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Web Culture & Arts

웹문예학과

창작 공간

소설

최정현, 「클라우드 나인(Cloud 9)」(2020-1학기 <웹소설창작과비평>)
등록일
2020-07-10
작성자
국어국문학과
조회수
108


 

 

 

1

 

 

앨런 매버릭은 우버에서 퉁겨져 나왔다. 욕지거리를 남기고 떠난 우버의 헤드라이트를 바라보다가, 그는 일어났다. 아직 약 기운이 있었고 이 정신으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머니 레베카마저도 집에 별로 없었으니 그의 방은 친구들과 내뿜는 연기로 가득 찼고, 몽롱한 말씨가 천정을 떠다녔다. 그렇게 혼자 계속 약을 끊지 못하고 거리에서 잠이 드는 날이 많을 때, 약기운이 가셨을 즈음 펍이나 클럽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브라이턴 펍 모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Id 검사가 있었고, 클럽 앞에는 가드와 함께 스캔 기기가 서 있었다. 파장 분위기를 타 그가 입장했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 보는 곳에 들렀다. 우버가 멈추었던 그 자리.

 

 

어떻게 보면 기괴한, 과장된 몸짓을 하며 진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캐스트들이 무대를 채우고 있었다. 앞 좌석에 앉아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낮과 밤. ‘데이나잇의 주인공들이었다. 낮에는 펍을 겸한 식당으로. 밤에는 트랜스젠더 바로. 데이나잇은 목요일 밤마다 오픈 마이크를 진행했다. 앨런은 그렇게 예외적인, 100% 남자 싱어가 되었다. 약은.. 어쨌거나 그에게서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2019년 브라이턴

 

그때는 몇 시였을까. 블랙 백팩을 매고 다소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많지 않은 차가 주말 밤길을 뚫고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나타난 파란 조명이 보인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휘파람 소리가 장내를 채우고 있었고, 가드에게 맥주 한 캔을 받아든 뒤 한 모금을 삼켰다. 연신 몇 모금을 들이키다 아무 테이블에다 놓고 뒤쪽에 서 있는 루크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쳤다. 루크는 데이 나잇의 매니저였고 그의 고질적인 질병 같은 손톱 물어뜯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노래 부를 거야.”

  “제발, 아까 사샤가 무대 망쳐놓은 거 지금 비비가 겨우 올려놓은 거야.”

 

  백팩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샤는 전여자친구이자, 마약 중독자였다. 금단현상인지 그녀의 천성인지, 그녀는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두 눈을 깜박였다.

 

소용없어. 이미 가셨거든.”

 

  그 말에 눈을 지그시 감은 나는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 남자 또 왔네.”

 

  나는 관중석을 훑으며 앞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손뼉을 치는 그 남자는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크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바이올렛이 무대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클럽 데이 나잇의 밤이 찾아왔다. 요란스러운 가발을 벗어 던진 바이올렛이 백스테이지로 종종 걸어 사라졌다. 나는 셔츠 깃을 정리했다. 트랜스젠더 바에서 유일한 남자 싱어로서 떠안는 뒷이야기들이 많았기에, 흠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카우치 서핑을 끝내게 해준 이곳이 은인이라면 은인이었기에. , 한숨을 몰아쉰 뒤, 거울 앞에서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오늘이 약을 끊은 지 며칠째인지 모를 정도로, 나는 많이 변했다. 마른 까닭에 조금 퀭해 보이는 아이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널브러진 아이 섀도 하나를 들어 눈가에 살짝 발랐다. 욕먹기 좋은 눈초리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루크가 관객석에 털썩 앉았다. 앨런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필시 바이올렛이 쓸데없는 협박을 하는 게 분명했다. 루크는, 의자를 옮겼다. 세 번씩이나 이곳에 오고 있는 이 어린애. 몸은 어린애가 아니었지만-

 

내 친구 차례에요.”

 

루크가 온 걸 이제 깨달은 듯 애덤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덩치는 커다란 놈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사실 제일 잘하죠. 우리는 특히 CD가 많아서, 립싱크가 대부분이니까. 아니면 춤을 추고,”

그런가요.”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남자라서 사랑을 못 받는 거지. 루크는 혼자 읊조렸다. 그 말소리를 들었는지 아닌지, 애덤은 다시 무대로 눈을 고정했다. 앨런이 준비를 끝낸 듯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빨리 불러! 아니면 오늘 소파 치워버릴 거니까.”

 

루크의 넉살에 관객들이 거의 웃음을 터뜨렸다. 앨런은 그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들어준 후 다시 시선을 옮겨갔다. 그 남자. 남자는 루크의 말투가 웃기는지 큭큭 대고 있었다. 그 주위를 잠시 훑어본 앨런은 그 남자가 미성년자인 걸 알 수 있었다. 웃기게 생긴 녀석들이 주위를 빙 두르고 있었다. 그 남자와, 여자 몇 명. 그리고 남자 몇 명. 그 남자 옆에는 아이홀이 유난히 짙은, 검은 뿌리가 드러난 핑크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연인처럼 보였지만 여자는 남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쨌든 다른 무리는 트랜스 젠더바 따윈 호기심인 듯, 무대에 더 이상 여자가 보이지 않자 몇몇은 담배를 쥐고 자리를 떴고, 특히 멍청하게 생긴 놈이 핸드폰만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경박스럽게 튕기는 걸 보니 틴더임이 확실했다.

 

거기.”

 

내 물음에 남자는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입술을 내민 채로 오늘 밤 상대 찾기에 집중했다.

 

오늘 그렇게 한가할 여자 없을 테니까 틴더 꺼요.”

 

관객석에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에서 와하하 크게 울리는 소리에 남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남자는 영문을 모르는 듯 하다가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그때서야 허겁지겁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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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커튼 옆으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애덤은 잔에 끼워진 레몬을 빼고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좋아했잖아?”

말이 돼요? 딱 보면 알잖아요. 그냥 스트레이트 고등학생인데. 그것도 <와일드> 나온 주드로 같이 생겼어. 난 그냥 삐쩍 마른 막대기에 솜사탕 붙여 놓은 것 같고.”

 

루크는 웃음을 터뜨린 후 다시 앨런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말이라도 걸어봐요?”

그래. 지금 3번이나 와서 네 노래만 듣잖아. 딱 너 하기 전 세 번째 순서쯤에 들어오는 거 내가 확인했어. 인기 없는 거 데이나잇 사람들 다 아는데.”

 

앨런이 루크를 힐난하듯 올려보았지만, 적의는 없었다.

 

뭐가 두려워?”

, 일단은 고등학생이니까. 죄책감, 부끄러움. 뭐 또 후회 이 정도가 밀려오겠죠.”

 

앨런의 목소리였다. 루크와 선곡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루크는 앨런의 변덕을 허용할 수 없었다. 애덤은 곧 앨런의 시야에 들어섰고 그를 알아챈 앨런이 루크를 향해 손짓했다. 루크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다가 사라졌다. 뒤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미안해요. 바쁜 거죠?”

아뇨. 다른 칵테일 더 줄까요? 항상 같은 거만 마시길래.”

 

빈 테이블로 애덤을 이끈 앨런은 무표정하게 그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 무표정은 곧 깨졌다. 애덤도 그 표정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자신은 웃고 있었다.

 

아 괜찮아요. 그냥 친구 놈 대신해서 사과하러 온 거에요.”

됐어요. 더한 일 많은데.”

 

곤란해 보이는 애덤의 표정 뒤로, 앨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애덤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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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앉은 둘은 주사위 하나를 두고 마주했다. 앨런은 주사위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좋아요. 규칙을 설명할게요. 그냥 2의 배수가 나오는 사람이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럼 몇 살이에요?”

아직 주사위 굴리지도 않았는데요?”

처음이니까.”

. . 열여섯이요.”

 

예상했다는 듯 앨런이 주사위를 잡고 굴렸다.

 

잠깐만요. 또요?”

“4. 첫 경험은 언제였어요?”

어제요.”

뭐라고? 어제요?”

 

앨런이 다시 주사위를 잡으려고 하자 애덤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낚아챘다.

 

좋아하는 영화는 뭐에요? 나는 위아더 밀러스.”

위아더 밀러스? 거짓말이네요.”

맞아요.”

 

앨런이 주사위를 굴렸다. 2가 나왔다.

 

오아시스에서 좋아하는 멤버는요?”

, . 앤디?”

 

앨런이 웃으며 애덤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을 굴리며 대답하는 이 모양새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꽤 재미가 있었다.

 

이거 데이트에요?”

 

주사위 눈을 보며 굴릴 준비를 하고 있던 앨런의 말문이 순간 막힌다.

 

주사위 굴렸어요? . 모르겠어요. 맞아요?”

모르겠는데요. 내가 물었잖아요.”

모르겠어요. 데이트 하고 싶어요? 우리 왜 싸우려드는 거죠?”

 

두 사람 모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파란 네온사인이 둘러진 바 벽에서 루크가 다가왔다.

 

난 집에 갈 거야. 좀 더 있을 거야?”

그래. .. 그럼 6개월 뒤에 다시 소파베드 꺼내놓으면 되는 거지?”

 

루크의 농담에 질린다는 듯 표정을 지은 앨런이 눈썹을 찡그렸다.

 

열쇠는 있잖아, 그치? 데이트 잘해.”

 

앨런은 몸을 다시 돌려 애덤의 잔을 빼앗아 마셨다.

 

데이트군요. 그러니까 저 사람이,”

남자랑 데이트는 처음이에요.”

, 그래요. 그럼, 여자랑 키스해 본 적은 있어요?”

 

애덤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대답했다.

 

그럼요.”

 

앨런이 웃었다. 안 웃기다면 거짓말. 아까 그 여자일까? 앨런은 짓궂은 상상을 이어갔다. 남의 키스를 멋대로 상상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꽤나 웃겼을 것 같다. 앨런은 자신도 모르게 웃다가 애덤가 눈이 마주치자 목소리를 다듬는 척 했다. 그에 애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앨런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주사위를 낚아챘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요? 앨런?”

