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1294
1회
EP.1 천루원의 죽음
1.
죽음
오늘 낮, 엄마가 죽었다.
“이거…. 꿈인가. 악! 아파.”
아, 진짜다. 이럴 수가 없다 싶었는데 진짜다.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봤지만 너무 아프다. 포근한 날씨, 인자한 엄마의 웃음 분명히 다 좋았는데…. 햇살이 따사롭게 나를 맞이하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언젠간 이별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 누가 감히 죽음을 예상할 수 있겠어.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빈 침대만 바라보다 하루를 보냈다.
2.
장례
엄마의 빈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 중엔 몇 년간 종적을 감췄던 아빠도 있었다.
“잘 지냈어? 우리 딸?”
“….”
“여전히 아빠한테는 차갑네.”
아빠는 엄마의 사진 앞에 간단히 목례를 하고 내 옆에 서서 가족인 마냥 손님을 맞았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내 옆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잠시, 입을 꾹 닫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 했다. 그래도,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 하나쯤은 있다 싶어서.
3.
부재
“이런 시발….”
착각이었다. 며칠 뒤 장례식을 마치고 그 사람은 조의금을 챙겨 달아났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절반은 두고 갔다. 하, 잠시라도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마지막으로 뒷정리를 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던 지인들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엄마의 부재를 위로한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마다 괜찮다고 말해야 했으나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위로받고 싶었나보다.
4.
세계
장례식장에서부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애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싶어 그냥 내 일만 했다. 근데 그 남자애는 그 날 이후로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야 너 집에 안가? 왜 자꾸 따라다녀?”
“너 따라다니는 거 아닌데.”
“뭔 개소리야 진짜! 누가 봐도 나 따라다니고 있잖아;”
그 애는 나를 또 빤히 쳐다봤다. 아니, 왜 쳐다보냐고요.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그 남자애가 ‘이루리―.’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엥, 내 이름 어떻게 알지?
“내 이름 어떻게 알아?”
“진짜였네. 나 기억 안나?”
“모르겠는데.”
“좀 서운하다. 너.”
아니 그 쪽은 누구신데요? 제가 님한테 뭘 서운하게 했죠? 아니,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그냥 무시하고 가려는데 문득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한세계? 너 혹시 한세계야?”
“와 드디어 기억하는거야 날?”
“미안, 나 진짜 정신이 너무 없었나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붙어 다녔지만 아빠 일 때문에 전학을 갔다. 아빠는 엄마를 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고, 새로운 살림을 차렸다. 알리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세계는 모든 걸 알게 됐다. 까먹고 가져간 내 물건을 돌려주러 왔다가 집 앞에서 싸움이 난 것을 봤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 이후로 자연스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근데 넌 장례식장에 무슨 일로 있었던 거야?”
“어? 아, 그냥 지인 때문에.”
세계는 뭔가 곤란한 듯 보였지만 그만의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 더 묻지 않았다. 한 가지 말을 덧붙이길, 그 날 달아나는 아빠를 봤다고 했다. 잠깐 외출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보이지 않기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며 말이다.
“아… 봤구나?”
“응. 미안.”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있어.”
“여기 내 번호, 연락 해. 걱정 된다.”
“그래, 고마워.”
걔는 또 다시 내 비밀을 하나 알았다. 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얘한테 들키는지 모르겠다. 진짜 쪽팔려서 죽고 싶은 지경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하냐고.
5.
하라
[010-XXXX-XXXX 유하라]
핸드폰에 저장해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롤리-폴리’가 흘러나온다. 딱 자기다운 노래였다. 컬러링이 이어지자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준 번호였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전화해본 적은 없었다.
[어…. 유하라 맞아?]
[어? 너…. 이루리?]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유하라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목소리는 처음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고 지낸 건 아니다. 우리는 온라인 친구였다. 서로 힘든 일도 들어줬고, 일상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잘 지내왔다.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지만 그냥 하라라면 잘 들어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어.]
[응 얘기해, 아니다 그냥 내가 갈게. 어디야.]
그렇게 우리는 정식으로 처음 만났다. 그 애는 내가 생각한 딱 그런 애였다. 걔도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이미 엄마 일은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만나자마자 꼭 안아줬다. 그걸 기점으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했다. 하라는 그럴 수 있다며 나를 토닥여줬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 근데, 이 상황에서 미안한데….”
“응, 왜?”
“사실, 나 너보다 나이 두 살 많아.”
“뭐?”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정말!”
“아….”
“내가 진짜 미안! 그냥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냐?”
“아 루리야, 진짜 너랑 나랑 이렇게 끝이라고? 내가 더 잘할게 그니까….”
“그럼 나 지금까지 재수 없게 반말 한거네?”
“아 그게 문제였어? 그건 상관없는데….”
난 또 심각한 표정을 하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그냥 단순 해프닝이었다. 뭐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하면 되는 거니까.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혼자 있기 그럴 거 아냐.”
고맙게도 하라는, 아 아니 하라언니는 자기 집을 내어줬다. 언니는 고향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 있기 적적했는데 마침 잘 됐다며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며칠간 언니랑 지내면서 엄마와 함께 있던 시간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6.
뉴스
결국 언니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언니네 집도 좋았지만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언니는 기존에 내던 월세만큼 지불하는 조건으로 우리 집으로 이사했다. 함께 살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 그 이후 학교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녔다. 마음 같아서는 진즉에 자퇴서를 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언니 이거 봐봐.”
“뭔데?”
언니랑은 진짜 가족처럼 잘 지냈다. 진짜, 숨겨진 혈육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는 잘 맞았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전에 W기업 사장 죽었대.”
“엥? 엄청 젊지 않았어? 갑자기 왜 죽었대?”
“모르겠어. 뇌출혈 증상이 있었다는데 이상하네.”
“진짜 사람 일 모른다…. 엄청 착한 사람이던데 그 사람.”
“그니까 말이야.”
“진짜 불공평해. 성추행범 같은 나쁜 놈들이나 먼저 데려갈 것이지.”
“그니까.”
갑자기 잘 살던 W기업의 젊은 사장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렇게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직도 미지수다.
7.
의문
문득 엄마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워졌다. 엄마가 떠난 지 벌써 두 달이나 됐다.
“저기서는 잘 지내?”
대부분의 사람은 죽으면 이승세계로 간다고들 말했다. 착하게 산 사람들은 천국으로, 나쁘게 살았던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근데 솔직히, 우리 엄마를 그렇게 빨리 데려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뭐 때문에 우리 엄마 데려갔어.”
내가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진짜 신이 있다면 이건 좀 듣고 싶다. 대체, 뭐 때문에 우리 엄마를 데려갔는지. 그렇게 착하고 건강하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갈 수가 있는 거냐고. 진짜, 듣고 있으면 말 좀 해봐요.
8.
꿈
“루리야.”
“으응….”
“이루리. 엄마 왔는데 서운하게 이럴래?”
“으응…. 엄마?”
꿈에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볼 줄이야.
“엄마는 잘 지내. 그냥, 루리가 너무 보고 싶어할까봐 왔어.”
