있는 곳의 역삼각형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물 표면을 건드리듯 파장이 일어나며 눈부시게 화면이 밝아졌다.
“윽!”
소리가 절로 나오며 윤민수는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빛이 사그라지고 눈을 뜬 윤민수의 앞에 있던 화면 처음과 다르게 바뀌어있었다.
규율 ▲
- 던전의 차폐가 진행되는 동안 가디언의 역량 하에 보상이 지급된다.
- 던전 참가 후 차폐 진행 혹은 과부하 전까지 나갈 수 없다.
- 죽은 자의 육체와 영혼은 던전을 빠져 나올 수 없다.
- 중복계약은 불가능하다.
- ※★■…▼★■○●◆「●★」
- ★■○※…●◆▼★■※★
정말 많은 양이 아니었으나 아직 4개의 목차가 더 남았기에 더 늘어날 것이라 생각하며 윤민수는 천천히 규칙을 읽어나갔다.
“저기, 백 이 가디언이라는 건?”
“가디언은 던전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던전 속 신격체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창조물입니다.”
“그럼 이 차폐? 과부하? 라는 건?”
“차폐라는 건 던전을 클리어 하여 해당 차원이 붕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붕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대로 소멸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후-.”
윤민수를 계속해서 쫒아가던 백은 지쳐 심호흡을 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과부하…는 최악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차원이 붕괴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던전에 참가한 그 누구도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건가’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켈른의 모습이 윤민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계속해서 읽어나가던 윤민수는 새 정보의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응?’
이상하였다.
마지막 두 가지는 글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의 상태로 표기되어 있었다.
“백, 여기 정보가 제대로 안 보이는데?”
“당연하지. 인간의 언어가 아니거든. 그리고,”
질문한 백이 아닌 뜬금없이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민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으나 바로 그 행동을 후회하였다.
“일어날 시간이야, 레페티오. 나머지는 나중에 보도록 해.”
공중에서 내려온 미친놈에게 윤민수는 그대로 안면을 밟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혔다.
격통과 함께 짜증과 분노가 윤민수에게 밀려들었다.
고통에 힘겨웠으나 윤민수는 미친놈을 향해 간신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새끼.”
정신을 잃지 않고자 힘겹게 붙잡은 윤민수의 정신이 다시 한 번 머리를 뒤흔드는 둔탁한 충격과 놓아버렸다.
윤민수가 정신을 잃기 바로 전 미친놈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렸다.
“이번에는 그대에게 그대의 축복이 있기를…, [시더]여”
윤민수가 정신을 잃자 그의 몸은 빛의 입자가 되어 서서히 사라져갔다.
미친놈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고개를 돌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백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멈출…수는 없는 겁니까…?”
감정이라고는 없는 인형으로만 보이던 백은 어느새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짓고 그에게 따져들었다.
“당신은 전지전능하신 분 아니십니까! 대체 왜! 왜! 저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은 안 됩니까? 이게 그 아이의 고통을 끝낼 수는 없을까요? 제발……, 제발……,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의 울분의 끝은 처절한 부탁에 가까웠다.
“[조각]이었던 당신이라면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가 완전히 부셔지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습니다.”
간곡한 백의 부탁에도 짜증을 내지도, 비웃지도, 공감하지도 않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런가요. 제가 잠시 흥분했군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죠. 대체 가능하신 게 뭡니까?”
2초의 침묵, 짧은 시간이었으나 백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비록 실수이긴 하였으나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전하였다 생각하여 백은 고개를 숙였다.
“푸하하하하! 하……. 그러게 말입니다. 운명에 저항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죄송합니다.”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그가 백에게 사과를 하였다.
의외였다.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그의 처음 보는 모습과 사과에 백은 적잖게 당황하였다.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희끼리 감정소모해서 뭐합니까. 흔들리는 거 보니 곧 깨어날 테니, 가셔야죠.”
“아, 예”
마치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주변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죠, 너무 저한테만 뭐라 하시는데…. 이 상황 모두 당신과 이 녀석이 선택해서 인거는 아시죠?”
‘사과하는게 이상하긴 했다만…. 역시.’
백은 어이없는 그의 트집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유리엘한테 생존신고 좀 해주시죠. 그 녀석 마음이 많이 여려서 걱정이 많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끝이 나긴 할련지…….”
“예?”
백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하반신부터 서서히 검은 입자가 되어 사라지며 백에게 말을 전하였다.
“그대에게 유리엘의 축복이 있기를.”
쿠드득! 쿵!
흔들리던 주변이 이제는 갈라지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홀로 남게 된 백은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부디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
“단장과 제가 보고 느낀바, 이 친구랑 계약한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강하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레임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테이블에 앉아 있는 프리지아와 7명의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다.