, 그럼요.”

 

꽤나 빠른 대답이었다. 앨런의 표정은 아직 흔들림 하나 없었다. 가볍게 받아친 앨런이 애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지금요?”

.”

 

마치 결심한 사람처럼, 애덤은 앨런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앨런이 먼저 다가갔고 애덤은 눈썹을 살짝 내렸다.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짧은 마찰음이 지나갔다.

 

, 어쨌든.”

 

애덤이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부딪힌다. 전과는 달리 바로 떨어질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먼저 답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음악이 흐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매우 강렬한 리듬이 귓가에 퍼지듯, 무언가 벅차올랐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았다. 어두워졌다. 어떤 물음도 존재하지 않는 밤이었다. 감정을 일부러 정의하려 들지 마. 쿵쿵 울린다. 심장이? 의자가 바닥을 뒹굴고 파란 불빛이 그들을 감싼다. 폐장 분위기에 다다른 장소. 관중없는 이 무대속의 시간. 그들이 마치 홀로 기쁘게 남겨졌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서둘러 데이나잇을 빠져나왔다.

 

애덤은 시에서 지원하는 캠핑카에서 살았다. 각각 다른 매력을 지닌 캠핑카들이 모여있었고 시내와는 조금 동떨어진 들판에 세워져 있었다. 애덤의 캠핑카는 평범해서, 찾기가 쉬웠다. 누가 아무런 장식없는 이 장소가 소중하게 느껴질까? 하지만 그때 그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매우 바빴다. 차체가 벽이 되었다. 누군가의 등이 부딪혀 애덤의 자전거가 곤두박질치듯 땅으로 떨어졌다. 그때는 소음이 없었다. 둘은 다시 몸을 붙였다. 잠시 떨어져 문을 열었다. 주방을 지나, 한쪽 방으로 걸음은 더 바빠졌다. 이상하게도 큰 소음이 이 집 같은 좁은 차 안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앨런은 블랙 백팩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놀란 애덤이 앨런의 얼굴을 잡고 멈췄다. 그러나 다시 몸이 다시 부딪혔다. 다시, 다시 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며칠이 마법처럼 계속 흐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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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후, 앨런은 이 캠핑카에 완벽히 적응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는 앨런에게 그냥 천장이 낮은 가정집이었지만, 아침마다 애덤은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둘은 매일 서로를 놀라게 하는 재미를 깨달았고 과하게 침대 끝으로 내몰리는 좁은 침대도 적응했다. 옷을 갖춰 입지 않고 차 안을 흔들며 다녔다. 어쨌든, 앨런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코스타 커피에서 두 잔을 사 오고 스탬프를 찍었다. 애덤의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아직 이불에 파묻힌 애덤을 보고 앨런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커피 향에 눈을 깜박거리던 그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뒤척였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앨런이 애덤 위로 풀썩 쓰러지며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이 완전히 떠졌다.

 

“1916424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항해서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지.”

 

애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불이 완전히 걷혔고 앨런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애덤이 침대 헤드로 상체를 기대었다. 그때 주방 저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누군데?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애덤이 대신 일어나 방을 나섰고 앨런은 화장실로 향했다. 애덤이 벨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앨런을 불렀다.

 

앨런, 저장되지 않은 번호야.”

 

? 앨런은 잠시 생각에 잠기며 고민을 했다. 사샤인가? 그럼 애덤이 받아도 되려나. ! 샤워 헤드를 잘못 틀었다. 아침에 이미 샤워를 끝냈는데. 옆으로 비켜 선 앨런은 떨어지는 물소리 속에 침묵했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샤워 헤드에서는 물이 쉴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갖가지 가능성에 싸인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애덤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앨런?”

, . 받아봐. 혹시 동료들일수도 있어.”

애덤은 화장실을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주방 앞 테이블에 풀썩 앉은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연 순간 알림이 두 세 개 울렸다. 메일이었다. 애덤은 자신의 아이디가 로그인 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알림창을 닫으려 할 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통화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애덤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는 노트북을 닫지 못한 채 화면에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메일 제목을 계속 읽었다. 전화를 끝마칠 무렵, 애덤은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문이 닫힌 화장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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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혹시나 사샤의 날카로운 고음이 들릴까봐 한쪽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애덤은 대답이 없었다. 누구냐는 둥, 일절 반응이 없었다. 누구길래 그러지? 앨런은 눈을 끔벅거리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젖은 머리를 털고 수건을 꺼냈다. 혹시나 모를 가능성에 일찍 끝마쳤지만, 여전히 밖은 조용했다.

 

애덤?”

 

문을 열고 나선 앨런은 머리를 감싸쥔 수건을 꽉 붙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애덤은 밖에 서있었다.

 

누구 전화였어? 설마 여자? 바 사람들?”

 

앨런은 입술을 깨물며 발을 내딛었다. 애덤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앞을 보고 있었다. 앨런은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 핸드폰은 들려있지 않았다. 앨런은 급히 캠핑카 안으로 들어섰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확인되지 않은 메시지가 띠링 하고 울렸다.

 

[해리스 선생님에게 연락했다. 메일 보렴.]

 

레베카의 문자였다. 저장되지 않은 이 번호는 그의 전 상담치료사였다. 앨런은 열린 노트북을 보고 당황했다. 잠금화면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른쪽 너머에는 메일이 몇 개 도착해있었는데, 하나는 홀리스터에서 온 메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테스코였다. 모두 홍보성 메일이었다. 불행하게도, 마지막 하나는 아니었다. 핀 해리스는 그가 병원에서 나온 직후 개인 상담을 도맡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앨런을 집단 상담으로 단계를 진화하려고 할 시점 앨런은 다시 약에 손을 대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떠돌다 데이나잇에 불시착한 게 이전의 일이었다.

 

앨런이 당황했다. 몸을 살짝 돌린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애덤을 쳐다보았다. 애덤은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창으로 알수있듯, 애덤도 못지않게 당황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젠장, 앨런은 노트북을 들고 일어섰다. 화장실 문소리가 쾅 하고 닫혔다.

 

 

2

 

 

화장실로 들어온 앨런이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는 않았지만 애덤의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들었다. 앨런은 잠금화면을 풀고 스카이프에 접속했다. 젠장, 젠장, 젠장!

 

엄마!”

 

앨런은 레베카의 얼굴에 소리를 냅다 질렀다가 밖에 애덤이 있는 걸 깨닫고 헙하고 입을 막았다. 레베카는 화면에서 좀 멀어지더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 귀 안 먹었다.”

그걸 왜 해리스 선생님한테 연락해요?”

새로운 모임을 찾겠다고 약속했잖아. 네 파트너는 아는 거니?”

엄마.”

그래.”

애덤한테 더 웃긴 꼴 보이게 하지마요.”

 

입술을 다문 채 레베카를 향해 말했지만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세상에, 스물여섯 살 먹고 엄마와 아침부터 논쟁이라니. 오히려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으면 배워둘 게 있었을텐데. 앨런과 레베카의 사이가 가까워진건 얼마되지 않았고 레베카가 유일하게 참견하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으니 앨런도 더 이상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앨런의 마음 속이 들리는 것 마냥, 레베카는 홍차에 우유를 따라 넣었고 그뒤로 가볍게 볼을 맞추고 가는 레미가 보였다.

 

네가 아직 집 구할 생각이 없고, 캠핑카에 사는 성인 고등학생과 사귀는게. 웃긴 일이니?”

앨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이 말투란 적응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앨런도 레베카의 아들이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은 모자관계는 두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갈등이었다.

농담이고. 차라리 루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니? 아직도 모르겠지?”

이제는 아니죠. 방금 엄마가 말해버린 게 있으니.”

 

레베카는 모른 척 티스푼으로 홍차를 저었다. 대답을 기대한 적도 없어서, 앨런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연락할게요. 아빠한테 안부 전해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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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대답을 듣지 않고 노트북을 닫은 나는, 어떻게 나가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노크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 계속 문앞에 서 있었을까? 아니야, 그러진 않았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젠장, 하필 애덤이 학교 가는 날에!

 

레베카한테 인사 못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줘.”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묻지 않는건가?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가면 언제 얘기를 하려고? 일어나, 앨런. 앨런 매버릭. 지금. 지금? 지금.

 

잠시만!”

 

순간 몸이 튀어나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던 애덤이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노트북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쿵쿵쿵 소리가 들렸고 애덤을 앞서나간 내 몸이 문을 다시 쾅 닫았다.

 

얘기 안 듣는 거야? 물어볼 게 없어?”

 

애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문 입술은 말이 나올지 아닐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침묵이 조금 길게 흘렀다.

 

나는

“2년전이야!”

 

아뿔싸, 그가 말을 시작하려 했는데. 하지만 이미 바보같이 더듬거린 입술은 멈추지 못하고 계속 말이 터져나왔다. 그것을 필두로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만큼 뇌리에 떠돈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시작되었다.

 

어디까지 본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NHS(*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 치료도 받았고 하, 말하자면 너무 길어. 정기 검사도 받고 있어. 내가 하고싶은 말은 나 이제 마약과 전혀 무관하단 소리야.”

앨런.”

 

, 그의 소리에 고개가 푹 숙여졌다. 부끄럽냐고? 아니, 이건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다. 루크는 6개월 뒤에 오라고 했는데. 망할. 무슨 말을 해야 해. 대답은 어떻게 하고.

 

나는 더 듣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바쁘니까 갔다와서 얘기했으면 좋겠어.”

 

질끈 감은 눈이 떠질락 말락 한다.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본다. 화난 거야, 뭐야? 내가 여기서 언성 높여서 뭐하지?

 

그리고 모임 가도록 해. 서로 갈 곳이 있는 거잖아.”

무슨 소리야. 필요없다고 설명했잖아?”

 

뭐라고 했어? 애덤은 화도 내지 않고 그저 다소 무미건조한, 그러나 무언가 드러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른 채 말을 꺼냈다. 그 어조는 적잖이 단호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내 반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애덤의 눈썹이 꿈틀했다. , 이런. 애덤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왜 먼저 말을 안 했고?”

