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등록일
- 2020-07-10
- 작성자
- 국어국문학과
- 조회수
- 958
-1편-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는 사람들. 하지만 건너지 않고 그 앞에서 내게 서두르라는 듯 손짓하는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 익숙한 듯 내 몸은 그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고, 흔들던 그녀의 오른손을 꼭 잡고 깜빡거리는 신호등에 등을 밀려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인사도 못 건넸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가벼운 눈웃음이 오늘의 시작을 알려주는 듯 했다. 얼마 남지 않는 신호등의 시간. 다른 이들 보다 뒤늦게 출발해 다급하게 건너야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 횡단보도를 전세 낸 것처럼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기시감이 가득한 풍경. 익숙함에 나른해져 무거워진 공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끼익 하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듯한 두려움으로 몸이 굳은 듯 했지만 마치 녹화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기다림 없이 진행되어갔다. 나는 빨갛게 물든 원피스의 소녀를 끌어않고 울부짖고 있었고, 주변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자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멀어져만 갔다. 주변은 어둠으로 뒤덮여갔고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
-띵디링~ 띵디링~ 띵디링~-
“흐으아앗!!”
한 소년이 이불을 박차며 몸을 직각으로 일으켜 세웠고, 커튼 사이로 내리 꽂는 듯한 햇빛은 그의 눈을 강렬하게 찌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맡에 있던 단말기의 알람을 끄고 흐릿한 초점을 맞추며 현재의 시간을 확인하였다. 번데기 같던 그의 미간은 희번뜩 하는 그의 눈동자와 함께 넓게 팽창되었다.
“크. 큰일 났다..! 오늘 지각하면 방과 후 보충수업... 그것만은 안돼!”
소년의 이름은 ‘허진태’. 진태는 자신의 명찰이 붙어있는 교복을 서둘러 챙겨 입고서 책상에 널부러져 있는 공책과 과자봉지들의 틈 사이를 뒤적이며 그의 사진과 바코드가 표기된 학생증으로 보이는 카드를 챙겨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학교가 단번에 시아에 들어왔다. 아무리 학교와의 거리가 가깝고 통학하는 학생들에 비해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기숙사라 해도 불과 남은 시간은 4분. 지하철 개찰구와도 같이 생긴 교내의 입구. 진태는 책상에서 발굴해낸 학생증을 갖다 대니 삑 소리와 함께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 구겨진 셔츠, 지퍼가 반은 열린 가방을 걸치고 필사적으로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보기에는 깨끗하지만 냄새만큼은 커버가 되지 않는 교내의 화장실. 운이 좋게 아침조회에 늦지 않은 진태는 1교시 시작 전까지의 20분가량의 시간을 틈타 세안을 하고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마땅히 얼굴의 물기를 닦을 것이 없어 손을 털어 물기를 제거하려던 순간 시간 확인을 위해 세면대 옆에 올려놨던 단말기를 쳐버려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아이 이런... 내 것은 튼튼하니까 문제없겠지?...”
단말기를 집어 들었으나 바닥에 있던 물기와 손에 있던 물기로 인해서 단말기는 심하게 얼룩이 져있었다. 진태는 결국 물기를 제거하기 위해 교복바지의 허벅지에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다. 단말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하기위해 액정에 화면을 띄우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고장난 건가... 학교에서 지급해준 거라 교체는 어렵지 않겠다만... 응?”
마치 고장난 듯이 화면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중간 중간에는 알파벳과 한글도 몇 글자씩 섞여 이었다. 숫자는 아무런 규칙이 없이 나열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을 읽자니 마냥 낯설지 만은 않았다. 마치 주민등록번호의 앞자리 번호처럼 무언가의 날짜를 표기한 것 같기도 하였고, 어느 시간을 표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무 큰 단위의 숫자의 나열은 아니지만, 그 후에는 60 미만의 숫자가 나열되는 패턴이 보였다.