그들은 <거짓된 평화>의 전투원들로 현재 단에 윤민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안건에 대하여 회의 중이었다.
“그래서? 지금 뭐하는 놈인지도 모르는 저놈을 레이널드 대신 우리 단에 넣겠다고?!”
입을 대각으로 가로지른 큰 흉터를 가진 우락부락한 남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레임을 보며 따져들었다.
이 남성의 이름은 비리(데이브 판델)로 단의 방어력을 맡고 있다.
평소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단원들과 자주 다툼이 있었으나 이번 던전 공략 도중 엘리트의 저항에 목숨을 잃게 된 레이널드 때문에 더더욱 거세게 쏘아 붙였다.
“아님, 뭐 그건가? 단장 실수 때문에 미안해서? 그럴 거면 여태까지 우리 단에 들어오려 했던 재능 있던 놈들을 다 한 번씩 찌르지! 그리고, 이번에도 봐! 또 단장 혼자 잘난 듯 나가다…”
“데이브!”
레임의 호통에 비리는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가 난 레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들 동의할걸? 그러니 레임, 너 말고 아무도 화를 내거나 반박하지 않잖아? 내가 항상 뭐라 했지!? 그딴 식으로 할 거면 그냥 혼자 다녀! 대체 왜! 파티로 가서 우리가 손해 보냐고!”
흥분하여 이성을 잃은 비리는 자신의 분노를 이내 단장인 프리지아에게까지 표출하였다.
“그래. 그럼 잘난 나는 빠져줄게.”
차가운 시선과 목소리로 비리의 불만을 받아치고는 프리지아는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 내가 뭐라 했어! 단장은 얼음인간 그 자체라니까? 감정이라는 게 존재는 하나 몰라.”
안타깝게도 비리의 뒷담과 달리 자리를 박차고 나간 프리지아에게는 후회라는 감정이 머리를 지배하였다.
‘하아……. 망할 저주 때문에 또…….’
그녀는 「헬의 권능」은 사용한 시간에 비례하여 일정시간동안 사용자의 감정이 얼어붙는 부작용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자주 어울리는 프리지아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그녀의 부작용에 관하여 단에서 아는 사람은 레임을 제외하면 없었다.
‘그 사람이나 보러갈까. 약속도 있으니…….’
회의실로 돌아가면 어색할게 당연하였기에 프리지아는 윤민수가 누워 있는 병실로 향하였다.
뚜벅뚜벅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던 프리지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보인 장소는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떠 있는 두 개의 달과 생명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메말라 갈라진 대지.
그 어떤 사람도 이 풍경을 좋다고 할 수 없을 그러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며 프리지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세계네…….”
어느덧 윤민수의 병실 앞에 도착한 프리지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고민에 빠졌다.
‘깨어나셨다면 사과를 하는 게 맞는데…….’
감정이 희박해진 상태였기에 사과가 제대로 전해질지가 미지수였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아직 윤민수가 깨어났는지도 모르는 병실 손잡이만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였다.
그러한 그녀의 결정을 대신 내려주듯 병실의 문이 안쪽에서 열리며 문을 따라 병실 쪽으로 끌려들어갔다.
4회
“으윽! 정보화면도 훑어봤으니 이제는…….”
벽 하나를 가리고 있는 커다란 책장하나와 낡은 나무의자 하나가 있는 4평정도 되는 창문 하나 없는 회색의 어두운 방이었다.
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하얀 침대에 누워 있던 윤민수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테이터스”
윤민수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시야에 정보를 보여줬던 화면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화면이 나왔다.
스테이터스
성명 : 레페티오, 윤민수
종족 : 인간(?)
나이 : 21
레벨 : 5[90]
남은 경험치 : 800
마력 : 5000/5000
힘 : 24 민첩 : 24
친화 : 101[100] 행운 : 0[100]
‘1레벨이 아니라 5레벨? 정보에서 읽은 대로 대부분 맞기는 한데……. 친화가…. 버근…가?’
[]안에 있는 숫자는 한계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친화 능력치는 현재 적은 숫자이긴 하나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친화 능력은 아티펙트 활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능력치이다.
윤민수는 지금 가진 아티펙트가 없기에 당장 초과된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스킬도 확인해보고 싶지만, 우선 저 사람부터겠지….’
딸칵, 딸칵
윤민수는 스테이터스화면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문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문의 손잡이가 귀신이라도 들린 듯 계속해서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참나… 누구기에 안 들어와? 오늘 안에는 들어오려나?’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윤민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손잡이를 당겼다.
‘응?’
그러나 문이 용접이라도 해놓았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손잡이를 당겨봤으나 열리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문 너머의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윤민수는 방에서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힘이 센 거지? 나 어디로 팔려나가나?’