이제는 아니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머리를 짚은 애덤이 머리를 헝클인 후 숨을 내쉬었다.

 

좋아. 당신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런 눈치조차 못 챘어.”

그래. 바로 그게 내가 그 망할 치료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아도…….

그만. 앨런. 난 갔으면 좋겠어. 당신한테 필요하고, 나도 그러길 바래.”

 

내 얼굴이 웃기게 어그러졌을것이다. 돌아가기 싫었다. 그럴 필요 없었으니까! 다만, 이 어린 연인이 바라는 게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애덤이 가방을 다시 챙기고 무어라 할 순간도 주지 않은 채 자전거에 올라탔다. 힘차게 구른 발은 벌써 빠르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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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댄 코머고, 저는 중독자에요.”

 

실내체육관에서, 여섯 개의 의자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앞을 보면서 말했지만 앨런의 시선은 저멀리 걷힌 두꺼운 커튼에 꽂혀있었다. 안녕하세요, 앨런. 하고 그에게 답하는 다른 중독자들이 지나가고 그의 귀로 다음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들렸다.

 

. 반가워요. 코머 씨. 뱅크 홀리데이(*영국의 공휴일)에 트루아 다녀왔더군요.”

 

그뒤로 짧게 잡담이 이어졌고 말이 끝난 털로우가 앨런에게로 시선을 멈췄다.

 

우리 새 회원 분께 인사할까요?”

 

앨런은 숨을 들이마셨고, 체육관 끝 문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앨런이고 중독자에요.”

반가워요. 앨런.”

잘 왔어요.”

 

큰 과제를 끝낸 듯 앨런은 그때서야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가 격려하듯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앨런은 그때 자기 손아귀로 파고드는 뜨뜻미지근한 손을 느꼈다. 나이 든 부인이 그의 손아귀를 지나쳐 손목을 다소 힘있게 잡아주었다. 새 회원에 대한 배려인지, 그는 여자든 아니든 주름 가득한 그 손이 어색했지만 빼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말해볼 사람 있을까요? 앨런 대신에.”

 

마치 초등학생처럼 손을 번쩍 든 여자는 털로우와 눈을 맞추었다. 그가 끄덕일 새도 없이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저는 헤일리고, 마약을 끊은 지 총 723시간이 흘렀어요. , 정확히 812..네요. 미안해요. 제가 이런 건 정확히 해야해서.”

 

헤일리는 말하는 중간에 손가락으로 체육관 안의 시계를 가리키더니, 씩 웃고 말을 계속했다. 앨런은 그 손길에 저절로 따라가다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앨런이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헤일리는 말을 멈춘 채 그를 올려다보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담사인 이안마저도 놀란 듯 했다.

 

, 미안해요. 해리라고 했나요?”

헤일리 머피에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본 헤일리는 진저빛 머리카락을 꼬았다. 왠지 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앨런이 할 말이 있나보군요?”

 

털로우는 그를 향해 손짓했고 앨런은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헤일리. 말 막아서 미안해요. , 모두들. 저는 이 모임이 필요없는 것 같아요. , 사실 저는 손 대지 않은지 2년이 넘었고, 이 바보같은 모임도 별 효과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두들 잘 있어요. 약속이 있어서.”

 

털로우는 그를 딱히 막지 않고 모두를 한 번 쓱 보더니 말을 꺼냈다.

 

. 모두들 새로 온 사람에게 뭐라고 하죠?”

또 오세요, 효과가 있어요.”

 

앨런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떤, 무언가 크고 답답한 것이 그의 목울대를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멍해지고, 목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계속 중독자인 걸 상기해야 하는 기분. 자신이 중독자인걸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것. 모르겠다. 앨런은 문을 닫고 나서도 문앞에 계속 서 있었다.

 

저기.”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있는 지도 몰랐던 새하얀 금발의 늙은 여자. 아까 그의 손을 잡아주었던 여자와는 또 달랐다. 아니, 착각하는 거 아니야? 아까 그 부인인가. 앨런이 혼란스러움에 못 이겨 말을 꺼내지 못하자 그녀가 싱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모임이지.”

 

그가 백팩을 짓이기듯 껴안다 그녀의 말소리에 정신이 든 것처럼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 약간 탁한 색의 녹색이 그녀의 나이를 증명하듯 앨런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비타민 A 과잉증인가보죠.”

나도 이 모임에 잘 나오질 않는데, 당신도 그런가보죠?”

 

그녀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꺼냈다.

 

골든 버지니아네요.”

 

그녀는 빠르게 담배잎을 종이에 만 다음 침을 묻히며 그를 쳐다보았다.

 

주변에 피는 사람이 있나 보죠?”

. 아버지가 중독이라 가끔씩 보내드려요.”

어지간히 구석에 사시는보구만.”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연기를 한 번 내뿜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앨런은 급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앨런 매버릭이에요. 앨런이라고 부르세요.”

그냥 베스라고 불러요. 남편은 죽은 지 오래야.”

 

앨런이 웃음지었다. 한 성깔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베스는 연기를 몇 번 내뿜더니 이내 바닥에 내팽겨쳤다.

 

도저히 못 피겠군. 왜 여길 왔담?”

 

베스는 당장이라도 입을 헹구고 싶은 듯 켁켁 거렸다. 앨런은 백팩을 뒤져 마실 것을 찾았지만 헤드폰과 씨디 몇 장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죄송한데 아무것도 없네요.”

됐어. 근처에서 파티가 있는데, 거기서 샴페인 하나 마셔주면 끝나겠지.”

 

? 잘못 들은 듯 앨런이 물을 겨를도 없이 베스의 작은 체구는 씩씩하게 앞서나갔다. 앨런은 급히 가방 지퍼를 닫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티 분위기라지만, 적당히 조용하고 시끄러웠다. 작은 저택에서 열린 파티는 손님들이 많은 듯 연신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베스와 앨런도 무리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테스코 샴페인이라니. 영 최악이구만.”

 

베스는 테이블에 가득 놓인 샴페인잔을 둘러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앨런은 백팩을 맨 채로 바보같이 서 있었다. 누가봐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같은 조합이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안 거에요?”

 

앨런은 얼굴 앞으로 샴페인잔이 들이밀어졌고 베스는 어깨를 살짝 웅크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베스는 마시는 걸 멈추지 않은 채 손가락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켰다.

 

저기, 키 큰 남자 보여요?”

갈색 머리 남자요?”

 

베스는 말없이 샴페인을 비웠다. 아무렇게나 빈잔을 두더니, 화려한 꽃장식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에 앨런은 멀뚱멀뚱 서 있다가 그녀를 따라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뭐야, 호스트라도 되는건가.

 

쟤가 내 아들이요. 이쪽 봐요?”

 

앨런은 더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몸은 여전히 숨긴 채였다. 깜짝 손님으로 온 건가. 그러기엔 베스의 행동이 너무나도 수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호스트가 아니었고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계속 체크하고 있었다. 복장도 특별할 것 없었다. 그 뒤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그 남자에게 무어라 지시를 했다. 앨런은 아 소리를 내며 베스를 쳐다봤고 베스는 무표정으로 남자의 뒷통수만을 보고 있었다.

 

지금은 인사하면 안 되는 거겠죠?”

 

앨런은 코코넛롤을 바삭 씹으며 베스의 눈치를 보았다. 베스는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남자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앨런은 입안에 가득 담긴 음식물을 우물거리다 정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호스트의 아들인 듯, 한 남자 아이가 주축이 되어 좀 더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어린 청소년 몇몇이 따라갔다. 가려진 틈새 사이로 그들은 무언가 투명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앨런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침을 삼켰고, 손은 샴페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챙강!

 

서너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딱딱한 바닥에 마찰음을 내며 깨졌다. 작은 잔이라, 유리 조각은 몇 개 나오지 않았지만 그 순간 시선이 테이블 뒤로 숨은 노파와 깡마른 남자에게 쏠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앨런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앨런은 베스를 다급히 불렀다.

 

, 베스?”

 

베스는 그 순간에도 앨런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갈색 머리 남자가 몸을 완전히 돌려 그들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걸 알자 베스는 경기를 일으키듯 벌떡 일어섰다. 베스는 도망치듯 뛰쳐나갔고 남은 앨런이 우물쭈물하다 함께 따라나섰다. 열린 문 밖으로 달려나간 베스는 점점 멀어졌고 앨런은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아 다소 비틀거렸다. 얼른 벗어나야겠다, 생각이 들 때 즈음 그의 어깨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돌려졌다.

저 노인네 따라다닐 만큼 시간이 많아요?”

 

갈색 머리 남자, 앨런은 그의 억양이 아이리시인 것을 알아보고 갸우뚱했다. 베스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곳까지 생각이 미칠 즈음, 앨런은 남자가 사용한 어휘에 반감이 밀려와 손을 탁 하고 내쳤다.

 

어머니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남자는 앨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돌아갔다. 많은 것이 이상했지만, 앨런도 사라진 베스를 추궁할 수 없었다.

 

 

3

 

 

도로시 스트링거 고등학교는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학교라 먼저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앨런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여느 학교와 같이 아이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앨런은 그중에 자신이 아는 한 얼굴을 찾으려 애썼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키가 큰 건지.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학교란 곳이 썩 어색했다. 자신은 학교란 곳을 제대로 다니지 않았으니까. 갑작스럽게 온 거였지만 오히려 앨런은 교정 안에서 쭈뼛거리기만 했다. 생각보다 학생들은 자신들과 별다를 게 없는 앨런을 그냥 지나쳐가거나 신경 쓰지 않고 학교에서 못다 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애덤은 앨런의 바람과 달리 교탁 앞에 잡혀있었다. 이유는 작문 숙제 때문이었다. 작문 주제는 그의 진을 빠지게 했다. 그에게 글의 완성을 강요하는 앤토니아 선생님도 만만치 않았지만, 애덤의 고집은 오늘따라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숙제로 돌리는 것으로 항복을 선언했고 애덤은 그마저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 종이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애덤. 정말이야. 내일까지 완성을 하지 못하면, 도서관에서 보는 거로 하자.”