하지만 숫자보다도 눈에 밟히는 것은 숫자들 사이에 껴있는 한 글자 한 글자와 알파벳들 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투...? 누운... 백... 만..나...?”
무언가에 꽂히면 무아지경이 되어버리는 진태는 끊임없이 생각하는 듯 한 얼굴로 눈동자가 이마 쪽을 향한 채 화장실을 나와 교실 쪽으로 향했다, 그때
-퍽
“으앗..!”
“야 몇 번을 부르냐!”
진태의 뒤에서 옆구리를 가격한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여제희’. 진태의 하나뿐인 이성 친구이자 친구이다.
“..... 제... 제희야..!!”
“무, 뭐야.. 왜 또 그래;; 야 손 치워..!”
조금 전 깊은 생각에 빠진 지적인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제희의 손과 어깨 그리고 얼굴을 만지려 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움직임만은 익숙한 듯 요리조리 그의 손길을 모두 피해낸다.
“제희야... 나 오늘 정말 뭐 같은 악모..”
“또 같은 꿈을 꿨다고?? 하... 거기서 또 내가 죽었다고? 참 여러 번 날 죽이는 구나”
“으응으응.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히 오싹하자나... 혹시라도...”
“아 됐고! 오늘 방과 후 일정 기억하지? 오늘도 늦으면... 응? 너 단말기가 왜 그래? 이리줘봐.”
진태는 화면에 이상한 숫자와 문자로 가득한 단말기를 등 뒤로 숨기면서 그녀의 주의를 돌리려는 듯이 보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물이 있는 바닥에 떨어트려서 잠시 오류가 생겼나봐.. 히히... 한 번 리셋하면 멀쩡해질 걸?...”
가볍게 넘기려는 진태와 달리 제희의 앙칼진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그녀의 눈빛이 순간 너무나도 날카롭게 보였으며, 어투 또한 바뀌었다.
“... 어쨌든 오늘은 늦으면 안돼. 또 저번...... 늦을 것 같으면 미리 말하고.”
“앗. 응... 오늘은 지각해서 방과 후에 잠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미안!”
두 손을 모아 사과하는 진태와 달리 제희의 분위기와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이에 둔한 진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어떻게든 승화시켜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 그러면 30분 정도 연기하자 됐지?”
“고, 고마워!”
제희는 매섭게 몸을 틀어 자신의 교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진태는 멀어져가는 제희의 뒷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 사실 오늘 지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해버렸어... 그녀를 속여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진태는 등 쪽에 숨겼던 단말기를 다시 꺼내들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알 수 없는 패턴들을 주시하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지나도 진태의 패턴에 대한 집념은 멈추지 않았다. 도무지 진전이 없자 진태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내와 가까운 학교여서 인지. 백화점과 높은 빌딩, 공원 그리고 인파가 많은 시내의 상징인 X자 횡단보도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빌딩의 간판을 보고 힌트가 되었는지 그의 심박 수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투 다이.. 투데이, 오늘... R의 뒤에서 오후에 co 라... 이건...!”
진태가 내린 패턴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2510210816 그것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오늘16:23 R사 빌딩의 지하주차장 뒷문과 연결되는 골목으로 와라’
화면 속 모든 숫자의 패턴을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만은 확신했다. 위와 같은 메시지는 확실히 존재했고, 가장 앞에 있는 숫자는 바로 오늘 그가 악몽에서 깨어난 날짜와 시간의 나열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늘 미간을 찌푸리며 봤던 단말기의 시간과 정확히 일치한 숫자가 그에게 확신을 안겨주었다. 반면에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에 진태는 두려움 또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가 확신을 갖자 오늘 하루 바탕화면처럼 계속 비춰지던 알 수 없는 패턴은 서서히 사라지더니 단말기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수많은 인파의 발소리. 신호에 걸려 멈춰 있는 차량들의 엔진소리와 경적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내의 한복판. 하지만 진태가 향하는 곳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장소에 올 일도, 이런 장소가 있는 줄도 몰랐을 곳. 햇빛도 들지 않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골목. 왠지 모를 퀘퀘한 냄새와 습기까지. 골목의 저만치에는 어렴풋이 시내의 거리가 보였다. 걱정 반 의심 반으로 이곳으로 온 진태는 분위기 탓에 긴장감은 더욱 고조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주차장 뒷문이 보이는 10미터 지점에서 걸음을 멈춰 섰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그럼 그렇지... 그냥 오류 창 가지고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였나... 이렇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곤란하니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진태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건 뭐지...?”