당황한 윤민수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가며 문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런 그의 생각이 안타깝지만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근육질의 남성도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본의 아니게 문을 잡고 있었습니다.”
문 너머에서 나온 의외의 인물인 프리지아에 놀란 윤민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한국말 하실 줄 아시는군요?”
“번역마법에 대해서 신께서 알려주시지 않으셨나요?”
“아,! 번역마법이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군요.”
윤민수는 어렴풋이 정보화면에서 읽은 것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지정된 언어를 자동으로 모국어로 번역해주는 편리한 마법.
‘지정된 이라 어디까지 지정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머리를 굴리던 윤민수는 프리지아와 시선이 마주쳐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 금빛의 공허한 눈, 오똑한 코, 창백할 정도의 하얀 피부 때문인지 붉게 보이는 입술.
‘역시 예쁘긴 하네……. 처음 봐…ㅆ’
프리지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도 프리지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에게 방문목적을 전하였다.
“괜찮아지셨으면 본부장실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이 세계에서는 사람 죽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건가. 하긴 이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윤민수는 정말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물론 프리지아는 윤민수의 표정이 안 좋아진 시점부터 이미 그녀의 마음속은 매우 복잡했다.
‘사과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미친 여자로 생각하시려나? 아니면 살인마? 괴물?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대체 이게 뭐하는 거야!’
그녀의 마음이 더더욱 복잡해져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후 부터는 계속되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서로 눈치만을 보고 있을 뿐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윤민수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프리지아가 껄끄러웠다.
어느 누가 자신을 죽였던 사람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다시 살아나긴 하였지만 말이다.
이들의 침묵은 마침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 프리지아가 입을 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처음에 그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 때문에 피해를 보시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분명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은 상대방의 시점에선 전혀 미안함이 전해지지 않는 사과였다.
성의 없는 사과라는 것을 그녀도 깨닫고 있었으나 현재 프리지아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사과였다.
“아, 네.”
짧고 간결한 윤민수의 이 대답 또한 그 나름의 최선의 대답이었다.
사과를 하는 프리지아를 바라보던 그의 눈앞에 조그마한 화면이 하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대상을 [탐색] 하시겠습니까?
그녀의 사과에 대충 대답한 것을 긍정의 의미로 인식한 것인지 화면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스테이터스
성명 : 프리지아(앨리 케르나)
종족 : 인간
나이 : 21
레벨 : 80[87]
남은 경험치 : 52468
마력 : 35000/45000
힘 : 149 민첩 : 280
친화 : 5[100] 행운 : 38[100]
상태 : 권능의 대가(저주)
변화를 마친 화면은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표시하고 있었다.
‘음? 스테이터스는 공개하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것 아니었나? 그나저나 대단하네…. 조금만 올리면 한계치인가…….’
윤민수와의 압도적인 능력치차이에 병실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 감탄을 하며 윤민수는 눈에 거슬리는 스테이터스창 마지막 부분에 시선을 옮겼다.
권능의 대가(저주)
맞지 않는 힘을 쓴 대가로 인하여 사용자는 감정의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다.
남은 시간 4 : 20
저주의 정보를 읽은 윤민수는 그녀가 사과를 성의 없이 한 것이 고의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왜 이런 저주에 걸려 있는 거지?’
“아무리 신의 계약자이고 계약신의 아티펙트라 해도 친화가 너무 낮으면 발생하는 패널티입니다.”
의문을 가진 윤민수의 머릿속에 백의 목소리가 그의 의문을 해결해주듯 울려 퍼졌다.
“잠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저기, 백…’
띵
윤민수가 백에게 하려던 질문을 막으려는 듯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목적지 도착 음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10톤 트럭이 지나가도 될 정도의 넓은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 벽 양쪽에는 누군지 모를 거대한 석상들이 세워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저 문으로 가시면 본부장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사과는 다음에 정상적이실 때 받는 것으로 할게요.”
자신을 향해 살며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건네는 윤민수를 바라보던 프리지아의 지금까지 변화 없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네? 저…”
말을 하려던 프리지아의 대답을 끊기라도 하듯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참 대단한 엘리베이터였다.
“대…체 어떻게…?”
‘내가 그렇게 아파 보였나? 아니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래도, 혹시 아는 건가? 대체 누가?’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며 프리지아는 자신의 상태에 이상을 확인하였으나 그저 공허한 눈동자의 무표정한 얼굴만이 비칠 뿐이었다.
‘본부장님과의 면담이 끝나면 만나서 물어봐야지. 아직 제대로 소개도 하지 않았으니 만날 구실은 찾았고, 어쩌면…… 해결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나에게 그런 조언을 해주었던 존재의 계약자니 말이야.’
