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달팽이
등록일
2020-04-24
작성자
사이트매니저
조회수
79

커다란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고 여러개의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사람들. 전화벨 소리와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 여러사람의 목소리가 공간에 가득하다.
“자, 우리 이제 퇴근합시다.”
상석에 앉은 남자가 일어나 말하자 잠시간 더 소란스러워지더니 곧 사람들이 줄줄이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가자 피곤한지 목을 주무르며 하연이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노을이 다 진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연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현관 센서등이 켜진다.
솜이 다 꺼진 소파와 작은 티비, 벽 한쪽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마른 빨래들을 흘긋 보고는 하연이 소파 위로 가 쓰러지듯 눕는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손을 뻗어 가방을 뒤적이다가 결국 뒤집자 각종 서류철과 함께 핸드폰이 쏟아진다.
엄마라고 적힌 화면을 보며 하연이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여보세요”
[하루종일 왜이렇게 전화가 안돼? 퇴근했니?]
“일하는데 전화를 어떻게 받아. 무슨 일인데.”
하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해 불을 켠다.
냉장고에서 반쯤 비운 2L짜리 생수를 그대로 입에다 가져다 댄다.
[꼭 엄마가 무슨 일 있어야만 전화하니? 하도 연락이 안되니까 그렇지.]
“요즘 바빠서 그래. 별 일 없지?”
[응, 시골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이번 추석 때 내려 올거니? 니 오빠는 당일에 온다고 하던데]
“아...힘들 것 같은데. 요즘 좀 바빠서.”
하연이 냉장고 벽에 붙혀둔 달력을 살핀다. 프로젝트 진행 날짜와 추석이 겹치자 손으로 숫자를 두드린다.
전화기 너머 현숙의 서운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설날에도 못봤잖아. 아버지가 너 많이 보고싶어하시는데...]
“바쁜걸 어째. 나중에 시간 날 때 한 번 갈게요. 엄마 나 이제 씻고 자야돼. 나중에 통화해.”
서둘러 전화를 끊고 하연이 물병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
핸드폰을 두드리며 지친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하연.
사무실에는 몇몇 사람만이 피곤한 얼굴로 앉아있고 거의 빈 자리다.
하연이 빨간 줄의 사원증을 목에 걸며 제 자리를 찾아간다.
대리, 주임의 직함과 이름이 적힌 명패를 지나쳐 아무 명패가 없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하연의 옆자리에 있는 사수, 소연에게 하연이 밝게 인사를 건넨다.
“주임님. 일찍 오셨네요?”
“오늘 남자친구가 태워줘서, 자기는 뛰어왔어? 뭔 땀을 그렇게 흘려?”
“어우, 지하철에 사람이 많더라구요.”
소연이 흘긋 하연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 짓는다.
코트를 벗으려 단추를 푸는 하연의 팔을 두드리는 소연.
“어제 보낸 기획안 다섯장 프린트해서 갖다줘요.”
“네. 또 필요하신거라도...?”
“오는 길에 커피도.”
“바로 갖다 드릴게요.”
하연이 반쯤 걸친 코트를 서둘러 벗어 대충 의자 위에 던지듯이 걸쳐두고 탕비실로 향한다.
하연의 코트가 의자에서 사무실 바닥으로 추락한다.
소연이 잠깐 바닥에 떨어진 하연의 코트를 봤다가 다시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본다.
곧 오른손에는 커피를 왼손에는 서류를 든 하연이 소연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웃는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제 코트를 들어 의자에 걸어둔다.
“하연씨. 그 코트 좋아해? 그거 봄에 입고 다니던거 아닌가?”
“아...네. 맞아요.”
“자기 피부톤에는 좀 더 크림색이 섞인게 어울려. 주말에 같이 쇼핑갈까? 나 트렌치 하나 살건데!”
하연이 책상 밑으로 손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는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번달 지출을 생각하는 하연이 결국 고개를 젓는다.
“어쩌죠? 이번 주말엔 애인이랑 데이트가 있어서...아, 주임님 어제 애인분이랑 영화 보셨다고 했죠? 그거 어때요?”
“아아- 아쉽네. 그 영화 괜찮더라. 하연씨도 액션 좋아하면 주말에 애인이랑 보러가.”
소연이 흥미를 잃은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무감한 얼굴로 하연의 코트와 하연을 흘긋 봤다가 픽 웃는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닦고는 하연이 애써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전자시계가 12시 45분을 띄우고 있고 앉아있던 직원들이 하나 둘 일어난다.