자신이 왔던 길에 무언가 자물쇠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붉은색의 홀로그램 같은 것이 나타나 있더니 그곳으로 향하려 하자 밀릴 듯 말 듯 한 투명한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마치 투명 벽에서 마임쇼를 하는 것만 같은 관경. 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땀이 나기 시작한 진태. 그렇게 10초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의 뒤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황한 진태가 뒤를 돌아보자 2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도 할 수 없을 만큼 후드모자를 눌러쓴 사람 한명이 서있었다.
“이거... 그쪽이 한 짓이야!?”
두려움과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질문. 그러자 푹 숙이고 있던 후드모자의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가뜩이나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골목 탓에 후드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었음에도 그 후드의 안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그림자로 가득했다. 말 그대로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무슨 수작이야!... 내 단말기에 보낸 코드 메시지도 보낸 것도 그쪽이 한 짓이지!?”
“...시간이 많지 않아...”
변조된 기계의 목소리. 얼굴이 보이지 않아 후드의 말하는 입모양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그가 내뱉은 말은 마치 직접 몸에 꽂히듯 전신에 울려 퍼졌고, 그로인해 두려움을 증폭시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위화감을 느낀 진태는 무언가 호신용으로 삼을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고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한 순간 그의 시아에 후드 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방심하기도 잠시 등 뒤에서 오한이 느껴져 돌아보려던 순간.
“끄앗...! 무. 무슨 짓을...”
주사? 전기 충격기? 후드 녀석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진태의 목덜미를 가격하였다. 곧바로 진태가 쓰러지려는 듯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자 후드 녀석은 곧바로 진태를 부축해 천천히 바닥에 앉혀 건물 외벽에 등을 댈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기시감은 이전의 경험. 일이 잘 풀린다면 의심부터 해라. 나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잖아. 다음에는......”
정신을 잃어가는 진태. 그렇게 시아도 흐릿해져 갈 무렵 후드의 기계음은 또다시 온몸을 통해 전해졌지만 마지막 한 마디 만큼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진태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가장먼저 단말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였다.
“으으읏. 망했다... 아니야 그래도 3분 정도 늦은 건 커피한잔 사들고 가면 용서해주겠지?”
자신이 왜 골목에서 졸고 있었는지도 잊은 듯이 보이는 진태는 그렇게 인기척이 느껴지는 골목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달하자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이었다. 여기저기 충돌되어 있는 차량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의 모습. 그리고 하늘은 마치 깨져버린 스테인드글라스 파편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구 종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진태는 그대로 몸과 생각이 멈춰 버려 넋을 놓고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거대한 파편이 떨어지자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새카맣게 곡선의 형태를 띄는 벽과 가로 새로의 흰색 줄이 격자로 되어 있어 마치 무언가의 설계도면과도 같이 생겼었다. 거대한 파편들은 하나둘 지면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지금부터 달려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크기의 파편이 진태를 향해 떨어지고 이었다. 체념한 듯 한 진태는 시선을 어느 한 빌딩의 옥상으로 돌렸다.
“저건... 악마인가? 아니면 외계인...?”