그녀의 이런 위대한 계획은 실행되는데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 후에서야 시작점을 밟을 수 있었다.
◆◆◆◆◆◆◆
뚜벅뚜벅
석상들은 얼굴이 조각되지 않았으며 무기 혹은 장신구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듯 석상들의 오라에 끌리듯 윤민수는 석상들에게 다가갔다.
“1세대 분들입니다. 모두 대단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난 백의 대답이었다.
그러한 백의 상태를 알 겨를도 없이 윤민수는 세워진 석상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보았다.
석상의 절반정도 되어 보이는 「요르문간드의 분노」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중세시대 풍의 갑옷을 입은 석상.
대검 석상과 대비 되는 가죽 재질처럼 보이는 갑옷을 입고 「펜리르의 이빨」이라 새겨진 두 자루의 권총과 두 개의 단검을 허리춤에 찬 석상.
웃통을 벗은 근육질 몸매의 「영혼장이의 고독」이라 새겨진 망치를 든 석상.
모래시계의 모양의 문양 새겨진 수단과 유사한 외형의 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 「클레리야의 축복」이라 새겨진 의식용 단검을 들고 있는 석상.
후드를 뒤집어쓴 「6발의 승리」라 새겨진 석상의 몸보다 거대한 저격소총을 껴안고 있는 석상.
각 잡힌 정장을 입고 손에 「광대가 부른 종말」이라 새겨진 장갑을 끼고 있는 석상.
석상을 둘러보며 문에 가까워진 윤민수는 문의 바로 석상이 아닌 거대한 창하나와 사람정도 크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창에는 「심판의 창」이라 새겨져 있었으며, 비석에는 누군가를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대단한 사람이었던 건가? 이 장소에 있다는 것으로 봐선 1세대 사람이라는 걸 테니…. 백 무기의 주인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있어?’
대답을 기다리는 윤민수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백? 백!? 듣고 있어? 백!”
“자네가 날 찾는다는 사람인가.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어서 들어오게나.”
위압감이 가득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려 퍼졌다.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기계음을 내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열렸다.
3방면이 책장으로 막혀있었으며 나머지 벽은 통유리로 되어있는 방이었다.
윤민수는 그 방을 향해 걸어갔다.
10걸음도 안되어 방의 끝에 놓인 책상에 다다랐다.
‘복도만 크고, 방은 그닥…….’
책상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는 윤민수가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신가. 내 계약신의 친구의 계약자. 이름이 뭐지?”
“아, 네, 저, 윤민수라고 합니다.”
“음? 하하하하하하!”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한 윤민수의 모습을 보며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금발과 금색의 눈, 높은 콧대의 50대정도로 보이는 다부진 몸의 남성이었다.
“여기서의 이름은 계약명을 말하는 것이네. 나는 파쳄이라고 하네. 잘 부탁하네. 자네는 이 세상에 관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레페티오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파쳄이라 소개한 남자는 윤민수의 소개를 듣지도 않고 서랍을 뒤져 카드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걸 가지고 1층으로 가서 보상하고 내 선물을 가져가면 될 거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탐색이 작동하여 파쳄의 정보창이 자신의 시야를 가린 윤민수는 화면을 보고 빠르게 방을 나왔다.
‘죽을…뻔 한 건가. 하지만 왜?’
그의 눈앞에는 하나의 화면이 빛을 내고 있었다.
주의
대상의 능력치와 살의에 정보를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5회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윤민수는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윤민수는 엘리베이터 벽을 등지고 앉아 심호흡을 하였다.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보아도 나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대체 왜? 살의만 비치고 왜 죽이지는 않은 거지? 역시 그거 때문인가?’
오랜 고민 끝에 파쳄의 변화가 변하기 직전 그의 컴퓨터 화면으로 전달된 무언가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쪽 세계에 몸 담았다간 과연 며칠이나 살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의문이 윤민수의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꺾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며 문이 열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윤민수는 일어나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케리어넨>에 참여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발을 들이기를 한번,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의를 내뿜는 사람한명, 정신 나간 신하나.
지금 당장 다시 쓰러져 병실로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겪은 윤민수였다.
그런 그의 심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알리 듯 힘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 또…시작인가.”
‘음!?’
윤민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한탄에 잠깐 놀랐으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1층은 대리석과 유사한 돌로 된 바닥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기계가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과 비슷한 넓이를 가진 로비였다.
‘받은 카드를 어디서 사용하면 되는 거지? 백도 지금 반응이 없고….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거대한 로비에 비해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딱히 별다른 방법이 없던 윤민수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이번은 허탕이네.”