 

그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어차피 작문 숙제를 할 시간은 없고 그보다 중요한 과제들이 남아있었으니까. 애덤은 살짝 빠르게 걸어 교실을 나왔다.

 

애덤!”

 

그를 크게 부른 이나는 주차장에서 애덤의 친구들과 모여있었다. 반짝거리는 새 차 옆에서 함께 떠드는 친구들은 그를 맞았고 학기 첫날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여름학기였고 9월의 대학진학을 생각하는 평범한 대화였다.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요즘 바다에 나오지도 않고. 우리 어제 피어에 있었는데.”

요즘 조금 바빠서. 나 가봐야 돼.”

 

앨런은 드디어 시야에 나타난 애덤을 보고 웃음 지었지만 그와 합류한 친구들에 살짝 머뭇거렸다. 그중 저 익숙한 여자는 3개월 전 그 여자였다. 애덤의 곁에 있던 핑크 머리색 여자. 물이 다 빠져있긴 했지만, 여전히 핑크빛은 그녀의 머리에 감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몰라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있는 애덤마저도 둘의 시너지는 잘 어울렸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애덤은 이나의 말을 별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다급해 보였고 주변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애덤의 자전거에 서 있던 친구 무리가 낄낄대며 그에게 말을 걸었고 안장에 앉아있는 친구를 애덤이 웃으며 밀쳐냈다. 애덤이 자전거를 끌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자전거에 올라타 발을 구르려는 애덤을 쫓아서 이나가 옆에 함께 섰다.

 

앨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냥 다가가기로 했다. 아까와는 다른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었다.

 

애덤!”

애덤?”

 

앨런이 애덤을 불렀고 이나는 애덤에게 물었다. 이나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손짓을 했다. 애덤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자전거가 땅에 처박혔고 이나는 멍하니 그 둘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앨런의 등을 잡아채곤 애덤은 빠르게 주차된 차들 사이로 들어갔다.

 

뭐야, ? 무슨 일인데?”

 

사실 3개월 전 라이브 무대에서 봤던 그 핑크 머리 여자가 보였던 탓에 기분이 별로였지만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간 앨런은 급해 보이는 애덤이 의아했다. 애덤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안장에 앉아 앨런에게 대답했고 앨런은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얘기할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빨리 헤어진 아침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는데.

 

애덤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핸드폰을 번갈아 보며 앨런의 눈치를 살폈지만, 저 멀리 친구들의 말소리가 점점 그의 귀로 다가왔다. 나중에, 다음에. 농담으로 치부하듯 넘기는 그의 태도는 앨런을 상당히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둘의 나이 차 때문일까. 아니면 이렇게 찾아온 건 예의 없는 뜻이었을까. 사실 그를 만나자마자 끌어안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성인임에도 학생이었기에, 앨런은 참고 있었다. 무엇을? 화를? 글쎄, 모르겠다.

 

사실, 나 파트타임 시작했어. 처칠 스퀘어에서.”

? 무슨 일 하는데?”

그냥 기로스 파는 데야.”

 

기로스? 갑자기 뜬금없이? 어제까지 아무 말이 없었는데. 언제 결정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무척 급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무어라 말을 얹는 것조차 선뜻 마음이 나서질 않았다. 어쨌든 삼 개월 동안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일 직전에서야 알게 된 모양새는 영 그가 반기는 방식이 아니었다.

 

나 기로스 좋아해! 8월에 축제도 나가는 가게야?”

 

그는 참았다. 어쨌든 본인도 아침에 타의로 저질러진 폭로가 있었으니까. 그의 숨길 노력을 하지 않았던 총체적인 비밀에 비하면 너무 귀여운 수준이었기에.

 

미안. 그건 지금 모르겠어. 먼저 갈게.”

 

그는 가볍게 목덜미를 안아 볼을 맞추었다. 오늘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짜증나 죽겠어.”

 

사실 이게 진짜 마음이었을지도. 앨런은 데이나잇으로 발길을 돌리려다 트라팔가 스트리트로 향했다. 여름날은 아직 해가 떠 있었고 모임까지 빠져나온 마당에 시간이 애매했다. 아시안 마트를 가려 하다 비건 카페에 앉아있는 루크를 발견했다.

 

루크는 동행과 함께 있었다. 앨런은 그와 함께 앉아있던 얼굴을 보고 더 어이가 없었지만, 루크는 앨런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잔뜩 흥미로워 보였다.

 

디나이얼?”

 

루크의 동행은 몇 시간 전 빚을 져 버린 남자였다. 코너는 무미건조하게 앨런의 신경을 한 음절로 건드렸다. 앨런은 바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루크의 지인이고 그가 한 행동이 있기에 막말을 하기 어려웠다.

 

“3개월이 끝이야? 플랏 메이트 안 구해도 되려나?”

 

앨런은 못 참고 루크의 어깨를 퍽 쳤다. 힘이 거의 실리지 않았지만 루크는 엄살을 부렸다. 코너는 관심도 없는 듯 앨런의 얼굴을 바라봤다. 앨런은 딴 곳을 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왠지 모르게 베스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노상 카페에 앉은 그들 테이블 사이로 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지나쳐갔다.

 

그쪽 파트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이걸 계속 참아야 하나? 그의 일을 망쳐놓은 건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초면에 참견이 꽤 집요했다. 루크는 이상하리만큼 날 선 말투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니 뭘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도 않을 터였다. 앨런이 결국 입을 열려 하는 순간 뒤에서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런!”

 

누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등에 몸을 기대었다. 안긴 사람은 앨런보다 키가 다소 컸기에 하이힐 앞코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앞을 바라본 루크는 헉하며 앨런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맥주를 머금은 입안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백발의 빨간 뺨. 알비노 모델 같은 창백한 피부. 작은 체구의 뼈가 드러나는 마른 몸. 사샤였다. 몇십 일 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인상이었다. 사실, 그날 밤 그녀를 찾으러 갔다면 조금 더 빨리 마주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늦게 도착했고 그녀를 거의 잊은 상태였다. 그녀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름에 다시 찾아온 그녀는 무슨 존재랄게 남아있지 않는 상태였다.

 

루크는 여전히 맥주잔을 든 상태로 사샤를 쳐다봤고 목을 축이고 있지는 않았다. 사샤는 내 얼굴로 눈빛을 쏴대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건 실로 반갑지 않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사샤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자가 아니었고 코너 역시 그녀의 눈동자에는 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샤는 개의치 않고 내 말을 기다렸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축제 준비 때문에 나온 건데, 데잇 나잇 당연히 참가하겠지?”

 

유럽 최대의 LGBT 축제, 브라이턴의 여름이 오고 있었다. 비영리 단체들이 퍼레이드를 준비했고 퀴어 클럽인 데이 나잇도 매년 퍼레이드에 참가하곤 하였다. 사샤의 부재로 컨셉 역시 별로 부딪힘 없이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루크의 정신을 더욱더 멍하게 만들었다. 모두의 대답이 없는데도 사샤는 아무런 신경도 안 쓰이는 눈치였다.

 

나 짐 놔두러 가야 해. 앨런, 먼저 같이 가자. 열쇠 줘.”

 

사샤는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루크를 향한 첫 마디였다. 엄연히 고용주와 고용인의 입장인데도 사샤는 여전히 멋대로 굴었다.

 

!”

 

루크는 말없이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열쇠를 뒤져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루크는 핸드폰을 켰다. 아마도 데이나잇 식구들에게 이 소동의 재시작을 알림을 위함이겠지. 그러나 사샤를 만만찮게 못마땅해하는 루크의 견해를 생각하면 그녀의 재림을 반길 리가 없었다. 사샤는 싱긋 웃으며 열쇠를 집어 올렸고 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말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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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짐이 많았기에 우버를 잡아탔다. 가는 내내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닫았고 나도 말이 없었다. 머릿속은 올해 역대로 시끄러웠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은 너무나도 짜증 났고 혼란스러웠다. 3자로 이루어진 폭로. 애덤의 180도 다른 모습. 악연이 될 것 같은 남자. 세세하게 말해봤자 짜증이 다시 밀려올 것 같아 그만 떠올리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우버 기사도 우리의 눈치를 봤다.

 

사샤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짐을 덜 가져간 거로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새로 가져온 짐은 더욱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기분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이나 차의 트렁크를 왔다 갔다 할 동안 그녀는 침묵을 고수했다.

 

문이 열려있어.”

?”

 

무슨 일이지. 요즘 도둑이 든다고 하더니.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옆으로 밀어 세운 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져 있었고 분장실도 인적이 느껴졌다. 뭐지.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 하기에는 어질러진 곳은 없었고 데이 나잇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누가 먼저 오픈 준비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어제 문 잠그는 걸 깜박했나. 나는 한숨을 쉬고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앨런.”

.”

 

그 말이 시작이었다.

 

지금 비비 있어? 발렌시아는? 샨젤라는 없다고 말해.”

 

모두 다 사샤가 쫓겨나길 기다리던 위인들이었다. 그녀들이 사샤를 참아주고 있는 것조차 믿기 어려웠으니까. 본인의 안위가 걱정이라도 된 듯 사샤는 먼저 질문을 퍼부었다. 그건, 이라고 답하기도 전에 사샤가 말을 막았다.

 

아니다, 그년들 얘기는 하지 마.”

 

사샤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가슴이 참 답답해졌다. 애초에 내가 하려는 말은 그녀 쪽에서 차단이었다. 슬슬 화가 날 것 같았다. 우리가 자주 싸웠던 이유가 수면위로 오르려 했다. 나도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녀는 그러한 성격에 맞서려 드는 성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이 자리를 벗어난 후 할 일을 생각했다. 애덤을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공간이 필요했다. 그 좁디좁은 캠핑카에서 이산화탄소가 가득 차도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지루한 얘기 계속할 거 아니지? 그보다 나..”