“보고 싶었어. 진짜로.”
“엄마 걱정은 하지 마 우리 딸.”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엄마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응.”
“여기는 말이야, 우리가 살던 세계랑….”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엄마가 나왔다는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9.
재회
→ 한세계 야, 이루리. 왜 연락이 없냐.
← 이루리 아, 미안. 연락한다는 거 까먹었어.
잊고 있던 한세계로부터 연락이 왔다. 얘는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나 싶다. 그냥, 모른척해도 될 텐데. 내가 알던 한세계는 예전부터 그랬다. 그 날, 내가 말도 없이 걔를 피했을 때도 끝까지 연락을 했었다. 내가 이사를 가고 번호를 바꾸고서야 멀어졌었다. 아, 괴롭힌다거나 집착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위로해줬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쪽팔렸다. 어쨌거나 걔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으니.
→ 한세계 진짜, 이번에는 먼저 연락해줄거라 생각했다고.
← 이루리 아 미안하다구~
→ 한세계 미안하면 생존신고 할 겸 밥이나 사.
← 이루리 아 오케이~
그래도 이번에는 고마웠다. 그 때보다 나이를 먹고 보니, 아 물론 조금밖에 더 안 먹었지만, 걔처럼 좋은 친구도 없었다. 내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게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만큼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꿈에서, 우리 엄마 봤다?”
“아 진짜? 좋았겠네.”
“응, 엄청 밝게 웃더라고. 그래서 걱정 안하려고.”
“그래, 걱정하지 말고 너 살 길이나 챙겨. 너는 잘 살아야지.”
“응, 그래야지. 근데 엄마가 재밌는 얘기라면서 세계 이야기를 했는데….”
“어? 세계 이야기?”
“그냥…. 우리랑 조금 다르다 그러던데.”
세계의 표정이 유달리 어두워진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아무튼 세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의 죽음을 다시금 털어낼 수 있었다. 아무런 이야기도 좋으니 필요할 때 연락을 하라며 우리는 헤어졌다.
10.
발견
그 날 이후 엄마는 자주 꿈에 나왔다. 엄마는 자꾸 이 세계 얘기를 했다. 하루는 엄마가 내게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라고 했다. 이제껏 엄마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런 상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 꿈에서 깨어나 침대 밑을 보니 정말로 작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이런 건 언제 놔뒀대?”
상자를 여니 엄마의 손글씨가 잔뜩 적힌 수첩이 있었다. 그곳에는 첫 번째 페이지부터 알 수 없는 문구들이 잔뜩 적혀있었다. 심지어는 엄마가 다른 존재를 본다는 말도 적혀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 수 없는 말들로만 가득한 수첩 사이로 하나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에는 한세계와 엄마, 그리고 하라언니가 함께 웃고 있었다.
“이게 뭐야…?”
꽃이 지고 여름이 왔다. 무더운 진실의 서막이었다.
2회
EP.2 또 다른 세계
1.
노트
한세계는 친해서 알고 있었겠지만 하라언니는? 한가득 의문을 안고 노트를 살폈다.
2015년 02월 23일
사랑하는 우리 딸의 열네 번째 생일이다. 벌써 중학생이라니. 시간이 정말 빠르다.
일기가 적혀있다. 엄마의 글씨가 단정하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울컥했지만, 한 줄씩 천천히 읽어나갔다. 노트의 초반에는 평범한 일상이 적혀있었다. 엄마와의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라 살풋 웃음이 났다.
2015년 03월 06일
이상한 일이 생겼다. 건강했던 이웃주민이 갑자기 쓰러졌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다녀간 뒤다. 옆집에 물어보니 어디를 다치진 않았다고 했다. 그냥,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도 쓰러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옆에 계속 있었다고 한다. 내가 본 모르는 사람의 정체는 뭐였을까.
일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2019년 04월 20일
결국 이웃주민은 죽었다. 오늘도 그 때 그 정체모를 사람이 옆집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근데, 오래도록 알았던 딸의 친구가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그 때 본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이 그 친구의 모습과 같다. 그 아이였다면, 거긴 왜 갔을까? 그 아이는 무슨 일을 했을까,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을까.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노트에 잔뜩 적힌 이상한 말들의 진실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2.
침묵
“요즘 무슨 일 있어?”
“어? 아니야.”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뭐야 말해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왜 화를 내고 그래.”
“아 내 실수야. 미안해. 요즘 좀 힘들어서 그런가봐.”
“그럴 수 있지, 괜찮아.”
언니에게는 직접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꼭 물어봐야겠지.
“근데 언니, 나 봤어.”
“뭘?”
“언니랑 엄마랑, 같이 찍은 사진 말이야.”
언니는 조용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들켜서는 안 될 걸 들킨 얼굴이었다. 침묵과 함께 어색한 웃음만 남을 뿐이었다.
3.
대면
← 이루리 잠깐 시간 좀 내줄래?
← 이루리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언니에게선 도저히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한세계를 불러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한 듯 했지만 그는 이내 시간을 내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짜증이었다.
“너 뭐야?”
“어?”
“너 뭐냐고.”
갑작스러운 짜증에 한세계는 크게 당황한 듯 했다. 하지만 한세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더 다정하게 물어왔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너, 짜증나 진짜.”
“응, 나 짜증나. 그래서 무슨 일인데?”
“하라 언니, 알고 있었어?”
“어?”
역시나 언니와 같은 반응이다. 역시나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사진 봤어.”
“….”
“엄마랑 너랑, 언니랑 찍은 사진 봤다고.”
“루리야.”
“말해.”
“잠깐만 시간을 줄래?”
그는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4.
이상
꿈을 꿨다. 굉장히 이상한 꿈이었다.
“네가 이루리?”
“누구세요?”
“나는 천계의 옥황상제다.”
“네? 어디의 누구요?”
“천계의 옥황상제.”
자신을 옥황상제라 칭하는 사람이 꿈에 나왔다. 처음엔 이게 무슨 개꿈인가 싶어 뚱하게 쳐다봤지만, 그 사람은 꽤나 진지해보였다. 나 참, 피곤해서 그런가. 별 꿈을 다 꾼다 싶었다.
“그래서요?”
“선택지를 주겠다.”
“뭘요.”
“진실을 알려 들지 마라.”
그는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떠났다. 그대로 꿈은 끝이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5.
방문
→ 한세계 잠깐 나와
→ 한세계 집 앞이야.
한세계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그 날 이후 5일만이었다. 그 사이 하라언니와도 정적만 있을 뿐이었다.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5일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아팠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응 얘기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를?”
“그냥 모든 걸. 네가 생각하는 걸 말해봐.”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까 할 말이 없네.”
“잘 생각하고 대답해, 넌 뭘 알고 있는데?”
“그냥, 세상이 개 같다는 거.”
내가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그냥, 이 세상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는 것 그뿐이다. 고민의 끝에는 결국 뭔가 다르다는 것만 남았다. 분명히, 뭔가 다르다. 그 때부터는 모든 게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나를 아는지 그는 내게 자꾸 뭘 숨기고 있냐며 물어왔다.