“뭐 어쩔 수 없죠. 쓸모없는 게 같이 있었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 바닥에 새로 들어온 사람도 저거 보단 잘할 건데 말이죠.”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다 도시로 온 시골청년의 기분을 만끽하던 윤민수는 들려오는 사람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구멍이 스파크를 튀기며 로비의 벽 한쪽에서 생겨나 그곳에서 세 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누군가를 비꼬는 대화내용이라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윤민수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라도 손을 빌려야 할 처지였다.
“저… 제가 오늘 처음 이곳에 와서 그런데 혹시 이 카드를 어디서 사용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윤민수의 질문에 그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신입?”
“예, 앱에 오늘 한명 추가된 사람이 있습니다.”
“능력은 아직 불명인데, A급 엘리트를 부상상태였긴 하나 혼자서 처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우리 팀에 넣는 게 도움이 되겠지~?
그들은 뭉쳐서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그들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 눈웃음을 지으며 윤민수에게 다가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빨려 들어가듯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가 시선을 끌며 묘하게 말을 늘어뜨리는 여성이었다.
“카드~ 보여주시겠어요?”
그녀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시선에 멍하니 윤민수는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윤민수에게서 건네받은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는 카드에 새겨져 있는 본부장의 낙인을 발견하였다.
‘본부장이 찍어놓은 인재인거 보니 생각보다 더한 월척이네~’
“흠~ 케리어넨이 처음이라고 했죠~? 이 카드는~ 여기다가 놓으면 되요~. 아,! 참 그리고 전 영란이라고 해요.”
“네, 저는 그…… 레페티오라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케리어넨 생활용 이름을 소개한 윤민수를 영란이 그의 팔을 끌어안고 로비 한가운데 기둥으로 끌고 갔다.
‘헤헤헤헤.’
미모의 여성에게 강한 스킨십을 당한 윤민수는 신체에 닿은 느낌을 만끽하느라 뇌의 활동이 반 정도 멈춰 있는 상태였다.
영란의 손에 이끌려간 기둥에는 지하철 공공사물함 크기 정도의 공간이 비어있었다.
빈 공간에 카드를 올려놓자 파란색의 빛이 나오며 카드가 사라지고 공간의 반을 채울 정도의 박스가 나왔다.
“호~ 생각보다 크~네요? 본부장님이 많이 챙겨줬나 보네요~”
“네? 네… 그런가 보네요. 하하….”
마지막에 자신에게 보였던 파쳄의 태도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크기의 상자였다.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상자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있는 돈다발, 그리고 돈다발 위 윤민수의 휴대폰.
40cm 정도 되어 보이는 손잡이에 잘 보이지 않는 문자가 새겨진 검은빛을 띄는 보석이 박힌 검 한 자루.
소주잔 정도 크기의 유리병에 담긴 푸른 액체.
그리고 마지막 물건은 절대 윤민수가 절대 잊을 리 없는 물건이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하였던 켈른이 그에게 전해주었던 장신구들이었다.
「거짓말쟁이의 가면」
환각계 계열 아티펙트.
자신을 마주하거나 감지할 수 있는 자들에게 원하는 생명체의 형태를 비출 수 있다.
소비마력에 따라 유사성 증가.
‘가면…이라, 정말 이런 거 이름은 누가 지은 건지. 그리고, 흠…….’
탐색의 도움으로 아티펙트의 정보를 읽으며 문득 프리지아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저 이 아티펙트 때문에 생긴 사고였다는 것을 깨달은 윤민수는 마음이 많이 복잡해졌다.
‘사과를 하러 온 걸 봐서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
한편 상자 속에서 나온 아티펙트를 본 영란과 그녀의 일행은 서로 눈짓을 하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것들 최소한 B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아티펙트잖아?’
‘정말 대어가 낚였네.’
‘흠~ 어떻게 굴려 볼까나?’
“레페티오씨~? 혹시 지금 가입한 팀이라던가~ 단이라던가~ 있나요?”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던 윤민수의 눈앞에 바짝 붙어서 밝게 웃으며 그에게 질문을 하는 영란에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네? 아… 아니요?”
“없으세요?! 그럼~ 저희 팀에 합류하시지 않으실래요~?”
“아, 저기… 그게… 그…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밝게 웃으며 팀 가입 권유하는 영란을 차마 거절 할 수 없던 윤민수는 그녀의 권유를 대충 얼버무렸다.
‘아직 여기가 뭐하는 건지 잘 모르니까.’
“맞다~ 여기서 나가시는 방법도 모르시죠?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이걸 거절해? 월척을 여기서 놓칠 수 없지.’
박스를 들어 올리는 윤민수에게 영란은 속마음을 숨기며 질문을 하였다.