 

사샤가 귓가로 다가왔다. 나는 정신이 들면서 흠칫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녀가 나보다 키가 컸기에, 위에서 나를 짓누르며 압박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알잖아, 요즘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그녀를 팍 밀쳐냈다. 미칠 듯이 똑같은 시작이었다. 나는 뒷걸음쳤다.

 

네가 마약을 하든 말든, 나랑 전혀 상관없어. 내 앞 무대에만 서지 마.”

심술쟁이구나.”

 

머릿속으로 몇 초가 흘렀고 나는 그대로 데이나잇을 빠져나왔다. 사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우욱.....”

 

구토감. 어지러움. 수많은 생각들. 심장이 뛰었다. 처음 약에 손을 대었던 그 황홀하고도 비참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이 점점 세밀해질 때쯤 나는 다시 손가락이 닿는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붉고 까칠한 벽돌이 시야에 가득 찼고 나는 바닥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계속 쏟아냈다. 오늘 먹은 건 아침에 마신 커피, 파티장에서 조금 집어먹은 자잘한 음식들. 싸구려 샴페인. 그런데도 나올 게 이리 많을까.

 

 

둔탁하게 벽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행동을 멈추었다. 반대 방향으로 누군가 쓰러져있었다. 인적이 드문 길가에 나는 긴장되었지만 입을 소매로 닦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남자가 추레한 몰골로 쓰러져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시체를 만지는 게 아니길 바라며 그의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미약하게나마 술 냄새가 섞인 숨이 피어올랐다.

 

“!”

 

그리고 그 냄새. 사샤에게는 웬일인지 거의 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진득하게 풍겨오는 그 체취와 섞인 정체에 나는 잠시 혼미해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앉은 상태로 뒤로 넘어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악몽은 다시 날 예전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남자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는데도 나는 일부러 다시 그 냄새를 찾고 싶을 정도로 굴고 있었다.

 

바닥에 함께 떨어진 핸드폰을 본 나는 손을 떠는 채로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그 남자가 사라졌고 나는 걸었다. 들판 사이로 펼쳐진 캠핑카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때서야 시간을 확인했다. 가장 평범한 캠핑카를 찾아 익숙한 자전거를 찾아내고, 나는 다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애덤은 나를 보지 않았다. 시계는 자정에 가까웠다. 그는 종이 뭉치에 덮여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걸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할 얘기가 있어.”

 

그때, 애덤이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들을 치웠다.

4

 

 

애덤은 기로스를 좋아했다. 파트타임을 구한다고 공고를 보았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지원했다. 시에서 나오는지원금만으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고,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고 이시간대는 그리 바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애덤은 짜증이 밀려오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목격한 브라이턴 내의 마약 치료병원 리스트, 상담소. 그의 전 개인 상담사가 보내온 진단. 건조한 목소리로 앨런의 지난 나날들을 짧게 얘기하는. 그는 앨런인 줄 알고 말해버렸다. 뒤늦게 알아차린 그는 환자의 사생활을 더 말해줄 수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란. 제멋대로 나아가는 상상. 메일을 클릭하고 싶던 충동. 멋대로 단정지어 버린 어리석음.

 

이봐, 소스가 적잖아.”

 

게다가 낮부터 죽치고 앉아있는 손님들. 그중에서도 소스 타령하는 노숙자들이 있었다. 바다 옆 브라이턴은 어디를 가나 갈매기 떼가 넘쳤고 그들은 갈매기들과 자고 일어났다. 사실 입장을 금지하기엔 또 그들은 애매한 차림이었다. 애덤은 더구나 손님을 마음대로 쫓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마요네즈를 미친 듯이 짰다. 푹푹 떨어지는 되직한 마요네즈는 그들 옷에 튀고 말았지만, 전혀 신경 안 쓰는 기색이었다. 만족한 그는 기로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복도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애덤은 눈을 내리깐 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시선 끝에 다소 낡은 신발이 보였다. 무언가 익숙한…….

 

치키 리틀 멍키?”

 

맙소사. 애덤은 경악했다. 정작 그런 애칭을 붙여야 할 아기는 그녀의 손 밑에 있고, 자신을 향해 부르는 그 오래된 애칭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잡기 충분했다. 이내 애덤은 타냐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버렸다. 퇴근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녀를 잠시 참아줄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애덤은 아직 어렸고, 행동은 매우 불안했다. 타냐는 이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내 해맑았다. 잠시만, 애가 있다.

 

오랜만…….

몇 살이야.”

 

애덤은 타냐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타냐는 금세 우물쭈물했고 애덤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아직 어려.”

지금 그게 중요해 보여? 내가 장난하는 것 같지, 타냐?”

엄마한테!”

엄마?”

 

애덤은 피식 코웃음 쳤다.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거칠게 벗어 내려놓았다.

 

정말로?”

 

타냐는 유모차를 꽉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시퍼렇게 물든 안색은 그녀의 감정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기에 말 한마디 없었다. 몇 년 동안 보지 않은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자격이 없었다. 이내 타냐의 손을 잡고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애덤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애덤은 욕지거리를 참으며 처칠 스퀘어를 빠져나왔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고 때마침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누구-.”

안녕.”

 

이나? 너무 가까이 들린 목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린 애덤은 귀 옆으로 보이는 핑크색 머리카락에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나 봐.”

 

그녀는 와니무늬 원피스에 얇은 화이트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상반되도록 밝은 핑크색 머리는 밝은 햇살에 더욱 빛났다. 선글라스를 벗고 웃음 짓는 그녀는 주위 남자들이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아름다웠다.

 

왠일이야.”

 

애덤은 방금까지 끓어올랐던 화를 감추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내일 리암 생일이잖아. 그전에 아드리안 집에 가기로 했어. 가볍게 전야제 하기로. 시드랑 보니도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이나는 아무렇지 않게 애덤의 어깨를 잡으며 몸을 가까이했다. 더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서 애덤은 피식 웃었다.

 

뭐라고 말해야할까?”

 

이나는 웃음을 잃지 않고 애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심기를 충분히 건든 말인데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하는 말로 결정되는 거라면.”

 

이나는 손가락을 들어 애덤의 어깨를 꾹 눌렀다. 긴 손톱이 애덤의 상의로 파고들었다. 차분한 어조와 달리 느껴지는 압력은 생각보다 세서 구김이 남았다.

 

오늘 8, 애덤 멜링은 피어(pier)로 와.”

 

애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덤은 떨어질 기미가 없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며시 떼어낸 후 다시 웃어 보였다. 말 한마디 없는 거절, 부정이었다. 이나는 순순히 밀려나 팔짱을 꼈다. 몇 분전과는 달리 단단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요즘 바쁘네.”

 

이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했다. 애덤은 그녀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잠시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알면서 말하는구나.”

 

애덤은 포기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나는 그의 대답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왔다.

가볼게.”

 

그녀의 표정을 더 살필 여유가 없었다. 애덤은 몸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반대편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애덤! 이 자식 어디 가는 거야? 일 끝났냐?”

 

애덤의 등으로 뛰어든 아드리안은 짓궂게 웃었다. 그 뒤로 이나가 시드에게서 담배를 건네받았다.

 

애덤! 내일 내 생일이야. 잊지 않았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거리 한 가운데에, 애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드리안이 그의 목을 놓을 기미가 없자 애덤은 캑캑대며 소리쳤다.

 

리암, 알겠으니까 이거 놓으라고 해!”

 

애덤은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앨런과 만나기 전, 그의 하루는 온통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쁨도 잠시 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은 이전과 다른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빨리 돌아가야지. 얼른 그와 말하고 싶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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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왔다고요?”

 

애덤의 두 발은 바쁘게 데이나잇으로 향했다. 서둘러 왔는데 오히려 그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 대신 루크가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표정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애덤의 눈빛을 눈치챈 루크가 변명하듯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게. 애덤. 사실.. 아까 우리 퀸 중에 하나랑 먼저 왔었어.”

?”

 

말 끝나기 무섭게 사샤가 무대 뒤에서 등장했다. 샤샤는 또 누군가와 말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씩씩대며 그녀를 앞질러 가 사라졌다. 샤샤는 그런 바이올렛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한 쪽에 놓인 궐련을 들고 문을 열고 나갔다. 둘의 소리는 잠깐이었지만 상당히 커서 애덤조차 더 묻는 것을 잊고 그쪽을 쳐다보기 마련이었다.

 

처음 보는 퀸인데요.”

 

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둘, 과거에 대해선 입도 뻥끗 안 한 모양이군. 루크는 눈을 감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 앨런이 아까 쟤랑 먼저 왔었거든.”

왜요?”

 

애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남 연애사를 당사자 먼저 떠벌리는 취미는 없어. 근데 다만……

루크.”

 

루크는 괜히 딴 곳에 시선을 두고 말을 이어갔다. 이거야 원, 매니저라는 직함이 무색해지는 꼴이었다.

 

네가 있으니 당연히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만, 저 애 약을 해.”

 

애덤의 머릿속이 크게 흔들렸다. 애덤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진 샤샤의 발자취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루크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지만 애덤은 잘 들리지 않았다. 애덤은 루크를 뒤로 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앨런에게 바로 전화를 걸 작정이었다. 문을 연 그는 순간 멈춰 섰다.

 

샤샤가 벽돌벽에 등을 기댄 채 마지막 궐련을 태우고 있었다. 애덤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새하얀 여자. 입술은 무엇도 바르지 않은 채로 빨갛게 빛났다. 샤샤는 그에게 눈길 하나도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물었다.

 

루크랑 만나는 게 너야?”

 

샤샤는 눈꺼풀을 반쯤 닫힌 채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초면치고는 상당히 예의가 없었지만, 아까의 소동으로 추측건대 그녀의 행동은 근거가 있었다. 그래서 애덤도 똑같이 행동하기로 했다. 어린애 같지만, 그는 어린애가 맞으니까.

 

앨런 어디 있죠?”