초점을 잃은 그의 눈에 밟힌 것은 종말의 진경을 지켜보듯 서있는 인간형태의 시커먼 무언가 였다. 하지만 악마라고 하기엔 무언가 슈트를 입고 있는 듯 한 날카로우면서도 기계적인 모습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황급히 눈을 뜬 한 소년. 악몽이라도 꾼 듯 호흡은 거칠어져 이었고 심장은 한동안 요동치고 있었다. 단말기의 시간을 확인한 그는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맛있는 냄새와 함께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사가 들려왔다.
“어 진태야~ 일어났어? 웬일이야 깨우지도 안았는데 일어나고? 금방 아침 되니까 세수부터 하고 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진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듯 진태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 하늘이 유리파편처럼 무너지고 사람들은 혼돈에 쌓이고 나는... 무언가 악마같이 생긴 로봇을 본거 같아...”
“푸핫...! 어제 무슨 SF영화라도 보고 잔거야? 아니면 잠이 덜 깬 거야?”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응? 뭔데~”
“여긴 어디지...? 분명 나는 학교 기숙사에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제희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묘한 정적과 함께 바삐 움직이던 제희의 손은 잠시 멈췄고, 진태를 향한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2편-
무언가 퀘퀘한 냄새와 침묵으로 가득한 한 병실. 침대에는 앙상한 몰골이 드러난 한 소년이 인공호흡기를 비롯해 여러 장치들이 그의 얼굴을 휘감은 듯 칭칭 감겨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기기가 눈에 띈다. 얼음짱처럼 차가워 보이는 은색의 기기는 마치 쇠로 만들어진 목베개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그의 옆에는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어디를 응시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초점을 잃은 맹한 눈으로 앉아있었다.
침대에 붙어있는 환자에 대한 정보란에는 ‘허진태’ 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의지 할 곳 없이 자신의 휴대폰만을 꽉 진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소녀의 교복에는 ‘허진실’ 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로서 둘이 남매라는 것이 추측되나 소녀의 너무나도 애절한 표정을 보아 유일한 가족이 아닐까 하는 구슬프기 그지없는 추측도 되었다.
“바보야.. 대체 언제 일어날 거야... 벌써 보름하고도 이틀이 지났어...”
분한 듯 소녀는 자신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움켜쥐었고, 소년을 감싸고 있는 장치들. 마치 목을 조르고 압박하는 뱀처럼 보이는 미덥지 못한 그것들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병원의 장치에는 한 가지 심볼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무한의 형태였으나 옆으로 뉘어놓은 모래시계와도 같이 각이진 모양새였다. 그리고는 가운데 교차점을 매섭게 가르는듯한 가로선이 있었다. 소녀는 이 심볼을 보고 잠시 과거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위급한 상태의 진태. 그 소식을 학교에서 전해들은 진실은 믿을 수 없었고 걱정되면서도 무서운 감정을 억누르고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위와 같은 이야기로 거짓을 전하겠는가... 진실의 눈에 비친 것은 머리가 피에 범벅되어 얼굴이 보이지도 않고, 전기 충격기에 의해서 상체가 들렸다 낙하되고 있는 진태의 모습이었다. 진실은 그대로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통곡하는 그녀를 병원의 직원들이 부축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녀가 도착한 방은 마치 경찰서의 취조실과도 같은 곳이었고, 방의 전면이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는 듯 한 은빛으로 가득했다. 그녀를 정신병자로 취급할 셈인가... 혹은 진태가 저와 같은 상황에 빠진 진상을 알기위해 진실의 알리바이를 물으려는 것인가. 하지만 진실은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도 오빠의 상태가 더욱 걱정 되었다.
그렇게 울음을 참았다 터트렸다를 20분정도 반복했을 무렵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철문이 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에 들어선 사람은 방금 막 수술을 마친 의사 인 듯 옷에는 핏자국이 흥건했고 마스크와 보호안경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의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정장을 입은 한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오빠는? 오빠는 괜찮나요!?”
“자 우선 숨을 붙이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네? 당분간이요? 제발 정확한 상태를 알려주세요 선생님...”
“험...”