점점 줄어들어가는 케리어넨 신규 참여자들 사이에서 잘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강자가 필요 하였기에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윤민수의 짧은 한마디에 영란은 여태껏 보였던 모습들 중에서 가장 밝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어머~! 저랑 같은 나라에서 오셨네요~? 한국 포탈은~ 이 포탈을 타고 가시면 되요. 오랜만에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네요~!”
‘좋았어. 같은 나라 사람이면 더더욱 편하지. 드디어 그년을 뛰어넘을 수 있어. 드디어…….’
“저…? 뭐야? 어디 갔어?”
“그… 뭔가 바쁜 듯이 먼저 갔습니다.”
“하!? 그래도 뭐 연락처를 남겨 놨으니 연락이 오겠지. 걸린 거 같으니까…….”
영란의 늘어뜨리던 말투는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그녀의 밝게 눈웃음 짓고 있던 얼굴 또한 욕망으로 가득 찬 얼굴로 변해있었다.
◆◆◆◆◆◆
쾅!
본부장실의 탁자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당장 1세대 연락되는 사람들 연결해.”
파쳄은 다급히 인이어를 두드리며 말을 전했다.
10분 후, 인이어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렸다.
“뭔 일이야. 이제야 그 지역 줄 생각이야?”
굵직한 남성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파쳄을 자극하듯 말했다.
“화이트”
짧은 파쳄의 대답 이후 그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놈은 왜? 죽었는지 벌써 몇 년짼데 지금 그놈 이름이 나와?”
“그 던전…에 있던 존재 기억하나?”
“당연하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있나. 그 미친놈을 잊을 수 있나.”
파쳄은 눈을 감고 그때를 회상하였다.
이 통유리 앞에 보이는 바로 이 장소였다.
아들 둘을 잃었으며, 그 후 아내 또한 병으로 인하여 생을 다한 장소가 바로 이 곳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며 살아남은 1세대 중에서는 자신들의 그룹이 강하다고 생각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를 만나버렸었다.
손짓 한 번에 아들 둘의 상반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의 그룹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재미없네. 그냥 다 나가라.”
그 때의 무력감과 분노를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때의 무력감과 분노를 다시 한 번 오늘 만났던 청년에게서 느꼈다.
“화이트의 아들이 케리어넨에 참여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파쳄은 인이어 너머의 남자에게 말을 전했다.
인이어 너머의 남성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하였다.
“그…러면 도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죽긴 했어도…….”
“알아! 그때 그것이 한 말이 기억이 안나나!? 희생자의 아들이 우리 모두 심판을 내릴 거라는 말을!?”
기껏 진정시킨 마음을 다시 폭주시킨 파쳄은 울분을 토하듯 인이어 너머의 남성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외침에도 인이어 너머의 남성은 평온하게 대답하였다.
“심판을 내린다면 달게 받을 걸세. 우린 이미 그때 죽었어야 했어. 그리고 네놈은 깨끗하다 생각하는가?”
파쳄을 격하게 비꼬는 말이었으나 딱히 반박을 할 말이 없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럼 내 방식대로 처리하겠네. 어차피 우리들은 건드릴 수 없으니 말이야.”
“네놈 설마 그 놈을 이용하려는 거냐? 그 놈이 화이트의 나라에 있었지? 정말로 돌아버린거냐! 벅 케르나!”
역정을 내는 인이어 너머의 남자의 연락을 파쳄은 일방적으로 끊고 부서진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
“질 거야. 니들 목숨을 걸어도 안 될 거야.”
어느새 파쳄의 옆에 서 있는 190정도의 키에 금발의 청안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 말을 걸었다.
“로키님.”
남성은 북유럽 신화 속 로키로 파쳄의 계약신 이었다.
“내 친구가 워낙에 강해서 말이야. 아마 이 세계 전체가 덤빈다고 하더라도 못 이겨.”
로키는 조소를 지으며 파쳄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그게 당신 친구였습니까?”
“어.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강할 친구지.”
“대체 왜 그딴 것이 그의 아들과 계약한 겁니까?”
“…”
파쳄의 질문에 로키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 그러게. 내가 미쳤나보다.”
파쳄은 한숨을 내 뱉으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격을 가진 것들은 말이야. 다들 비슷한 존재를 찾아가지.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말이야.”
“예?”
갑작스러운 대답에 로키가 있던 방향으로 파쳄은 고개를 돌렸으나 부서진 책상 잔해만이 그의 시선에 들어올 뿐이었다.
6회
“후우~ 더럽게 머네.”
윤민수는 검은 박스를 이불 옆에 놔두고는 허리를 쭉 폈다.
책상하나와 이불만으로 가득 차는 조그마한 윤민수의 방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강해 진건가.’
