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대마법사의 제자는 마법을 쓸 줄 모른다
등록일
2020-04-24
작성자
사이트매니저
조회수
86

0.Prologue

  큰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노마법사가 긴 수염을 휘날리면서 뛰어 들어왔다. 
  “대륙의 지혜이시여! 이 중요한 시기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 카이로스 왔는가. 거기 앉아서 차 좀 들게나.” 하얀 마법사 로브를 걸친 노인이 창가에서 고개를 돌려 손님을 바라보았다. 
   
  “지금 차가 중요한게 아닙-”

  “‘패리 브리’라네. 자네를 위해 내 어렵게 구했거늘.”
  
   “!”

   “황제 녀석보다 자네에게 먼저 챙겨주는 것이라네.”

  카이로스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동제국 풍의 찻잔 속에서 아름다운 연분홍 빛의 차가 찰랑거렸다. ‘패리 브리’라면 지금은 사라진 고대 요정들이 선물로 주었다는, 네오스 제국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찻잎이었다. 공식적으로 찻잎이 바다를 건너 아그리드 대륙으로 넘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카이로스는 그 사실에 어떠한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쩔쩔매며 찻잎을 갖다 바쳤을 네오스 제국 황제의 모습만이 그려졌다. 그런 존재였다. ‘대륙의 지혜’ 대마법사 크라토스 셰아트는. 적어도 그가 아는 한 ‘어렵게’라는 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존재였다. 차향을 입에 한 모금 머금은 카이로스는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계승권 문제로 어지러운 지금 대마법사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이제 그저 늙고 힘없는 마법사일 뿐이라네.” 크라토스가 웃어보였다.

  “보통 늙고 힘없는 마법사는 배로 족히 2달은 걸리는, 마법사들을 동원한다해도 제 수준의 마법사 여섯이 모여야 겨우 3일에 걸쳐 갔다 오는 곳을 옆집 드나들 듯 다녀오지는 못합니다. …하물며 황제의 삥을 뜯다니, 폐하께서 아신다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실 겁니다.”

  “오, 그렇다면 그만한 충신이 더 있겠나. 다시 없을 영광이로군.”

  크라토스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500년 동안 항상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자리는 생각이 많아질 때 그가 자주 찾는 자리였다. 수백 년 동안 같은 모습의 별자리를 보며 그는 자신이 그림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자연의 힘인 ‘마나’를 다루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준에만 올라도 마법사의 수명은 보통 일반인의 수 배를 훌쩍 넘는다. 하물며 그는 유례없는 대마법사이기에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대륙의 지혜’로서 제국의 시작부터 함께했다. 대마법사는 인간을 벗어나 제국의 수호신으로서 제국과 명운을 함께한다는 전설도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없다면 당장 제국이 사분오분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500년의 전설은 그를 제국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전설은 지치기 시작했다. 크라토스는 자신의 오랜 제자를 바라보았다. 젊고 혈기 넘쳤던 제자는 사라지고 어느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와 주름은 그와 닮아 있었다.

  “자네도 많이 늙었군.”

  “예. 대륙의 지혜께서는 그대로이십니다.”

  “아닐세, 나도 늙었다네.”

  500년의 세월은 그를 무디게 만들었다. 그가 보는 항상 같은 모습엔 어느새 그 또한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멍청하게도’ 그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륙의 지혜는 무슨…….” 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예?”

  “아닐세.”

  크라토스는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의식해야 알아차릴만큼 자연스럽게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눈에 보였다. 화려함보다는 수수함을 택한, 그러나 볼수록 매혹되는 힘이 느껴지는, 마치 그를 닮은 백색의 지팡이는 자신의 친우이자 대륙을 이름으로 가진 유일한 남자, ‘케사르 아그리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그에게 ‘대륙의 지혜’라는 거창한 칭호와 함께 선물로 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500년간 그의 곁을 함께 해왔지만 최근 전해지는 미세한 변화는 그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황자들이 하나같이 제 아비와 달리 야심이 넘치더군.”