의사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아 그녀와의 눈높이를 맞췄다.
“현재 환자의 상태는 코마상태입니다. 혼수상태로 의식이 깨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정말로 길어야 5주. 그 안에 깨어나지 못한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코, 코마...요?... 5주... 안돼요. 제발! 제발 우리 오빠 살려주세요!”
그녀의 통곡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고 아무런 위안도 해줄 수 없는 의사는 은빛 벽과도 같이 차갑게 시선을 피했다. 간호사들은 그녀를 진정시켰고, 다음 환자가 있는지 한 간호사가 추가로 방에 들어와 의사에게 속닥이더니 이내 방 밖으로 그녀의 시아에서 사라져갔다. 조금 진정이 되자 이전에 의사와 함께 들어왔던 정장의 남성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진실은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은 감정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듯 흐느낌과 가뿐 숨소리, 깊은 한숨들은 계속해서 나왔다. 한편 정장의 남성을 그와 그녀의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한 서류가방을 올려 무언가 꺼내기 시작했다.
“저.. 흑, 저희 보, 흑. 보험 같은 거 들 돈 없어 흑. 요. 돌아가주세요.”
“저희 기술이라면 오빠 분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칠흑 속 빛 한줄기,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그의 희망찬 한마디는 진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도 잠시 현실적인 걱정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희 돈 없어요.. 오빠랑 저 둘 뿐이란 말이에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또 다시 풀이 죽어버린 진실. 하지만 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장의 남성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돈을 요구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기술은 현재 테스트 중인 기술로서 지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테스트...요?”
돈을 요구하지 않는 다는 말은 현실에 발목을 잡힌 그녀를 풀어주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뒤이어지는 테스트라는 단어가 그녀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정장의 남성은 준비한 서류가방에서 타블렛 하나를 꺼내들었다.
“과학에서 빛보다 빠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그런게 있다고는 학교에서 들어본 것 같지만...”
“고등학교에서 다룰법한 내용은 아니죠. 하지만 빛보다 빠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바로 양자역학에서 그것이 존재합니다.”
‘양자역학’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이 듣기에는 생소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들어본 것 같다고 말했지만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오빠인 진태에게서 이 단어를 처음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듣기 싫은 헛소리처럼 들렸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혈육을 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기에 그녀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장의 남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가 양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두 개의 양자가 되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였던 A라는 양자의 형태가 변하게 된다면 그것과 연결 되어있던 B라는 양자의 형태도 변화하게 됩니다. 이때 서로 연결 되어있던 양자가 같은 형태가 되고자 할 때의 속도가 바로 빛보다 빨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양자 얽힘’ 이라고 칭합니다.”
남성의 설명은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함인지 혹은 그녀가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듣고 있는 탓인지 비교적 알기 쉬운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 다음이 살짝 고비였다.
“저희 회사는 뇌의 파장을 이진법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컴퓨터에 사용되는 바로 그 이진법입니다. 즉 인간의 뇌를 데이터의 형태로 컴퓨터에 이식을 시킬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뇌를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뇌의 파장을 데이터형태로 구사하기엔 아직까지 한계가 있지만 식물인간, 뇌사 그리고 혼수상태와 같은 뇌의 기능이 저하된 경우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 컴퓨터에 비유를 해드렸지만 사실 양자 컴퓨터로 작업이 진행되며 양자 컴퓨터는 이진법과는 다른 원리로 작동......”
어디까지 이해를 했을까. 멍해진 진실은 정신을 차리고 결론을 요구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죠?”
“... 현재 병실에 있는 허진태 학생의 뇌를 A로 가정하고 그것을 데이터화 하여 양자 컴퓨터에 이식한 뇌를 B라고 가정합니다. 컴퓨터에서 B뇌를 고치면 양자 얽힘의 원리로 인해서 A의 뇌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병원비도 없고 하나뿐인 혈육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진실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기꺼이 테스트 중인 기술이었지만 그것을 믿기로 하였고, 자신의 오빠를 맡겼다.