 

샤샤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샤샤는 거의 새것과 같은 궐련을 미련 없이 바닥에 던진 뒤 애덤에게로 다가섰다. 애덤보다 훨씬 작은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뚫어버릴 듯 그를 쳐다보았다.

 

너야?”

 

물음이었지만 대답을 바라지 않은 확신이었다.

 

그래.. 어쩐지 냄새가 없었어. 그래도 너는, 절대 아닌데.”

그 사람 그딴 거 없이도 잘 살아.”

 

샤샤는 응? 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네가 그렇게 잘 알아? 하하하!”

 

샤샤는 애덤의 무반응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눈물까지 보였다.

 

내가 그런 애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크크큭. 그 애가 끊을 수 있을거라고?”

 

애덤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샤샤의 비웃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애덤은 뒤돌아섰다. 샤샤가 크게 소리쳤다.

 

애송아, 차라리 같이하고 말아! 하하하!”

 

나처럼! 애덤은 골목을 벗어났다. 그래도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굉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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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은 집에 돌아왔다. 앨런은 집에 없었고 조용했다.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때서야 작문 숙제가 떠올랐다. 내일은 리암의 생일이니 학교에 붙잡혀있을 수는 없었다. 애덤은 한숨을 쉬고 가방을 질질 끌고 침대로 가 앉았다.

 

미칠 것 같은 환상에 휩싸였다. 그 속은 어둡고도 축축한 괴물의 입속 같았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방 찬장. 타냐의 비밀 장소였다. 그쪽엔 먼지만이 가득한 걸 알면서 뒤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손 마디 사이에 먼지가 끼는 걸 느끼면서 그는 정신없이 그곳을 휘저었다. 티백 상자가 떨어지고, 오래된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 그의 무릎을 맞고 빗나간 향신료 통에 그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애덤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정신없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고 걸었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는 전혀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애덤은, 벌떡 일어나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애덤은 입을 막고 어느새 어두워진 밖을 마주했다. 그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침대로 돌아왔다. 시계는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방을 끌어와 모든 것을 침대 위로 쏟아부었다. 구겨진 종이 뭉치가 그의 눈썹을 찡그리게 했다. 다시, 종이 뭉치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 속에 글자가 숨어있는 것처럼 그는 하얗고 빈 종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펜을 들었다.

 

그때 앨런이 돌아왔다. 애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펜을 놀렸다. 갑자기 움직이지 않던 펜이 움직였다. 전혀 상관도 없는, 글자를 써 내려갔다. 앨런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할 얘기가 있어.”

 

애덤이 종이를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앨런을 비추고 있지만, 귀는 기울이지 않은 채였다.

 

고등학생 때.”

 

애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앨런에게 집중했다.

마약을 처음 했는데 사실 어떻게 하게 된 건지는 기억 안 나. 아마 친구 집에서 했던 파티였던 것 같아.”

 

앨런은 말을 멈추고 다시 이어나갔다. 그는 애덤을 잘 바라보지 못했다.

 

몇 명은 나랑 같은 길로 빠지고, 몇 명은 그냥 가끔 즐기는 애들로 돌아갔지. 나는 끊지 못했어.”

 

애덤은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다. 앨런은 떨고 있었다.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떠는 앨런의 어깨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는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둥근 어깨를 맞잡았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앨런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애덤과 눈을 맞췄다. 애덤은 울고 있었다. 애덤은 앨런을 감싸 안았다. 힘없이 끌려온 앨런의 몸은 그의 품에서 처지듯 쓰러졌다. 앨런은, 그의 품을 밀어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지금 매일매일에 감사하고 있어, 누가 이런 죽여주는 주드 로와 낮과 밤을 함께하지?”

 

그만해-”

 

애덤은 눈물을 훔치고 앨런의 이마를 꾹 찍어 눌렀다. 장난기 섞인 손짓에 앨런이 두 다리를 애덤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애덤은 그걸 한 손에 감싸 안고 다시 앨런을 품 안으로 가져왔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그만 소음 끝에 앨런이 갑자기 애덤의 뒷통수를 한 손으로 쥐었다. 애덤도 갑자기 들이 밀어진 그의 얼굴에 웃음을 참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파트 타임, 계속할 거야?”

뭐야, 애덤의 아이홀이 깊게 파이면서 곡선을 그렸다.

 

축제 전까지만 할게.”

축제 같이 가.”

 

그거야 뭐, 애덤은 어깨를 으쓱하며 앨런을 살짝 밀었다. 앨런은 침대에 완전히 누워 발버둥 쳤으나 애덤의 저지로 막히고 말았다.

 

모임은, 다시 가는 거지?”

 

앨런은 잠시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대답했다.


그래.”

 

애덤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누웠다.

 

사실 내일 친구 녀석 생일이야. 이름은 리암인데.. 널서리도 같이 다녔었고…….

 

 

우리는 다시 행복하게 잠들 거야. 그렇겠지. 사랑. 그렇다고 얘기하자.

 

 

5

 

 

잠이 쏟아졌다. 어제 이불을 덮고 잠은 들지 않은 채 두런두런 말을 계속해나갔었다애덤은 먼저 일어나 샤워 중이었고 앨런은 스며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그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앨런은 팔만 쭉 뻗어 핸드폰을 낚아챘다. 간신히 한 눈을 뜨고 수신자를 확인했다앨런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위를 확인했다. 세찬 물줄기 소리는 아직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앨런? 나다. 해리스.”

 

  정작 혼자 듣지 못했던 해리스 선생의 목소리였다. 그는 전에 살던 곳에서 앨런의 상담을 맡았었다어쩌면 레베카보다 일의 내막을 다 알고 있는 한 사람결국 약에 손댄 채 도망치듯 브라이턴으로 온 그는 해리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퍽 어색했다.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거에요. 엄마랑은..”

  “요새 만나는 사람이 있다던데.”

 

  레베카! 해리스가 워낙 빙빙 돌리는 것 없이 물어오는 게 그의 방식이긴 했지만, 앨런은 저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속으로 탄식했다.

 

  “어머니를 탓하지 마라.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른 거야.”

 

  앨런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감았던 눈을 뜨고 그는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를 우릴 생각이었다. 해리스는 답지 않게 잠시 침묵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앨런이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는 찰나 해리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중도에 가버린 건 들었다. 오늘은 각자 파트너나 가족과 함께 상담을 받아보는 날이야네가 모임이 거리껴진다면.. 네 파트너를 데리고 가도 좋아.”

 

  애덤을 데리고 간다고? 그 속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내가 중독자인 것을 읊는 것. 애덤이 그것을 듣는 것전이었다면 이보다 더 최악은 없었을 테지만..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애덤과 함께 그곳에 걸어 들어간다면바보 같은 상담 과정 속에 애덤이 차라리 어이없어하거나 자신과 동감해준다면. 그것은 무슨 느낌일지그의 머릿속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그의 대답을 들은 해리스는 별다른 말없이 안부를 전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앨런은 먼저 끊긴 알림음 소리에 잠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랑 통화했어?”

 

  애덤이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한 채 문을 열었다. 앨런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속으로 삼킨 채 둘러댔다.

 

  “, 루크. 어제 데이나잇 안 갔거든.”

 

  그 소리를 들은 애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표정을 푼 애덤은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래? 요즘 퍼레이드 준비 때문에 바쁘지 않아?”

 

  퍼레이드. 그래 샤샤가 항상 중심에 서서 화려한 외양을 뽐냈었지. 잠시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다. 앨런은 애덤이 어제 데이나잇에 다녀간 것을 꿈에도 모른 채, 티백을 꺼내 뜨거운 물에 담갔다.

 

  “오늘 나 늦을 텐데, 먼저 기다리지 말고 자.”

 

  , 오늘. 그러고 보니 애덤에게 상담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앨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애덤을 불렀다.

 

  “애덤, 나도 사실 오늘 일정이 있는데.”

  “? 모임 말하는 거야?”

 

  애덤은 젖은 머리를 털며 옷을 꿰어 입었다.

 

  “사실 내일 파트너나 가족과 함께 집단상담을 진행할 거야. 와줄 수 있어?”

 

  앨런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을 떨고 있었다. 자신의 비밀을 낱낱이 보여주는 자리에 연인을 초대한다는 것. 그건 이제까지 커밍아웃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던 앨런에게는 또 다른 도전임을 의미했다애덤은 잠시 멈칫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도, 무엇 하나 다를 것 없는 환상을 깨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

 

  “.”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앨런은 다시 불안해졌다. 짧게 넘어간 어젯밤은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어딘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당연하지. 가보도록 할게.”

 

  그러나 애덤은 환하게 웃으며 앨런을 감싸 안았다. 딱딱히 굳은 어깨가 서서히 풀어지듯 둥그렇게 품 안에 들어왔다앨런이 애덤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였다.

 

  “정말이야? 다행히 시간은 파트너들 스케줄 때문에 좀 늦어. . 친구 생일인데 괜찮을까?”

  

  앨런은 문득 어제 애덤이 언급한 친구의 생일파티를 꺼냈다.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애덤이 굳이 뭘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나는 계속 조심하고 있었다. 내 촘촘한 살갗을 가리던 옷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아프게 느껴지던 흔적을이미 나는 지고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앨런?”

 

  고개를 퍼뜩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애덤은 어느새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바보 같은 생각.

 

  “미안, 사실 좀 졸려서. 뭐라고 했어..?”

  “갈 수는 있는데 좀 늦을지도 몰라.. 이런, 주인공이 마지막에 등장해주겠군.”

 

  금방 표정이 바뀐 앨런이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틈새 없이 서로를 성실히 껴안은 둘은 바깥의 갈매기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덤은 뒤늦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작문 숙제가 떠오른 것이다젠장, 젠장, 젠장. 앤토니아 선생은 뱉은 말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큰일 났다. 정말. 오늘은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학교를 다니는 돌아다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애덤은 작문을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덤 멜링.”