“아니, 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너한테 물어본 거였어.”
“뭘.”
“너랑 엄마, 그리고 언니가 무슨 사이였는지.”
“그리고.”
“그리고 네가, 진짜로 이상한 사람인지.”
일기장에 적힌 것만 보면 한세계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웃의 죽음과 얽혀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가 궁금했던 것에 열쇠를 쥐고 있다.
“네가 우리 옆집 사람 쓰러진 날에도, 죽은 날에도 옆집에 있었다며.”
“누가 그래, 어머니?”
“응, 네 뒷모습이랑 똑같았다고.”
“그리고, 또.”
“다른 건 없어, 그냥 네가 나랑 좀 다른 것 같다 정도지.”
한세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기서 더 알게 된다면 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쯤으로 의문은 접어두라고 덧붙였다. 대체, 내가 알면 안 되는 진실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6.
선택
그 날 이후로 돌아가면서 이상한 꿈을 꿨다. 그들은 자꾸 진실을 알지 말라고 했다. 계속 같은 말을 들으니 짜증이 났다. 그와 함께 오기가 생겼다. 알지 말라고 하는 건 더 알고 싶은 법이니 말이다.
“시발, 진짜 짜증나”
또 언제는, 옥황상제라는 사람이 한 번 더 꿈에 나왔다. 그가 말하길, 선택은 내 몫이라 했다. 결국 하다못해 터져버린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자꾸 선택, 선택 하는데 뭐 어쩌라고요!”
“….”
“나 모든 걸 알아 낼 거니까,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말라구요!”
그는 내 대답을 듣고 그대로 사라졌다. 진짜, 개 같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7.
천계
또 다시 꿈을 꿨다. 근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운 느낌이 느껴져 속이 메스꺼웠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뜨니 처음 보는 곳이이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살던 곳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났다. 앞에는 큰 성 같은 게 있었다. 성을 둘러싼 구름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시야가 흐릿했다.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성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니, 진짜 뭐야 나 지금 자는 거 아녔어?”
볼을 꼬집으니 꽤나 아프다. 분명히 꿈이어야 하는데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대체, 난 어디에 있으며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반갑구나, 이루리.”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남자 세 명이 서있었다. 그들은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따라오라고 말했다. 일단 그들의 말을 따라야할 것 같아서 조용히 그들을 뒤따라갔다.
“여기는 천계다.”
“천계가 어디죠?”
“천계가 어딘지 잘 모르겠구나.”
“네.”
“그냥 네가 사는 곳과는 조금 다른 곳이다.”
아니, 그건 아는데요. 이보세요, 내가 사는 곳이랑 많이 달라요. 이들은 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성 안을 보여줬다. 그러다가 문득 불길해 보이는 붉은 문 앞에 멈췄다.
“여기를 들어가 보렴.”
“여기가 어딘데요?”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익숙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엄마였다.
8.
약속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꿈에서(느낌이 아무래도 현실 같지만, 결국 나는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를 찾았나 싶었다.
“우리 딸, 보고 싶었어.”
“엄마….”
따뜻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시큰하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응.”
“그래, 그랬을 거라 생각했어.”
“엄마는?”
“엄마도 잘 지냈지.”
“응, 다행이다 진짜.”
반가움도 잠시,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쎄한 느낌이 가득했다. 꿈에서지만 엄마는 나를 자주 만났다. 그 때 더 이상 서로의 안부를 묻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안부를 묻는 엄마라니, 뭔가 잘못됐다.
“근데 루리야.”
“응.”
“엄마는 네가 끝까지, 모든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뭘?”
“더럽고, 추악한 세계의 모든 걸.”
엄마는 분명 재밌는 얘기라고 했었다. 이상하지만 재밌는, 그래서 꼭 알려주고 싶은 세계라고 했었다.
9.
상실
“잘 만나고 왔니?”
“네.”
문을 나서자 세 명이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셋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을 걸었다.
“정식으로 우리를 소개하마.”
“네.”
“우리는 도화경이라는 천계의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도화경, 이를 도 꽃 화 거울 경을 썼다. 이들은 옥황상제를 대신해 천계의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했다. 천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전부 알려줄 수는 없지만 대충 이정도면 알아두라고 했다.
“지금, 그래서 이 세계가 천계잖아요.”
“그렇다.”
“근데, 이 천계는 어디에 있는 건데요?”
“정확한 위치를 말해줄 수는 없다.”
“왜요?”
“그건, 너희 같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이지.”
천계는 어떤 곳이기에,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걸까. 그들은 계속해서 답을 이어갔다.
“천계는, 너희의 세계 위에 존재한다.”
“그게 무슨 소리죠?”
“너희는 우리 아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그게.”
“지배받고 있는 세계라 생각하면 편하겠구나.”
지배 받고 있는 세계? 이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무 지배도 받지 않는데, 무슨 지배? 머릿속은 혼란만 있을 뿐이었다.
10.
직면
그들은 나를 어떤 방으로 데려와 놓고서는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들의 말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무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세계를 벗어난 세계가 있다는 것도, 심지어 그게 지배관계에 있다는 것도, 모든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정말 계획대로 잘 되어가는구만.”
“쭉 먹게나.”
이들은 그런 폭탄을 던지고도 여전히 재밌는지 쭉 술을 들이키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더니 또 다른 말을 해왔다. 취기가 올라 벌겋게 변한 얼굴로 입 꼬리를 올린다. 으, 술 냄새.
“근데 불쌍해서 어쩌나.”
“뭐가요?”
“너희 엄마는 지금 죽었으면 안됐는데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들은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내 머리를 흔들어 놨다.
진실의 폭풍이 매섭다.
3회
EP.3 감춰진 진실
1.
혼란
“너희 엄마는 지금 죽었으면 안됐는데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가 죽었으면 안됐다고? 지금 무슨 소리야 이게? 어지러운 머리를 겨우 붙잡아보지만 감당할 수가 없다. 더 이상 감당이 되질 않는다. 이게, 정말 다 뭐야?….
“혼란스럽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말이야.”
“….”
“말 그대로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폭탄을 던져놓고도 편안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걸 왜 나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글쎄다.”
“정말, 왜 이래요 나한테.”
“후후, 네가 가장 중요한 열쇠기 때문이겠지.”
열쇠? 자꾸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혼란이 계속되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
고통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너희 엄마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거지.”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리는 소리가 고통스럽다. 최근 들어 눈만 감았다 뜨면 도화경이 했던 말이 떠올라 미칠 지경이다. 왜 이런 소리를 해서 나를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가지고 있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진짜 만약에, 다른 세계가 있는 거라면? 그래서 엄마가 죽은 거라면? 아니, 죽은 게 아니라면? 다른 세계로 돌아간 거라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만약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정말로 일반적인 세계가 아니었다면, 또 다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라면, 정말로 우리가 그냥 죽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끝없는 의문만 계속되었다.
“근데 진짜면 어떡해?”
애써 부정해보지만 진실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3.
열쇠
→ 한세계 이루리. 너 잠깐 나와.
→ 한세계 할 말 있어.