  “….” 
  카이로스는 가만히 황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일찍이 유약하고 억눌렸던 현 황제는 여자와 자식에 광적으로 집착했고, 그 때문에 역대 가장 많은 형제들을 갖게 된 그들은 역대 모든 황족들이 그랬던 것 보다 더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약간의 다툼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각자의 발톱을 최대한 숨겨왔지만 갑작스레 황제가 병상에 누운 지금,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은 자명했다.
  크라토스는 현실을 깨닫고서야 자신이 사라져야 함을 느꼈다. 타성에 젖은 그는 수백 년 간 제국을 얽매는 족쇄였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제국에 저지른 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허물을 벗고 변화할 때라네. 500년의 정체는 너무 길었고 앞으로 그들의 시대에 나 같은 건 방해만 될 뿐이지 않겠나.”

  “대륙의 지혜를 허물이라 여길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크라토스가 말한 ‘변화’를 제국에 국한하여 생각했지만, 사실은 크라토스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영원히 있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모습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크라토스가 떠올린 것은 -그동안 자신이 잊었다는 사실 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이제는 사죄의 의미까지 더해, 그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500년간 그의 몸은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그가 꼭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팡이를 쥔 그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느덧 차를 다 마시고 크라토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이로스는 그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황실마법사로서 나름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마법사와 함께한 단 하나뿐인 제자였다. 덕분에 카이로스는 세간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들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카이로스는 자신이 말한 ‘그 자’라는 단어에서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약 500년전 대륙을 멸망 직전까지 끌고 갔던 마왕의 힘은 이름이 없어도 그저 뜻하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게 만들었다. 
  ‘그 자’. 크라토스 셰아트는 카이로스가 말한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50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말 그대로 지옥처럼 검게 물든 하늘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온갖 마수들. 인간들은 계속되는 패배에 지쳐있었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대륙의 끝에서 그들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을 위시한 수많은 군세가 그들의 코앞까지 닥쳤을 때, 그들이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훗날 크라토스의 말대로 가장 ‘마법다운 마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마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왕을 마무리 하려는 찰나의 순간, 마왕의 마지막 의지는 이미 반 시체와 마찬기지였던 케사르에게 쏘아졌고, 친우인 케사르를 살리기 위해 크라토스의 의지는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틈에 마왕은 몸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마왕이 사라지고 나서 크라토스가 가장 먼저 한일은 그의 이름을 빼앗는 일이었다. 그는 이름에 담긴 힘을 알고 있었기에 대륙에서 마왕의 이름을 지우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른 지금, 마왕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대륙에 단 한명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오래전 죽은 케사르와 그의 제자 카이로스 뿐이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대륙에서 그의 이름을 완전히 지우셨습니다. 그 자가 이 대륙을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나타나더라도 그의 힘이 대륙 전체에 퍼져있던 과거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스승님께서 굳이 나서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말은 항상 스승을 보채고 귀찮게 하는 그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크라토스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자로서 카이로스는 그의 스승이 편안한 삶을 보내기를 바랐다. 어쩌면 약해진 그의 뒷모습을 인정하기 싫어 더욱 그를 귀찮게 했는지도 몰랐다.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네.”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그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마왕의 힘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는 듯이.

  “이래봬도 대륙의 지혜이지 않은가. 대륙을 위해 다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크라토스가 웃으며 말했다.

  ‘대륙의 지혜이기 이전에 제 하나뿐인 스승님이십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웃음을 보며 카이로스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카이로스는 이제 크라토스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약해진 그의 스승을 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믿고 응원 하는 것이었다.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대가 걷는 길에 지혜가 함께하길.” 

  마법사의 인사와 함께 천천히 사라지는 제자를 향해 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카이로스의 모습이 문 저편으로 사라진 뒤 크라토스는 창가에 섰다. 

  “사사로운 복수에 흔들리는 주제에 어찌 대륙의 지혜를 칭하겠는가.”
  크라토스는 손에 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렇지 않은가?’ 라고 묻고 있었다. 마왕의 힘은 먼 곳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크라토스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리고 그의 친우가 사랑하는 대륙을 다시 어둠으로 물들이기는 싫었다. 

  “자네는 자네가 사랑한 이곳에서 지켜봐 주게나.” 
  500년간 약해진 그의 뒷모습은 작고 왜소했지만, 그의 눈빛만은 500년 전 그날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크라토스의 방에 들어간 카이로스가 볼 수 있었던 건 책상위에 놓인 그의 지팡이 하나 뿐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며 들어간 방이었지만 슬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이로스는 그가 애용하던 갈대 펜을 조심히 안아들었다. 

 “금빛 갈대밭 속에서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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