 

  제출할 종이조차 없었다. 그가 낙서처럼 끄적거린 종이 뭉치는 어젯밤 침대 모서리 끝으로 추락하고 말았으니까앤토니아는 애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수업을 시작했다. 그를 놀리는 친구들의 손길마저 뿌리칠 힘이 없어 애덤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올 수는 있는 거야?”

 

  이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애덤이 무기력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나는 에이플러스가 적힌 자신의 과제를 들며 웃어 보였다.

 

  “안 가면 리암이 날 가만둘 것 같아?”

 

  힘없이 웃어보이는 애덤의 말에 이나는 살짝 놀란 듯 장난을 멈추었다

 

  “너도 참 이상하다. 방학 동안 숙제였는데 이걸 어떻게 한 자도 안 쓸 수가 있어?”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앤토니아는 둘에게 주의를 준 뒤 수업을 이어나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덤.”

 

  수업 중간에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잠시 학교에서 사라질 계획이었지만 앤토니아는 몇십 일을 기다렸고 더 기다려 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도서관에도 화장실이 있단다.”

 

  리암의 표정이 구려진 것을 발견한 애덤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리암에게는 고작 생일파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처음 새아버지의 집에서 치르는 생일파티는 그를 배려해 온전히 친구들만으로 구성되었다리암은 씨마이너스가 적힌 종이를 보란 듯이 구겼다. 애덤은 그를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주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앤토니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애덤은 시간을 생각하며 펜을 굴릴 뿐이었다.

 

  “유치한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엄마의 날은 이미 지났는데 말이에요.”

 

  애덤은 그녀를 흘낏 쳐다보더니 고개를 다시 책상으로 처박았다.

 

  “글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유치하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적어도 좋아.”

 

  백발에 가까운 금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안경을 올린 뒤 팔짱을 꼈다학기 초라 도서관은 조용했고 색색의 의자들이 침침한 분위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애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새 종이에 이름을 써내려 갔다. 시계침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애덤은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애덤.”

  “화장실 있다고 하셨죠?”

 

  애덤은 그녀의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어딘가 모르게 축축이 가라앉은 화장실의 불을 켜고 그는 들어갔다좁은 창만이 햇빛을 통과시켜주고 있었다. 애덤은 한숨을 내쉰 채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애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애덤은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둘러다보았다그전에 바라  보고 있었던 창문에서 무언가 삐져나와 있었다

 

  “애덤, 나야.”

 

  이나의 목소리였다. 그 뒤로 조그맣게 웅성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거 얼른 앤토니아한테 내고 와. 내가 대충 너 글씨 따라 해서 썼어. 리암이 하도 네가 빠지면 안 된다 잖아?”

  ! 리암이 소리를 지른 뒤 자신의 입을 헉하고 막았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리암 너야?”

  “웃기지도 않는 짓 그만하고 얼른 내고 와. 이깟 작문이 뭐라고 그렇게 쩔쩔매고 있는 거야?”

 

  애덤은 잠시 망설였다. 어쨌거나 남의 손을 빌려서 내는 과제는 평소 그에게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성적에 욕심을 내는 것을 떠나서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에 애덤은 종이를 받아들었다.

 

  “고맙다. 차 빼고 있어.”

 

  화장실을 서둘러 빠져나온 그는 도서관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앤토니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안을 계속 들여보다 그녀가 야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차라리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보였다그는 조심스럽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앤토니아의 가방 앞에 종이를 두었다혹시라도 그녀가 볼 새라 애덤은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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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런은 애덤이 학교에 간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모임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는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그를 깨웠다. 그는 액정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레베카에게 전화를 걸었다레베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조한 말투로 여보세요라고 대답했다.

 

  “저예요.”

  “앨런.”

 

  전날의 소동 이후 약간 가라앉은 모자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앨런은 침을 삼키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엄마, 해리스 선생님과 통화했어요.”

 

  레베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레베카는, 차를 마시고 있는 듯 차 한 모금을 들이킨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애덤을 데리고 갈 계획이니?”

  “?”

 

  애덤을 데리고 가라고 해리스에게 말한 게 아닌가? 앨런은 의아해졌다. 레베카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강경해졌다.

 

  “앨런, 다시 생각해라. 너는 보호자가 필요해. 지금..”

  “엄마!”

 

  참지 못한 앨런이 소리쳤다. 황당함. 분노. 뜬금없이 닥쳐온 감정이 빠르게 얼룩졌다. 앨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아무 흔들림 없이 그의 말은 핸드폰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그걸 왜 엄마가 정해요. 엄마가 내 인생에 끼어들 수 있었던 골든 타임은 지난 지 오래에요.. 그리고 그건..”

 

  앨런은 처음으로 숨을 들이켰다. 목이 메왔다. 이미 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앨런은 결국 말을 내뱉어버렸다.

 

  “엄마였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앨런.”

  “엄마를 다시 보는 게 아니었어요.”

 

앨런은 전화를 끊었다. 앨런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지만, 소매로 눈을 거칠게 닦아냈다. 절대 오늘은 나올 일 없는 것이었다앨런은 쾅쾅 걸으며 안방으로 가 블랙 백팩을 챙겼다. 문이 쾅 닫혔다. 버스 정류장은 한산했다. 그는 노을이 내려앉은 언덕 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울 수 있었다면 마음속이 좀 깨끗해졌을 텐데앨런은 그것도 잘할 수 없었다쉐그렌 증후군처럼 그는 이상하게 영화나 어떠한 매개체 없이는 눈물을 흘리기가 참 힘들었다

 

  마약 부작용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이러한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었다하지만 의외로 눈물이 많은 애덤을 보면서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

 

  앨런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 핸드폰 화면이 누군가의 번호가 찍혀 바뀌었다. 뭐지앨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앨런 매버릭 씨?”

  “?”

 

  누구지? 그는 다시 한번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

 

  “맞군요.”

 

  누군가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혹시나 해서.”

 

  코너였다. 앨런은 잠시 이 남자가 누군지 생각에 잠길 뻔했다. 베스의 아들. 루크의 친구? 어쨌든 자신과 그리 좋게 얽히지 않은 남자.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이게 무슨 질문이지? 나는 여기 14년 살았어요. 당신이 이 동네에 나타난 것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앨런은 참 만만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헤드폰을 귀에 끼었다

 

  “400파운드.”

 

  뜬금없이 나온 돈의 액수에 앨런이 헤드폰을 낀 채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날 깬 샴페인의 병 개수.”

 

  앨런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웃기지 마요. 그거 그냥 테스코 샴페인이라고 베스가..”

  “그 잔이 얼마였는지 더해볼까요?”

 

  맙소사. 싸구려 샴페인으로 준비한 홈파티인 줄 알았더니 잔은 또 비싼 거였다고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어요. 그 양반은 또 그런 자리는 구별해서 오거든.”

 

  가볍게 몰래 즐기러 간 파티가 그 정도였다고? 그는 잠시 베스를 탓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그녀의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루크한테도 빚이 있다던데.”

 

  코너는 이제 완전히 헤드폰을 빼고 입을 벌리고 있는 앨런을 내려다보았다앨런은 완전히 질린다는 듯 코너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위축된 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6

 

 

알겠어요. 지금 400파운드가 없으니까 나중에 드리죠. 저 지금 바쁘거든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수중에 400파운드는 당장 나올 구석도 없었다. 앨런이 돈을 모으기 시작한 때에는 얼마 안 됐고, 400파운드를 당장 이체를 시켜준다 해도 그건 이렇게 홀연히 사라질 수 없었다하지만 코너는 그 일로 분명히 커리어에 손상이 갔겠지.

 

 “루크 집에서 카우치 서핑했던 것도 들었고요.”

 

  , 이런. 루크가 이렇게 입이 쌌나? 앨런은 급격히 밀려오는 짜증에 눈앞에 보이는 코너를 당장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럼 내가 당장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알겠네요. 혹시 자존심 건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면 그만해도 좋아요. 이미 충분히 감정이 안 좋거든요.”

  “당신 파트너가 디나이얼이란 소리?”

 

  코너는 확실히 재주가 있었다. 상대에게 듣기 싫은 말을 꾸역꾸역 꺼내서 고막에 눌려주는그나마 다행히 앨런에게는 지금 백 퍼센트의 타격으로 다가오기엔 미미해졌으므로 골목길에서 주먹다짐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소리를 해서 미안해요. 그땐 당신이 아직 중독자인 줄 알았어.”

 

  무슨 소리지? 앨런은 열 받는 표정을 애써 참고 코너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여자와 있었잖아.”

 

  앨런은 이제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코너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 좀 그만둘 수 없어요? 나도 딱히 엄마란 말에 애착은 없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베스가 내 생물학적 어머니보다 이해를 더 잘해주거든요.”

 

  이번에는 코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한숨을 쉰 그는 차키를 꺼내 왼편으로 버튼을 눌렀다.

 

  “당신이 400파운드 온전히 갚고 싶지 않다면, 그 여자한테 가서 말해요.”

  

  앨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코너와 눈을 마주쳤다.

 

  “베스한테 간다고요?”

 

  코너는 말없이 자신의 차로 다가가더니 차 문을 벌컥 열었다.

 

  “마지막 경고에요.”

 

  앨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코너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앨런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었다앨런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코너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고 그의 차는 미끄럽게 동네를 빠져나갔다. 한적한 동네는 새소리가 지나쳐갔고 앨런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매일 버스와 자전거를 애덤과 함께 타던 그라 누군가의 자가용이 퍽 어색했다

 

  “베스가 왜 약을 끊었는지는 알아요?”

 

  앨런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깔리는 노을은 하늘에 점점 더 번지고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걸 모른다면, 그 여자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할거고?”

 

  코너가 잠시 차를 세웠다. 프레스턴 파크였다. 사람이 별로 없는 길가에 차를 세운 그는 힘없이 핸들을 쥐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뭐가 달라진다고?”

  “400파운드만큼 손해에요?”

  “이봐, 매버릭 씨. 난 이미 안다고 말했어.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코너는 언성을 점점 높여갔다. 앨런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글쎄요. 1000파운드는 되야 알겠는데.”