1시간 전, 포탈 너머는 모든 사건이 일어난 편의점 앞이었다.
많은 양의 돈과 철검이 들어있는 상자였으나 빈종이 상자와 같은 무게였다.
‘이게 계약의 힘인가. 지금은 일반인의 두 배 정도…….’
일반인의 능력치의 평균은 10이다.
현재 윤민수의 능력치는 24로 일반인의 두 배 가까이의 힘과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능력치가 크면 클수록 많은 차이가 나긴 하나 지금의 윤민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평소 편의점에서 아무리 뛴다하더라도 집까지 2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으나 절반의 시간 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가족들에게 검은 상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들어오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리긴 하였다.
‘그리고, 이건…….’
검은 상자 속 윤민수의 폰 위에 하얀 종이 하나에 무언가 쓰여 있었다.
010-****-****
제 번호예요♡
끝에 달려 있는 하트를 보며 윤민수의 머릿속에는 영란이 떠올랐다.
‘빨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언제 넣어 놓았데.’
아직 케리어넨에 참여 할 생각이 없었던 윤민수였기에 껄끄러운 자리를 빠르게 나왔던 것이었다.
거기다 본부장이었던 파쳄 또한 윤민수에게 진한 살기를 내뿜으며 죽일 기세였던 장소에 또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후…그럼 나머지를 확인 해볼까.”
윤민수는 상자 속 내용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상자 속에 손을 넣어 40cm정도 되는 검을 들어올렸다.
흑색 베르논
붉은 빛을 띠는 베르논이 아닌 희귀한 검은 베르논으로 착용자의 친화도에 따라 보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현재 : 140% 사용가능
탐색을 사용하여 검을 보았으나 정작 화면에 나온 것은 검이 아닌 검에 장식되어 있는 검은 보석이었다.
‘근데 140%? 100%이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화면에 나와 있는 터무니없는 숫자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푸른색 액체가 담긴 병을 들어 탐색을 계속하였다.
용혈약
용의 피로 이루어진 약으로 대부분의 상처의 치료가 가능하다.
※주의 : 마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급적 사용하지 말 것
‘용혈약이라 대부분의 상처가 어디까지인건지 모르겠는데… 좋은 건 분명하네.’
용혈약 또한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대충 넘어가기로 한 윤민수는 이내 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돈에 눈을 돌렸다.
정말 상당한 양의 돈다발이었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이불을 치우고 돈다발을 이불삼아 누워도 남을 정도의 양의 돈이었다.
그러나 이정도의 양의 돈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윤민수는 머리를 감싸고 생각을 하여 보았으나 딱히 좋은 수단이 떠오르지 않아 뒤적거렸던 물건들을 다시 상자 안에 담고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이불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백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중간에 대답을 한걸 봐선 그 공간에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갑작스레 사라진 백에게 불평을 하며 윤민수는 밝은 햇빛이 비치는 방에서 많은 것이 있던 하루를 뒤로 하고 잠이 들었다.
2. 갈림길
“그렇게 해. 아마 알아서 잘 할 테니. 명심해 한번 뿐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으…음?”
누군가가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윤민수는 자신의 머리맡에 있는 백을 발견하였다.
“백!? 어디 있다가 이제야 튀어 나온 거야?”
윤민수는 백에게 반가움 반, 서러움 반을 표했다.
그의 그런 말을 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였다.
“죄송합니다. 그곳은 제가 갈 수 없는 구역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부르셔서 잠시 갔다 오느라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 그래….”
끼이익
문이 열리며 1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윤민수에게 말을 걸었다.
“형, 누구랑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그러게 알바 줄이라니까.”
소년은 윤민수의 동생 윤민준이었다.
어머니의 성격을 많이 닮아 걱정이 많은 윤민준은 그의 눈에는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형이 안쓰러워 보였다.
“아…하하하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되.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아니까.”
남동생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윤민수는 건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듯 팔을 들어 올리며 괜찮음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민정이는? 최근 잘 안보이던데?”
최근 그의 여동생인 윤민정과 잘 마주치지 않아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윤민준에게 물었다.
물론 다른 알바와 새벽 편의점 알바 때문에 최근 집에 있는 시간이 적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집에서 단 한 번을 마주치지 못하였기에 의문이 들었다.
“누나? 누나는 요즘 학교 끝나고 어디 교회? 다니는 거 같던데?”
“그…래. 어디 교회 다닌데?”
어머니의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윤민수가 대부분의 수입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가정 형편이 얼마나 안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들거나 지칠 때 뭐든 의지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종교였다.
윤민수는 자신도 그러한 시간이 잠깐이나마 있었기에 여동생의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교회 정도야 뭐. 다녀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으니까.’