“과장님.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옥상 가서 바람이나 쐬시죠?”
“그래, 오늘 하루도 아주 길다 길어. 가자고!”
“오늘 프레젠테이션 누구거라고 했지?”
“강주임이요.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회의하자니 죽겠네요.”
직원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하연이 사무실 안을 슬쩍 둘러보고 몇몇의 직원들은 제 업무를 보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자 컴퓨터 화면을 켠다.
회사 내 인트라넷 메일에서 인사공고 결과 파일을 열어 빠르게 훑는 하연.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콧등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다시 올리고는 재빠르게 컴퓨터 화면을 끈다.
곧바로 여직원들과 웃으며 들어오는 소연.
“어머, 하연씨 오늘 점심 같이 먹자고 찾으려니까 없더라?”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내일 같이 해요!”
“그래. 저기 횡단보도 앞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을 갔는데 거기 셰프가 엄청 잘생겼더라고!”
“우리 내일도 거기 갈까요?”
“선아씨 진짜 마음에 들었나보다. 음식이 맘에 드는거야 셰프가 맘에 드는거야?”
여직원들이 대화를 나누며 하연의 파티션을 지나쳐간다.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하연.
“여보세요? 나야. 밥은 먹었어?”
[어. 지금 다시 학교 들어가는 중이야.]
“나 오늘 인사공고 결과 나왔어.”
[어떻게 됐어?]
하연이 여자화장실로 들어가서 주변을 살핀다.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크게 내쉰다.
“이번에도 안됐어. 다음달에 계약해지야.”
[어휴. 이번에는 될 것 같다더니?]
“그게 내 뜻대로 되나. 아무튼 심란하다. 다른데 알아봐야지 뭐...”
[그래. 더 좋은 곳 있겠지.]
말소리와 구두소리가 점점 가까이오자 하연이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칫솔을 손에 든 소연이 하연과 눈이 마주친다.
“자기 여기있었네?”
“네, 양치하려구요. 같이하고 사무실로 가요.”
“응. 이따가 회의 있잖아. 세팅 다 해놨나?”
“아까 거의 다 해놔서 마무리만 하면 돼요. 제가 양치하고 가서 할게요.”
“그래, 고마워. 하연씨처럼 일 잘하는 후배만 있으면 너무 좋겠다. 해외사업팀 인턴은 계속 실수만 해가지고 영은씨가 머리 아픈가봐. 오늘 점심 내내 그 얘기만 했어.”
“어머, 그래요? 해외사업팀 인턴 뽑았구나...”
소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한다.
-
불꺼진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소연.
하연은 소연의 뒤쪽에 서서 작게 잘라둔 원단 샘플을 건넨다.
곧 회의실에 불이 켜지고 직원들이 하나 둘 나간다. 회의실에는 하연이 홀로 남아있다.
프레젠테이션에 사용한 원단 샘플을 주워 정리하고는 재빠르게 움직이는 하연.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종이를 정리하고 다과 접시와 종이컵을 들고 나간다.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소연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다.
“하연씨. 이따가 외근이지? 다시 회사로 안와?”
“네. 현장에서 바로 퇴근하래요. 팀장님이 원단 업체에 반납하라고 하셔서요.”
프레젠테이션에서 사용한 원단 샘플이 담긴 상자를 들어올리며 하연이 대답한다.
그러자 강주임이 하연을 바라보며 안됐다는 듯이 미간을 좁힌다.
“인사공고 봤어. 자기 어떡해? 여기가 몇 번째 회사라고 했지?”
“세 번째요.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자기 열심히 했잖아. 팀장님도 자기 잘 봐줬다고 생각했는데...서운하겠다”
소연이 뒤편에 앉아있는 김팀장을 흘긋 보며 목소리를 낮춘다.
김팀장은 성열과 함께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히 크게 웃는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오기도 하자 하연이 남몰래 한숨을 쉰다.
“뭐...제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남은 기간만이라도 열심히 하고 가려구요.”
“그래. 경험이 스펙이지 뭘. 하연씨는 열심히 사니까 뭐든 잘하잖아.”
소연이 힘내라며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핸드폰을 들어올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하연은 그 모습을 잠시 쳐다봤다가 소연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제 컴퓨터를 켠다.
하연의 등 뒤로 커다란 창문에서 옅은 노란빛의 노을이 진다.