 

  곧 사라질 햇빛이 그들의 사이를 통과했다. 햇빛은 둘의 얼굴로 거칠게 번져나갔다. 두 눈은 온전히 떠 있었고 서로의 눈빛도 피하지 않았다앨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좀 전에 있었던 레베카의 음성이 그의 속에서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까닭이었다그는 울지 않았기에 더 답답해지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앨런은 눈을 억세게 감았다. 몸이 떨렸고 코너가 그것을 눈치채고 조금 당황했다.

 

  “마지막이라면서요.”

 

  코너는 떨리는 앨런을 바라보다가 눈빛을 피했다. 그는 한숨을 후 쉬었다. 앨런은 그의 표정, 몸짓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코너는 말없이 다시 운전했다. 앨런은 갑자기 출발한 차에 어깨를 시트에 부딪혔다. 무언가 말하려 했던 앨런은 이내 입을 닫았다. 차는 자신이 아는 곳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앨런의 표정은 확고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건지 그도 바로 알 겨를이 없었다. 잘 모르는 같은 처지의 여자, 감정이 좋지 않고 신세를 진 아이리시 남자

 

  두 모자는 그의 신경을 자꾸만 거슬리게 했다무언가가 간절해지듯 속이 답답해져 왔지만, 그는 꾹 누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코너도 똑같이 앞만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의 눈빛을 마주 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고 커브를 돌려 도로를 빠져나갔다익숙하게 신호를 기다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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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은 차에서 내렸다. 먼저 출발한 친구들이 이미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뒤였기에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은 터였다

 

  “애덤! 여기.”

 

  이나가 잔 하나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았지만, 애덤의 표정은 미묘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이나에게 아무 일도 빚지지 않고, 엮일 일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큰일로 그녀에게 짐을 안겨버린 탓이었다. 이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듯 작게 웃음치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리암 선물은 끝장나게 준비해야 할걸. 나도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학생은 아니거든.”

  “. 전혀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잘못하면 너한테도 피해가 갈 거야. 이나.”

  “. 다음 달 학교 대표 차기 후보가 있다면 당연히 불이익이 있겠지.”

 

  이나는 학생회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우수한 성적, 작문 시험에서 한 번도 에이플러스를 놓치지 않는 그녀는 다음 달 있을 학교 대항전 대표까지 노리고 있었다그런 그녀와 애덤은 과거에 서로에게 나름 아깝지 않은 한 쌍이었다

 

  “건배할까?”

 

  이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핑크색 머리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녀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애덤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이나는 즉시 잔을 비워냈지만, 애덤은 잔을 들고 멍하게 서 있었다이나는 빈 잔을 들고 애덤과 눈을 마주쳤다. 이나의 입꼬리가 심술궂게 올라갔다. 이나는 잔을 아무렇게나 올려 두고 애덤의 글라스 잔을 함께 맞잡았다애덤은 정신이 차려진 듯 자신의 손을 감싼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때, 이나의 목소리가 애덤의 귓가를 강하게 울렸다.

 

  “그 사람도 알아? 모르겠지.”

 

  애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둘에게 흐르는 크고 시끄러운 음악 대신 애덤의 심장 소리가 더 큰 것처럼. 애덤은 자신도 모르게 잔을 더 강하게 쥐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해? 그 사람은  알 필요 없으니까 그만해.”

  “그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잖아!”

 

  이나는 몰라보게 흥분했다. 이나는 글라스에 손을 떼었다. 확 하고 내쳐진 팔은 그녀를 뒷걸음치게 했다애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빠졌다. 쨍그랑하고 울린 소리는 주위 친구들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이나도 살짝 놀란 듯 그와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그만해, 아니야.”

 

  애덤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친구들을 지나쳐 빠져나간 그는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에 멈춰 섰다따로 마련된 펀치 주스가 담긴 플라스틱 통이었다. 애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빈 병이 된 포도주병들. 아니면 샴페인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에 선 애덤은 펀치 주스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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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너가 도착한 곳은 어제 오후의 그 장소였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베스는 눈에 익은 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몸을 숨겼다그녀 옆에서 피어오르는 궐련 연기가 아이러니했다. 베스는 우물쭈물하지 못하다가 실내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빚쟁이 아들을 달고 왔는데 당연히 피하겠죠?” 

 

  둘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동그랗게 앉은 사람들 사이로 베스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베스는 목이 무언가 막힌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털로우는 각각 파트너를 데려온 것을 확인하고 박수를 한 번 짝 치는 것으로 시작을 암시했다.

 

  “파트너들 먼저 소개해볼까요?”

 

  앨런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코너는 그걸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자리 바꿔요.”

  “괜찮아요. 늦는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앨런의 눈은 말과 다르게 불안한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털로우가 앨런을 흘낏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코너에게 손짓했다.

 

  “코너 로이드 휴즈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파트너에요. 오해는 하지 마시고, 가족입니다.”

 

  코너는 한쪽 손으로 베스를 가리켰다. 베스의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일그러졌다. 눈매가 깊게 파였다. , 그녀는 울 듯 말 듯 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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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명 한 명의 소개가 끝났는데 벌써 30분이 흘러있었다. 앨런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그는 핸드폰을 켰지만 아무 버튼도 누르지 못했다. 그의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지포 라이터 소리가 들렸고 연기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사실 오늘 일정이 있는데 규모가 작아서 올 수 있었어요.”

 

  코너는 몇 번 연기를 내뿜고 그대로 필터를 땅에 내버렸다. 앨런은 잠시 황당하게 코너를 쳐다보았다. 코너는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집에 한 번 들려야 하거든. 냄새가 나면 거물들은 별 걸로 다 쳐내니까.”

  “허세가 있어야 하나보죠?”

  “하하. 그냥 고등학생 생일 파티인데 나름 소란스럽게 준비하게 하더라고.”

 

  앨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코너에게 소리쳤다.

 

  “설마 왈데그레이브 로드?”

  “.”

 

  코너는 흥미없는 표정으로 앨런에게 동조했다. 그리고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안 들려야겠군.”

  “?”

  “당신 파트너가 97번지에서 약에 찌들어있을지도? 그 집 부모는 오늘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코너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엄청 보수적인 부모였어요. 걱정 마요.”

 

  앨런은 계속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보통 그런 부모밑에서 애들이 미쳐버리고 약 빨곤 하지만.“

 

  앨런이 참지 못하고 코너의 옆구리를 퍽 쳤다. 장난스럽게 억 하고 막아낸 코너는 막은 한 손 대신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기 전에 빨리 데리러 다녀오던가요. 오늘 아니면 이런 기회는 잘 없을걸.”

 

  코너는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건네주었다. 앨런은 동공이 커졌다그는 자신에게 뻗은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침을 한 번 삼키고 차키를 쥐었다. 그는 체육관 앞에 주차된 차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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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저기. 친구 만나러 왔는데. 애덤. 이라고.”

 

  문을 열어준 이들은 누가 봐도 집주인이 아닌 것 같았다갖가지의 무리가 섞여 노래와 말소리에 취해 몸을 흔들어대기도 했고, 앨런의 물음에도 벌써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들은 의심없이 자신보다 작고 나이에 비해 어린 인상인 앨런을 번갈아 보다가 술병을 든 채 대답했다

 

  “글쎄. 걔 로우랑 있는 거 아니냐?”

 

  머리가 구불거리는 흑인 소년은 다 들으란 듯 외쳤다. 다른 이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곳곳으로 굉음이 들리며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자 음악 소리는 더 커졌다.

 

  “로우? 오늘 생일 주인공은 리암이라고 들었는데..”

  “아니. 걘 남자고. 이나 로우!”

 

  다시 웃음소리가 퍼졌고 다른 남자가 빈 병을 탈탈 털며 앨런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나 봤거든. 걔네 둘이 테라스로 사라지는 거! 하하하.”

 

  앨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너무도 확고한 이름과 인상에 눈을 떨었다. 앨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2층으로 둘만 올라가지 않았어? 너만 못 봤냐?”

 

  앨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확 쳐들었다. 아무것도 보일 리 없는데, 두 남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2층 테라스 밖으로 이어진 철제계단에 화려한 머리색이 달빛 아래 반짝였다. 앨런을 등진 남자는 그녀를 감싸 안고 턱을 맞잡았다

 

  앨런은 숨을 멈추었다.

 

  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행위에 열중했다. 이나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위험하리만큼 허리를 계단에 기댄 그녀는 남자를 옆으로 돌려세웠다. 둘의 얼굴이 더욱 명확하게, 앨런의 시야로 들어왔다.

 

  앨런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술 취한 무리를 다시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닫힌 문을 뒤로하고 그는 차로 다시 걸어갔다. 조용히 시동을 건 그는 시끄러운 길가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시동을 건 순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나고 시작될수록 모르는 노래가 계속해서 시작되었다. 그 순간 딱 하나 아는 노래가 들렸다그는 떨리는 손을 멈추었다. 더 스코어의 업. 앨런은 여전히 마른 눈가를 훔쳤다무섭도록 원망스러워졌다. 무엇이? 그는 입술을 짓누르듯 깨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몇 개의 가로등을 지났다

 

  그의 차는 몇 분 뒤 멈춰 섰고 헤드라이트만 켠 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빵하고 울렸다소리는 주민들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소음이었지만 앨런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소음이 몇 번 이어지자 맞은편 집의 창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창문을 열고 밖을 들여다본 이는 바깥의 광경에 꽤 놀란 모습이었다

 

  이내 창을 닫고 몇 분 뒤 밖으로 뛰쳐나온 이는 앨런을 향해 다가갔다. 앨런의 귓가에 말소리가 들렸다. 앨런은 힘없이 일어나 차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앨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신의 품으로 기대었다. 앨런은 텅 빈 눈동자로 걸음만 휘청휘청 옮겼다

 

  낯선 집. 문은 열렸고 그들은 들어섰다. 곧 문이 닫혔다

 

  조용한 밤을 둔탁한 소리가 깨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