한세계가 찾아왔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를 이끌고 그 앞에 섰다.
“그래서 넌 어디까지 알았는데?”
“또 이러네.”
그는 지난번과 똑같은 굴었다. 진실을 알려줄 거면 알려주던가, 그것도 아니면 뭐하자는 건데? 이미 짜증으로 표정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그런 내 표정을 보면서도 그는 변함없이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나만 짜증나?
“뭘.”
“미안한데, 나한테 뭘 물어볼 거면 그냥 돌아가 줄래?”
“이루리.”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프거든? 너 상대할 힘없어.”
마지막 말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4.
해제
쾅쾅쾅-
아침부터 누가 문을 두드려댔다. 너무 큰 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숨을 헐떡이는 한세계가 있었다.
“뭐야 너, 왜 여깄어?”
“야, 허 이루리.”
“야, 너 왜이래? 일단 물 가져다줄게. 잠시만.”
가뜩이나 숨이 가빠보이기에 물이라도 한 잔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바로 막혀버렸다. 한세계는 내 손목을 붙잡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 지금 빨리 가봐야하니까, 잘 들어.”
“뭔데, 무슨 일인데.”
“너도 대충 알 거라 생각해.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거.”
“그래서?”
“천계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그 사람들이 형벌을 수행하는 곳이 이곳이야.”
“뭐?”
형벌을 수행하는 곳이 이 세계라면, 그냥 일종의 교도소라는 말인가? 이 세계가 그런 의미라고? 모든 걸 알 수는 없었지만 한세계의 말대로라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그래서, 이곳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버려.”
“….”
“너희 어머니도, 그 기간이 끝나서, 그래서 돌아간 거야. 원래의 세계로.”
“….”
그랬구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 거구나.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하니 믿었다. 엄마를 빨리 데려갔다고,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분노해봤자 어차피 엄마는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차라리 잘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래의 세계에 사는 게 이곳보다 나을 수도 있으니.
“근데, 뭔가 잘못됐나봐.”
“뭐?”
“그래서 큰 일이 생길 것 같아.”
“무슨 일?”
어딘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싸했다.
“그래서 제대로 얘기해줬으면 해. 너 누구 만난 적 있어?”
“누구?”
“이상한 사람 본 적 없어?”
“도화경이라는 사람들이랑, 옥황상제라는 사람을 본 적 있긴 해.”
“시발.”
한세계는 욕지거리를 남기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궁금한 것이 더 많았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5.
분노
“네 이놈들! 이게 무슨 일이냐!”
한편, 천계에서는 큰 일이 일어났다. 평소 화가 없기로 유명한 옥황상제가 극대노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망자와 관련해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옥황상제의 분노에 도화경과 사제들은 벌벌 떠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단 조금 진정하시옵고….”
진정하라는 그 말이 더 분노를 사버렸다.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느냐?”
“아, 아니 그것이.”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옥황상제는 따로 한 사제를 지목해 남으라 지시했다. 나머지가 다 돌아간 방 안,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앞에 서있었다.
“세계야.”
방에 남은 한 남자는 한세계였다.
6.
사제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으신 건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아까와는 약간 다른, 조금은 따뜻한 표정을 한 옥황상제다. 물론, 티는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세계는 옥황상제가 유달리 아끼는 사제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세계는 일을 잘했고, 누구보다 옥황상제를 굳게 보필하는 인물이었다.
“네가 지켜본 천루원 말이다.”
“예.”
“네가 망자의 길을 인도하였느냐?”
사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저승사자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제는 천계와 인간계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세계의 망자를 관리하기도 하고, 천계 사람들에게 인간들의 세계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처음 사제가 없었던 시절에는 세계가 무질서로 가득차곤 했다. 결국, 이 같은 역할이 필요해 만들게 된 것이 사제 계급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천계의 사람이다. 인간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유형의 사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루리는, 어떻게 된 게냐?”
“그것이,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냐, 네 대답이 그러하다면 이만 나가보거라.”
늘 한세계의 말을 믿었던 옥황상제였지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예전과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한세계 역시 이상함을 느꼈지만 조용히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지금 이 때 조용히 물러나서는 안됐다. 뼈아픈 후회의 시작이었다.
7.
도발
옥황상제가 노한 그 날부터 천계의 분위기는 묘하게 싸했다. 아무도 천계에 일어난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관심을 가졌다가 자신이 피해를 볼까 싶어서다. 옥황상제의 최측근에 있는 도화경만이 이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듯 했다.
“도화경님.”
“예 사제님.”
한세계는 따로 도화경을 만났다. 도화경의 세 명은 한세계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망자를 잘못 인도하셨다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한 아이를 죽이려 하셨던 것은요.”
“그것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한세계가 질문하는 것마다 도화경은 잘 모른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세계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도화경은 그와 반대로 활짝 웃었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사제님부터 잘 챙기시는 게 어떠실까 싶습니다.”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거든요.”
“그러십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걱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해보시겠다는 겁니까.”
“그건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렸겠지요.”
도화경은 경고를 날린 채 자리를 떴다.
8.
작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도화경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이 쓸데없이 비장했다. 조만간 피바람이 불 모양이었다.
“그러면 뭘 어떻게…?”
“다 생각이 있다.”
도화경 중 가장 최고참인 사제가 싱긋 웃었다. 그를 따라 남은 두 사제도 함께 웃었다.
“모든 것을 망쳐볼 계획이다.”
“재밌겠군요.”
“제 까짓 게 어떻게 우리를 이기겠느냐.”
그들의 방에선 웃음꽃이 가득했다. 한 편으로는 시린 바람이 불었다.
9.
시작
“옥황상제님, 도화경 들었습니다.”
“들라.”
도화경은 옥황상제의 방을 찾았다.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말해보거라.”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입니다.”
“으흠.”
“아무래도 한 사제가 잘못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도화경은 옥황상제에게는 보이지 않게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래, 누가 잘못을 한 것 같더냐.”
“한세계 사제입니다.”
“….”
예상대로였다. 도화경은 속으로 ‘됐다!’를 외쳤다. 안 그래도 그들은 옥황상제가 한세계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굳은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견고하게 믿고 있던 믿음에 금이 생기자 걷잡을 수 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망자의 길을 따라가 보니 항상 옆에 그 사제가 있었습니다.”
“….”
“그가 분명,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습니다.”
“….”
예전부터 도화경은 한세계를 탐탁지 않아 했다. 해서 끝없이 그 사이를 갈라두려 했다. 물론, 옥황상제의 믿음이 쉽게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
“이루리. 그 아이 옆에서 무얼 하려 했던 것인지.”
“….”
“이는 명백한 역모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끝없는 이간질은 결국 믿음을 깨트렸다.
10.
누명
“옥황상제님, 한세계 들었습니다.”
“들라.”
그 날 이후 옥황상제는 한세계를 따로 불러냈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옥황상제였다. 한세계는 상제의 표정에서 큰 일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어떤 일 때문이실까 싶어 부름을 기다리는 찰나에 들리는 것은 제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그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음을 느꼈다.
“뭘 했다고요?”
“네가 나를 죽이려들어!”