여동생의 기분이 해소 된다면 어느 정도는 허락해줄 생각인 윤민수였으나 윤민준이 해맑게 웃으며 가지고 온 물건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윤민준의 손에는 모례시계 모양의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분명 본부장실 복도의 동상에서 본 석상 옷의 문양이었다.
‘아니, 그냥 우연히 문양이 같을 뿐일 거야. 그럴 거야.’
윤민수는 당황하여 피가 날 정도로 손톤을 깨물었다.
“형!? 병원가야 하는 거 아냐? 정말 괜찮아?”
윤민수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윤민준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말렸다.
“윤민수!”
“윤민수!”
윤민수를 부르는 중년의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며 당황한 윤민수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였다.
정신을 차린 윤민수의 앞에 윤민준 이외의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이는 거친 손과 짙은 팔자 주름을 가진 그들의 어머니 이지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윤민준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녀 또한 놀라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윤민수가 물고 있는 그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는 다급하게 소리친 것이었다.
“아…그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윤민수는 황급히 피가 흐르는 손을 뒤로 숨기고는 현재 상황을 대충 얼버무렸다.
“후… 네가 그렇다니 알았다. 그래도 아들…. 조금은 쉬어가도 돼. 그리고 손에 피나는 거 치료하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지영은 점점 죽은 남편을 닮아가는 윤민수를 보며 충고를 하였다.
그러나 이지영의 충고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윤민수의 머릿속은 상념으로 가득차 가고 있었다.
‘과연, 내 여동생한테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렇게 한 놈들을 과연 살려 둘 수 있을까? 그러면 또…….’
여기 까지 생각이 진행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잡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혹시 알바 하면서 안 좋은 일 있었어?”
“아, 네.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윤민수는 한가지를 다짐하였다.
‘누구든 간에 내 가족에게 피해를 두게 내버려두지 않겠어. 나는 더욱 더 강해 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돈에 쪼들리는 삶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그렇게 걱정하는 가족들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낸 윤민수는 곧바로 휴대폰을 켜 영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세 번 정도 울리자 휴대폰 너머에서 그녀 특유의 늘어뜨리는 말투가 흘러들어왔다.
“네~ 여보세요~. 누구신가요~?”
“그… 어제 만났던 레페…티오라고 합니다.”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해요~ 이틀 후 그때 본 로비에서 봬요~”
“넵.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수고하세요. 후…….”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 뱉은 윤민수였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은 통화 시간이었다.
첫 만남에 대화 도중 조용히 빠져나간 무례를 저질렀기에 혹여나 거절 당할까봐 긴장한 상태였기에 전화가 끝나자 말자 바로 몸이 풀려버렸다.
“정말 그쪽 팀에 합류하시는 건가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도중 백이 질문을 하였다.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던 윤민수는 다소 날카롭게 백에게 답을 하였다.
“왜?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친절하기만 하던데? 하긴 너는 그때 사라졌으니 알 리가 있나.”
“어쩔 수 없는 건가…….”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백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영란과 만날 행복한 상상을 하며 그는 이미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
탁!
영란은 휴대폰을 나무 테이블에 던졌다.
“봐? 조엘, 내가 뭐라 했지? 안 넘어 올 리가 없다니까?”
신이 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조엘이라 부른 남성에게 말을 하였다.
“하긴 뭐, 누님은 이런 걸 실패 하신 적이 없죠.”
“이런 거?”
“아니, 그 뭐냐. 그래 인재 섭외요.”
날카롭게 쏘아보는 영란에게 당황한 조엘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 순간 방의 문이 열리며 걸걸한 목소리의 뚱뚱한 남성이 비쩍 마른 소녀 한명을 던지며 들어왔다.
소파에 앉은 둘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으며 던져진 소녀를 비꼬았다.
“그래, 텐카. 쓰레기 훈육은 잘 했지?”
“키킥! 누님 텐카 저놈이 훈육을 너무 잘해서 이제 쓰레기도 아닌 폐기물이 돼버린 거 같은데요?
테이블 앞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팔은 온통 멍투성이였으며, 눈 한쪽은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앞에 영란이 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녀의 얼굴을 만지며 말을 하였다.
“텐카! 얼굴은 건드리면 안 되지.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 보이잖아? 이틀 후에 새사람 오는데 이런 모습으로 보여줄 수 는 없잖아?”
인격 모독 수준의 대화에도 소녀는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소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영란은 그녀를 쏘아보며 그녀의 귀에 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쓸모없으면 버릴 거야. 레. 테.”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레테라 불린 소녀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영란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일어나 말을 이어나갔다.
“이틀 후, 레…뭐라 하는 그 남자가 쓸모없으면 알지? 후후”
영란과 조엘, 텐카의 웃음소리가 방을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