-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하연.
아침에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져있지만 다시 묶을 생각이 없는 듯 대충 손으로 만지다가 머리끈을 풀어버린다.
낮은 굽의 구두가 작게 소리를 내는 골목길에서 하연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액정 화면에 떠오른 <엄마>. 하연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
한숨을 쉬며 고민하자 곧 전화가 끊기지만 곧바로 다시 걸려온다.
하연이 짜증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현숙의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왜?”
[퇴근했니? 아직 회사야?]
“퇴근 중이야. 왜 전화했냐고.”
[아버지가 너 잘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셔서 엄마가 전화해본거야. 어제 너무 짧게 통화했잖아. 지금 통화 괜찮지? 아버지가...]
“나 바빠. 나중에 통화해.”
[퇴근했다며 뭐가 바빠.]
하연의 앞에서 깜빡거리던 가로등이 몇 번 빠르게 깜빡이더니 결국 아예 꺼졌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연이 무거운 가방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바꿔매며 퉁명스레 말한다.
“엄마. 원래 회사가 퇴근해도 바쁜거야. 프로젝트 있다고 했잖아.”
[그 회사는 너만 일하니? 아니 인턴인데 왜 그렇게 일이 많아?]
“원래 인턴이 제일 일 많이 하는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뭘 자꾸 물어봐!”
[너는 왜 엄마한테 맨날 짜증이니? 딸 뭐하는지 궁금해하지도 못하니 엄마가?]
“엄마가 자꾸 짜증나게 하잖아. 바쁘다고 하는데 계속 전화해서 뭐 물어보고 그러면 나 일은 어떻게 하라고!”
하연이 한참을 현숙과 전화 너머로 언성을 높이다가 피곤한지 눈가를 누르며 한숨을 쉰다.
골목을 돌자 낡은 빌라 앞에 서있는 낯익은 형체에 멈칫한다.
동시에 하연을 발견한 우석이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든다.
하연이 억지로 웃으며 손을 들어올려 인사하고는 현숙에게 말한다.
“알았어. 오늘 내가 좀 예민해. 주말에 전화할게. 아빠한테도 주말에 연락한다고 전해주고. 엄마 나 회사에서 전화온다. 끊을게.”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고는 하연이 우석을 향해 다가간다.
“어쩐일이야?”
“너 오늘 기분 안좋을 것 같아서. 내가 딱 맞췄지?”
우석이 손에 든 봉투를 흔들자 소주병이 봉투 사이로 보이며 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우석이 하연의 등을 밀며 계단을 올라가자 하연이 미간을 조금 찡그린다.
“조금만 마시다가 가. 내일 일찍 출근해야해.”
“알았어 알았어. 김하연 기분만 풀어주고 후딱 갈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연의 입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고 두 사람이 하연의 집으로 들어간다.
-
사무실에 앉아 책상 위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하연의 등 뒤를 지나가며 소연이 말한다.
“하연씨. 이따가 업체에서 발주서 영수증 올 테니까 그거 오면 확인해요. 알죠?”
“네. 알겠습니다.”
“아휴. 프로젝트 하나 맡으니까 정신이 없네.”
“많이 바쁘세요?”
하연이 묻자 소연이 웃으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다가 소연이 아차 하며 말한다.
“그러고보니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하연씨 없으면 어떡하지? 원단 업체 미팅은 하연씨 주관 아닌가?”
“저 입사한 후로는 제가 계속 맡아서 했던걸로 알아요.”
“새 사람 뽑아서 그거 언제 다 가르쳐. 어휴 그것도 일이야 일. 게다가 그 사람이 해외지원팀 인턴처럼 일 못하면 어떡해? 나 속터져서 못해 그럼.”
“에이 설마요...어련히 좋은 사람 뽑겠죠.”
소연이 립스틱을 바르며 하연을 거울 너머로 바라본다.
조금 지친 얼굴로 하연이 서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비친다.
“그냥 하연씨가 계속 일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곳 생각한 곳 있어?”
“아뇨...이제 알아보려고요.”
“아니면 계약 끝나고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와. 기분전환도 좀 되고 좋잖아. 뭘 굳이 바득바득 살아. 지치게.”
“...글쎄요.”
“가끔보면 하연씨는 나랑 동갑같지가 않아. 너무 열을 내면서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아서 안쓰러워.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적당히 하고 살아.”
하연이 거울을 내려놓는 소연을 잠시 바라보며 웃는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