“상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발뺌할 생각하지 말거라, 그만하면 되었다.”
옥황상제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한세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런 한세계를 보고서도 옥황상제는 한숨을 쉴 뿐이었다.
“너를 믿었다.”
“….”
“너를 진정으로 믿고 아꼈다.”
“….”
“헌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까닭이 무엇이냐.”
“상제님, 제 말을 한 번 만 들어 주십시오.”
“그만 두거라.”
“….”
“여봐라, 사제를 데려가 저 아래에 가두어 두거라.”
진실의 대가는 한없이 무거웠다.
4회
EP.4 억울한 누명
1.
사진
“이게 다 무슨 소리야….”
한세계가 떠난 자리에는 혼돈만 남았다. 나는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그 때, 자고 일어난 하라언니가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줬다. 언니는 다른 말없이 나를 소파에 앉히고 물을 건넸다.
“루리야. 내가 너한테 말 안했었잖아.”
“뭘?”
“사진 말이야.”
“응, 근데 지금 해야 할까?”
“왜?”
“가뜩이나 복잡해서 말이야. 미안.”
“루리야, 그런 거라면 더 들어줬으면 좋겠어.”
아니, 이제껏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동안은 그냥 없었던 일처럼 잘 지내놓고서는, 이제 와서?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사실말야, 너도 이미 들었겠지만 한세계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냐.”
“응.”
“그리고, 나도 그래.”
“뭐?”
“미안,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어렴풋이, 설마 했던 것이 진짜가 됐다. 내 주변에는 그럼 이 세계 사람이 아닌 사람들만 있는 거였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세계에서 너의 어머니, 즉 천루원씨는 이 세계에 대한 비밀을 알려고 했어.”
“응 근데?”
“그게 크게 거슬렸나봐. 도화경이 강제로 망자의 길에 인도한 것 같아.”
“뭐?”
“일반적으로는, 기억을 지우고 끝낸단말야. 근데, 이렇게까지 했다는 건….”
언니는 아까와 달리 사뭇 진지했다. 한세계는 그저 뭔가가 잘못됐다고만 했었다. 하지만 언니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뭔가 거슬리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게 진짜 거슬리는 일인지는 어떻게 아는거냐구요. 지난번 도화경과의 만남 이후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면 항상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다. 언니도 그걸 눈치를 챈 모양인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도화경을 만난 적이 있다고 대답하자 언니가 눈을 크게 떴다.
“너 그거, 한세계도 알아?”
“응. 그거 듣고 오늘 아침에 달려갔어.”
언니는 급기야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2.
재판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언니가 천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뭔 소리야 이게? 천계가 뭐? 재판이 뭐라고?
“자, 천천히 다시 설명해줄게.”
“응.”
“우리 세계의 이름은 천계야.”
“응.”
“그 천계를 다스리는 분이 옥황상제님이시고.”
“응, 여기까진 알겠어.”
“자, 천계 말고 이 세계는 그냥 우리에게는 형벌을 수행하는 곳이야.”
“응.”
그래, 여기까지는 이미 들어서 익숙했다. 사실, 익숙하지 않다. 어떻게 이런 사실이 익숙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이 형벌을 정하는 게 천계의 달력으로 13월이야.”
“13월?”
“응. 여기랑 좀 다르지. 아무튼, 여기서의 시간은 천계와 조금 달라.”
“이해했어.”
“13월에는 재판이 열려. 그 재판으로 형벌을 얼마나 수행할지가 결정돼.”
“응.”
“그래서 형벌의 기간이 결정되면, 이 세계로 태어나면서 형벌이 시작돼.”
형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던 단어라 그런가.
“물론, 천계에서의 기억은 다 지워진 채로 말이야.”
“만약에, 그 기억을 찾으면 어떻게 돼?”
“아까 말한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다시 기억을 지워.”
“그래?”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다른 방법을 쓰기도 해.”
“예를 들면 우리 엄마겠네.”
“응. 그렇게 형벌을 다 지내고 나면, 다시 천계로 돌아가게 돼.”
“어려워. 그래도 이해했어.”
정리하자면 우리 세계에서의 삶은 주어진 형벌만큼을 지내는 것이다. 그것은 재판을 통해 주어진다고 했다. 결국, 이곳에서의 가벼운 형벌이 우리 세계에서의 짧은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어떤 죄를 짓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인간으로서 삶이 달라지는 거라는 말이다. 약간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3.
감금
한세계는 결국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 세계의 지하 감옥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내려진 형벌을 위해 잠시 대기하는 장소기도 하지만 곧 다가올 형벌을 위한 대기 장소이기도 했다. 즉,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 한세계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시발, 도화경….”
이런 짓을 꾸밀 것은 도화경 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했다. 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을 했을까. 한세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더군다나 상제까지 이렇게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시발.”
할 수 있는 거라곤 욕지거리뿐이었다. 한 참을 한숨만 내쉬고 있을 무렵 익숙한 형체가 한세계의 앞에 섰다. 도화경이었다.
4.
반격
“그러게 제가 걱정하라 이르지 않았습니까.”
“천계가 도화경님의 것 같습니까?”
도화경의 태도는 세상을 다 가진 마냥 당당했다. 마치, 너 정도의 애송이가 기어오를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한세계는 그런 도화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걱정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잘못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지금 꼴을 보세요.”
도화경은 일부러 한세계를 더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세계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도화경 쪽 같았다. 그들은 환히 웃던 미소를 급하게 거둬들였다.
“제가 충고하나 해드리지요.”
“해보시겠다는 겁니까.”
“지금부터 걱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하하. 누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보겠다는 말입니다.”
한세계는 그 말을 하고 웃어보였다. 그는 두려울 게 없어보였다. 아무리 봐도 감옥에서 형벌을 기다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에 도화경은 어색하게 웃었다.
5.
돌파
“한세계, 괜찮아?”
“어떻게 왔어?”
“남몰래 부탁 좀 드렸어.”
“그래, 루리는 좀 어때.”
유하라는 갇혀있는 세계를 찾았다. 원래는 허락된 인물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특별히 부탁해 들어올 수 있었다. 유하라는 이 와중에도 이루리를 걱정하는 한세계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니.
“다 알았어.”
“결국, 알게 됐구나.”
유하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한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뭔데?”
“너를 꺼내줄, 카드가 될 거야.”
6.
실마리(과거)
“루리야, 네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해줄래?”
“왜?”
“한세계가 그렇게 달려갔다면, 분명히 큰 일이 났을 거야”
“무슨 일?”
“아마도 한세계가 잡혔을 거야.”
“뭐? 왜 잡히는데?”
“아마도 도화경 때문일 건데, 그래서 네가 아는 모든 걸 얘기해줘야해.”
잡혀? 왜? 뭐 때문에? 아니 대체,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게 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해서 그런 건가. 아니, 그냥 상상만 했는데 그게 진짜일줄 누가 알았겠냐고.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사실 말이야, 꿈에서 도화경이 나온 적 있었거든?”
“응. 혹시 거기서 뭘 했어?”
“거기서 천계를 가본 적이 있었어.”
“뭐?”
“거기서 엄마를 만났었어. 어떤 방에 들어갔었거든.”
“아….”
“근데, 아무리 봐도 엄마가 아닌 것 같았어. 그냥 꾸며진 것 같았달까”
“그리고?”
“아, 나 상제라는 사람을 만난 적 있었어.”
“뭐?”
“꿈에서 나한테, 경고를 하던데?”
언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리곤 나에게 함께 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마도, 한세계를 구하러 가자는 얘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7.
승부
“상제님”
“네가 어째서 이곳에 발을 들인 게냐?”
“제가 오면 안 될 곳이란 건 잘 알아요.”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결국 천계에 발을 들였다. 원래의 내가 이 세계 사람이라도 여기는 지금의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 해야만, 한세계가 살 수 있었다.
“그래도,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여기까지 온 게 가상해서 들어는주마.”
“네.”
“다만, 별 게 아니라면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한 사제와 너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겠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의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상제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보였다. 나는 오는 길에 준비해뒀던 말을 시작했다.
8.
행운
“다시 말해보거라.”
“저는, 한세계를 풀어달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구요.”
“네가 참관할 일이 아니다.”
우선 한세계가 갇혀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야 했다. 물론,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언니가 말해주길, 상제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잘 믿지 않는 우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믿음이 생긴다면 그를 끝없이 믿는 사람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나의 말에도 믿음이 생기길 바라면서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겠죠, 지금의 저는 일개의 인간이지 않나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헌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한세계는 누명을 썼다고요. 억울해요.”
상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이 때다.
“저는, 이 세계의 비밀을 알았어요. 곧 기억을 지우시겠죠.”
“그렇겠구나.”
“그런데, 이 비밀을 알게 된 게 한세계 때문이라 생각하셨던 거 아닌가요.”
“그러하다.”
“하지만, 잘못됐어요. 저를 자극한 건 도화경이었어요.”
“….”
“그들이 나를 천계로도 데려온 적이 있어요.”
상제는 꽤나 놀란 듯 했다.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계의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성공한 것 같다.
9.
운명
“저는 꿈에서 상제님을 뵌 적 있어요.”
“뭐라 했느냐?”
“꿈에서 뵀다고요. 상제님은 저 본 적 있으세요?”
상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뭔가 잘못된 게 있음을 감지한 듯했다. 드디어 내 쪽으로 판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모든 진실을 파헤칠 시간이었다.
“본 적 없으시죠?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
“저는, 어떻게 상제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사실 언니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있었다. 망자를 인도하는 것은 사제의 몫이며 사제의 일에 상제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상제는 망자를 보지 않는 것이 천계의 규율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상제는 누구였다는 말인가? 답은 하나뿐이었다.
10.
자리
상제의 주변에 있던 인물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규율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상제가 직접 다녀왔던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는 한세계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점점 여론의 목소리가 커졌다.
“조용히들 하라!”
상제의 소리에 한 순간에 자리가 얼어붙었다. 상제의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지금 당장 도화경을 불러들여라.”
“예.”
“한세계 역시 같이 불러들여라.”
진실이 제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5회
EP.5 돌아온 일상
1.
심판
“지금 당장 도화경을 불러들여라.”
“예.”
“한세계 역시 같이 불러들여라.”
천계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심장이 떨려옴을 느꼈다. 제발, 세계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게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먼저 도착한 쪽은 도화경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들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한참이나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을 무렵에, 한세계가 도착했다. 그는 나를 보고 한 번 웃었다. 상제가 웅성거리던 사람들을 중재시키고 드디어, 심판을 선언했다.
“지금부터, 도화경과 한세계의 일에 대해 심판하겠노라.”
2.
이유
“그럼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
“….”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 물었다.”
상제의 심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한세계로 시선이 집중됐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어째서냐.”
“그것이 제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세계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저 상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을 뿐이다.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나는 이런 한세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제가 당한 억울함을 그냥 이야기하면 될 것인데, 어째서 저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도화경에게 묻겠다.”
“예.”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저희 역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양 측 모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말했다. 또 다시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길어지는 재판에 지칠 법도 했지만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지켜보던 하라언니가 나섰다.
3.
파편
“말해보거라.”
“도화경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였습니다.”
“어떤 일인 게냐.”
“우선 도화경은, 망자를 잘못 인도했습니다.”
“천루원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망자를 잘못 인도한 뒤 이루리에게 그를 보여주며 협박을 했습니다.”
“어떤 협박을 했느냐.”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다며 강요했어요.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아내라면서요.”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대신 답했다. 상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게다가 도화경은 상제님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으흠.”
“본디 상제님은 인간 세계의 일의 영역을 도화경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 뒤 모든 권한을 넘겨주시고 천계의 일에 집중하셨지요.”
“그러하다.”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제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 이게 전부 천계의 법에 걸리는 일이라면서요? 근데 뭐가 부족하나요? 내가 헛웃음을 내는 순간 하라 언니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무언가, 더 큰 진실이 있을 것만 같다.
“심지어 이 아이는 화람님이셨습니다.”
“….”
“이것만으로도 무엇을 말씀드릴지 아시겠지요.”
내가 뭐기에 상제의 표정이 저래? 근데, 내가 뭐라고? 화람? 그게 뭔데? 사실 화람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른다. 근데 상제의 표정을 보니 엄청 중요한 존재인 것 같다. 도화경 역시 조금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정말로 뭔가 있다. 깨진 조각을 이어붙이니 비로소 결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도화경의 완벽한 몰락이다.
4.
천생
“천생에서의 이루리는.”
“?”
“화람(華籃)님이셨습니다.”
화람, 꽃 화자에 바구니 람자를 썼다. 이를 직역하면 꽃을 담는 바구니지만, 천계에서의 삶에 윤택함을 나누어주고, 그를 담을 그릇이 되라는 뜻이다. 그들은 상제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루리는 천생에서 상제의 딸이었던 것이다.
본디 천생에서 벌을 받은 사람들은 인간 세계로 벌을 받게 되지만, 천계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태어났을 때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이루리 역시, 천생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본디, 이를 관리하는 것은 도화경입니다.”
“그러하다.”
“상제님께서 도화경에게 이를 지정해주셨지요.”
“그러하다.”
“해서, 상제님께서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를 이용해 도화경은 이런 일을 꾸민 것입니다.”
상제에게는 다른 자제가 없었다. 즉, 이루리 하나만 그의 딸이었다. 결국 다음 상제의 자리는 이루리의 것이다. 도화경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죄를 뒤집어 씌워 인간계로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재판부터 인간 세계의 일까지는 모두 도화경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이것을 알 리가 없었다.
“한세계와 저는 우연히 이 아이가 화람님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서 곁을 맴돌았습니다.”
“천루원 역시, 그런 저희를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도화경이 이 아이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명백한 역모였다. 이야기를 쭉 듣던 상제의 표정이 심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웅성대며 언성을 높였다. 도화경의 평화 역시 깨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탓하며 싸우기 바빴다. 혼란이 이어질 무렵 상제가 재판을 선언했다.
5.
시계(과거)
“제가 짐작하는 게 맞다면, 아마도 조만간 나는 이 형벌을 마치겠지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카페에는 세 사람만이 앉아있었다. 천루원과 유하라, 그리고 한세계다. 그들은 꽤나 심각해보였다.
“이 아이를, 꼭 잘 부탁합니다. 이 아이는, 특별하니까요.”
“알고 계셨던 겁니까.”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수차례 협박을 받았습니다.”
“협박이라 하시면은.”
“도화경이 여러 번 찾아와 이 아이의 숨통을 먼저 끊으려 했습니다.”
“예?”
천루원이 말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하라와 한세계 역시 표정에서부터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명백한 역모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원히 이 세계에 가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은 조만간 저를 죽이려들겠지요.”
“꼭 몸조심하십시오.”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사제님들도 부디 몸조심하시고, 우리 아이를 꼭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진을 남겼다.
6.
몰락
“도화경, 자네들에게 재판을 받을 것을 명한다.”
본디 재판은 13월이다. 하지만 상제는 도화경의 죄를 물어 처벌을 하기까지 13월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다고 판단했다. 해서, 이번의 경우에만 특별히 즉결 재판을 하도록 명했다.
“하하하하하, 억울합니다.”
“부디 속죄하거라.”
“하하하하하하, 이깟 애송이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도화경을 끌고 가거라.”
도화경은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억울함을 주장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7.
속죄
“도화경은 고개를 들라.”
“….”
13월, 형벌을 받을 천계의 사람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하지만 도화경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이 시기에 그간의 죄를 돌아보고 그에 맞는 형벌을 정해주게 된다. 도화경 역시, 지난 죄에 대한 죗값을 모조리 치르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이 거울을 보도록 하여라.”
도화경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이는 모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천계에서는 지난 죄의 속죄를 시작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죗값을 스스로 정하게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기간과 형벌에 대해서는 다른 형벌이 추가로 부과되곤 했다.
대부분의 형벌은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모든 형벌이 끝이 나도 형벌을 수행한 기억은 잊지 못한다. 그들이 비슷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 이는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며, 그 기억으로 자신을 조절하는 계기가 된다.
“도화경, 자네들의 형벌은 이제부터 시작될 걸세.”
“….”
“부디, 속죄하여 좋은 사람으로 돌아오게나.”
8.
조각
시작된 형벌은 정해진 기간까지 강제로 끝낼 수 없으며, 그 사이 천계에 대한 기억을 찾게 된다면 파견된 사제들에 의해 기억을 지우거나, 또 다른 형벌로 그들을 다스리게 했다.
인간세계를 사는 것이 어떻게 형벌이냐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상제가 답하길, 모든 희로애락을 느끼며 타인의 삶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더군다나 천계에서와 같은 평화가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 말했다.
“이런 형벌을 만들게 된 까닭은,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헌데 이를 악용하려 들다니, 정말 실망스럽구나.”
“….”
“인간세계에서의 삶으로 죄를 깨우치고 돌아오거라.”
인간세계에서의 행복을 느끼는 것도 역시나 형벌의 일종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행복만큼,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 행복이 깨어지는 순간의 형벌을 위함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재판에서 정해진다. 이를 통해 그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 그들에게 가장 나빴던 부분을 극대화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재판을 통해 짜여진 과정을 그대로 수행하기만 하는 것이다. 상황 속에 갇힌 자들은 결국 끝을 수행한 뒤 돌아오게 된다.
9.
선택
“너에게 선택권을 주마.”
“어떤 선택권이요?”
“형벌을 수행할 이유가 없질 않느냐.”
“네?”
재판이 끝난 상제가 내게 말한 것은 선택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선택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이어진 상제의 말에 곧바로 이해가 됐다.
“이미 진실이 밝혀진 것은 물론이요, 애초에 형벌 따위를 받을 필요가 없질 않았느냐.”
“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정해진 법이 있는 것 아니었나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기에, 정해진 법이 없느니라.”
나는 약간 망설여졌다. 사실, 망설일 이유가 없었음에도 망설여진 까닭은, 아직 그 세계가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겠지. 나는 잠시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10.
인사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결국 이것을 선택한 것이냐.”
“네. 아직까지는 그래도, 더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믿을 수 없겠지만, 인간 세계의 삶을 살고 오겠다고 말했다. 형벌이었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삶이었으니 말이다. 상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금 말을 건네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하냐.”
“뭘요?”
“인간세계의 형벌이 끝날 무렵까지 사제의 삶을 사는 것은 어떠하냐.”
“사제의 삶이라 하면….”
“세계나 하라처럼 말이다. 인간과 함께 살지만, 약간은 다른 일을 하지.”
갑작스럽게 제안한 것은 사제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느꼈지만, 고민해볼 필요는 있었다. 나는 상제에게 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상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모든 것이 안정을 찾았다. 진실이 제 자리를 찾자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6회
EP.6 달라진 세계
1.
일상
오랜만에 돌아온 인간세계에서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천계에서 그런 일을 겪고 돌아오니 인간세계가 무척이나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앞에는 한세계와 하라언니가 앉아있다.
“그래서, 할 말 없어?”
“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셨겠다?”
“아니, 화람님 그게 아니고….”
“아니! 제발 그 존댓말 좀 하지 말고!”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예전처럼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놈의 계급이 뭐라고, 이제 와서 갑자기 존대냐고! 아, 너무 답답하다.
“거기서는 그 뭐냐, 화람 그거였겠지. 근데 여기서 나는 이!루리!라니까?”
“아…. 그래도.”
“제발, 불편하니까 예전처럼 해줄래?”
“으응.”
결국 내 말에 눈치를 보더니 말을 줄이는 둘이었다. 아무튼, 예전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잘된 일이지만, 정말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계속 모른 척 했던 이유가 뭐야?”
“알잖아, 말할 수 없었어.”
“근데, 내가 없었으면 네가 죽을 수도 있었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그게 안 되더라.”
“어휴, 이 한심한 놈. 그래서 내가 있었잖아.”
보다 못해 하라언니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래, 아무리 말할 수 없었어도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럴 때 보면 한세계도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언니는, 얘랑 어떻게 알게 된 건데?”
“나는, 원래 얘랑 친했었어. 바로 옆 관할이었거든.”
“아하.”
“근데, 천루원씨 이야기를 듣고 그 때부터 너를 집중적으로 보기 시작했었어.”
“아…. 그랬던 거구나.”
“응, 그러다가 한세계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 큰일이 나면 내가 있어야겠다 생각했지.”
“좋은 언니였네.”
“그치? 내가 망자랑 사제를 같이 관리하는 꼴이었다니까?”
그렇게 셋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모처럼 화목한, 기분 좋은 오후였다.
2.
사제
“그래서, 사제의 삶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그냥, 돌아오거나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
“그러게, 나도 그랬는데 선택권도 주시고 제안도 해주셔서 놀랬어.”
나도 그 분의 인상 때문에 불안함이 있었는데, 이렇게 배려를 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건 내가 그 분의 딸이라서 그런 건가?
“사제의 삶에 대해서 궁금할 만하네.”
“근데, 별 건 없어. 다만, 조금 힘들 뿐이야.”
“어떤 점이?”
“사제는 망자를 인도하잖아. 근데 그 망자는 죄인이고.”
“응”
“그러다 보니까,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게 참 힘들어.”
“아, 그렇겠다.”
“응, 진짜 힘들어. 주변에서 다양한 삶을 사는 걸 볼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안쓰러워.”
“이해가 된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니 각자의 삶에도 여러 고충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라고 하면, 그냥 인도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만약 사제 일을 하게 된다면 한세계랑 언니한테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
“그리고, 인도하는 순간이 가장 힘이 들어.”
“왜?”
“그 순간을 겪어보게 된다면 알게 될 거야.”
“응, 일단 나도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눴다.
3.
승인
“결정했어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계로 다시 돌아왔다. 약속한 3일이 지나고, 결정에 대한 답을 낼 시간이었다.
“오냐, 어떻게 하겠느냐.”
“사제의 삶, 한 번 살아볼게요.”
나는 결국 사제의 삶을 한 번 살아보겠다고 결정했다. 그냥 천계로 돌아가 편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인간계에서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삶을 살아보겠다 결정한 것은, 양 쪽을 더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세계의 형벌이 이렇게 정해졌는지, 그리고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뉘우쳤는지 알고 싶었다.
“화람에게, 사제의 역할을 명하노라.”
아마도 상제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는 내게 잘 해보라고 다독여주었다.
4.
인도
사제로서 첫 인도는 상당히 빨리 찾아왔다. 처음 맡은 사람은 굉장히 젊은 남자였다. 딱 봐도, 지금 죽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하지만 정해진 형벌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몹시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망자를 인도하는 게 내 역할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를 벌써 데려가시는 건가요.”
“정해진 형벌이 이제 끝날 시간이기에 너를 데려가는 것이다.”
“어째서 지금인가요.”
“그것이 네가 정한 형벌이지 않느냐, 너의 선택이었다.”
나는 인간 세계를 살고 있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만약 진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뭐라고 했을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살려달라고 했을까, 아니면 잘 살았다며 순순히 죽음에 응했을까. 지금의 망자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조금은 살만 했는데, 살고 싶어졌는데 너무 허무합니다.”
“흘러가는 대로, 결국은 흘려보내야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이것이 너의 마지막 형벌이다. 내려놓는 것.”
망자를 인도하고 나니 마음이 이상했다. 약간은 허탈하기도, 또 약간은 안쓰럽기도 하면서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왜 마지막 보내는 길이 제일 힘들다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5.
망자
“왜 힘들어했는지 알겠더라.”
“응, 그랬지?”
“그냥, 잘 보내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어.”
“처음엔 다 그래.”
“근데, 진짜 기분이 묘하더라. 허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어.”
정말 망자를 보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한 쪽의 삶을 살았을 때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잘못 선택했나 싶다가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조금만 더 해보지 뭐.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이 들던데?”
“결국은,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
“응, 그런 생각도 들지.”
“음, 그리고 한 편으론 정말 잔인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랬구나.”
“응, 결국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거잖아.”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젊은 망자여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라. 그 사람은 더 살고 싶어 했거든.”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 거야.”
“응 그러면 좋겠다.”
망자를 인도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 대해서 많이 배운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 사제의 역할을 제안한 것도, 이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6.
상제(과거)
“상제님, 루리에게 사제의 삶을 제안하신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이유라….”
“사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까.”
“허허. 역시 나를 오래 지켜본 사람답구나.”
“예.”
한세계는 옥황상제를 만났다. 이루리에게 사제의 삶을 제안한 뒤, 상제가 한세계를 따로 불러냈기 때문이다.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어째서 이 형벌이 존재하는지를 말이다.”
“허나.”
“그 아이에게 버거울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허나, 어차피 이겨야 할 시련이지 않느냐.”
“예.”
“해서, 네가 많이 도와줬으면 하는구나.”
결론만 말하자면, 상제는 한세계에게 이루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를 이어 상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기에 어차피 겪어야 할 시련이기에, 지금 믿고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 그를 알아가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 것이다. 상제의 말에 한세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7.
이유
나는 노트를 꺼내 그동안 느낀 것들을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이제야 조금 살만한데 데려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 또 어떤 사람은 끝까지 깨닫지 못한 것 같기도 했어.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 자신이 정한 형벌이라지만, 어쩌면 그 형벌은 너무 잔인한 것일지도 몰라.
왜 이런 형벌을 주었을까, 생각을 해봐도 정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왜 이런 벌을 준 것일까. 다른 삶을 살아보면서 그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삶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한 걸까? 과연 무슨 이유였을까.
노트에 적은 문구들을 돌아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인간세계에서 천계사람들이 찾아야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요즘 들어 나의 하루는 이러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상제가 내게 준 과제가 아닐까.
8.
과제
한세계 역시 이에 대해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끈질기게 그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매정한 놈. 왜 안 알려줘?
“내가 알려주는 것 보다는 직접 아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그냥 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아, 나에게 하라 언니가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언니도 퇴짜를 놨다. 알아서 찾아보라면서. 그래서 또 혼자서 고민하는 중이다. 아니, 무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냐고 나.
“이번 망자는 나대신 네가 맡아줘.”
“응? 누군데?”
“이 사람이야.”
“어?”
이세기. 뚜렷하게 적힌 세 글자가 눈에 띄었다. 아빠다. 얼마 만에 다시 보는 이름인지. 망자를 안내하러 간 자리에는 아빠가 가만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루리야.”
“따라오세요.”
그는 나를 따라서 오다 말을 이었다.
“미안했다, 그런 상처를 줘서는 안됐던 건데.”
“….”
“늦게라도 사과를 꼭 건네고 싶구나.”
“…. 행복했어요?”
“응…. 돌이켜보니 행복했던 것 같아. 사실 그랬으면 안됐는데 말이야.”
“행복했으면 됐어요.”
나는 그렇게 사과 아닌 사과를 듣고 아빠를 보냈다. 인도하는 중에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통은 뭐라도 말하기 마련인데,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 의아했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9.
의미
나는 결국 과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답은 찾은 듯 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도 얼추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천계에서 인간 세계를 형벌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삶에 대해 고민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각자 다른 까닭도, 상대와 공유하며 살아간 까닭도, 그 속에 숨겨둔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겠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감정으로 주어지는 또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결국 자기가 겪어야 할 몫이었다. 이곳에 대한 비밀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도 내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인간세계에 대한 답을 이렇게 짐작했다.
10.
사건
한 차례 아빠를 보내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제쯤 조용해졌나 싶었다. 그 때 갑작스럽게 한세계가 대문을 두드렸다.
“큰 일 난 거 같아. 빨리 와봐.”
그래,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있을 리가 없지. 오늘은 무슨 일인가 싶어 대문을 열자 땀을 뻘뻘 흘린 한세계가 서있었다. 그리곤 굉장히 다급하게 내 손을 잡고 끌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달리다 어디 한 곳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천계를 없애고자 하는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