그렇게 보름하고도 이틀이 지난 현재. 진태의 의식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약을 마친 후로 그 정장의 남성을 다신 볼 수 없었고, 이상한 장치만 설치했을 뿐 치료가 어떠한 방법으로 진행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 수 없이 따진 결과 치료가 양자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뇌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뿐 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수상태의 환자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3주 정말 길어야 5주. 그 이상을 버티기는 힘들며 만약 버텨 내더라도 식물인간이 되어 끝내 1~2년 내에 사망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진태를 살리기 위해 그의 몸에 둘러져 있는 장치였지만, 진실에게는 오매불망 차가운 쇳덩이가 진태의 체온을 떨어뜨리진 않을까 미덥지 못한 요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꼭 쥐고 있던 그녀의 휴대폰이 강렬한 진동을 울부짖기 시작했다. 촉촉한 눈을 한번 문지르고 코를 먹고는 휴대폰의 화면을 켜 미리보기 창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구종원 으로부터의 메시지
-Talker한테서 메일이 왔어! 서둘러 아지트로 와
눈이 휘둥그레진 진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병실을 나가려는데.
“다녀올게 오빠. 아니 지금 만나러 갈게.”
-3편-
10평도 채 안돼 보이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어느 실내의 모습. 찢어진 커튼 사이로 햇빛이 내리꽂으며 그곳을 횡단하는 자잘한 먼지들이 비춰 보인다. 그곳엔 요란한 빛을 내는 거대한 컴퓨터 한 대. 마치 10대 이상의 컴퓨터가 무차별적으로 합쳐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케이블이 뱀 구렁텅이처럼 난잡하게 엉켜있었다. 컴퓨터가 내는 펜이 회전하는 소리,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삐빅거리는 소리, 구석 소파에서 들리는 코고는 소리...
정적의 하모니 속에서 5개의 모니터가 있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안경을 쓴 한 소년은 피아노를 치듯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쾅-쾅-쾅-
이들만의 연주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초를 치듯 들려오는 굉음.
“야! 구종원 빨리 문열어!”
“크헛..! 무슨 일이야? 짭새? 또 사고 친거야?”
“멍청아. 그런거 아니야. 침이나 닦아.”
구석의 소파에 누워서 코고리를 담당하던 덩치 큰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90도로 일으켜 세우며 잠이 덜 깬 듯 허둥지둥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밀번호도 알면서 왜 문은 두드리고... 크헙..!”
구종원이라 불린 안경 쓴 소년. 그는 궁시렁 거리며 현관으로 향해 문을 열어주려던 순간 문이 힘차게 밀리며 그대로 그의 안면을 가격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소파에 있던 덩치의 소년과 가장먼저 눈이 마주쳤다.
“오~! 덕배 하이~ 왠일로 일어나 있는 거야? 히히 그나저나 구종원 이자식 못봤어?”
“어......”
상황파악 중인 듯 덕배라 불린 덩치의 소년은 진실의 인사에 조용히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응?”
끼이잉 쿠웅- 삐립 삐립- 삐리립.
현관문이 닫히자 그녀의 시선에서 보이진 않던 종원이 얼굴이 빠개진 채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너... 이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거지...!”
“히익! 미안! 내가 다음에 치킨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두 마리 사올게!!”
진실은 눈을 딱 감고 양손을 붙여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3초쯤 지났을까 주변이 조용해 실눈을 떠보자 종원은 마치 무슨 일이 이었냐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치켜 올렸다.
“뭐하고 계시죠?. 거기 의자 갖고 어서 오십쇼.”
‘으아... 치느님 만세...’
시끌벅적함이 조금 가시고 방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서 3인방의 회의가 시작 되었다.
“그래서. Talker에게서 온 메일은?”
“어. 확실히 우리가 찾던 내용이 담겨져 있었지... 이런 면을 보면 녀석을 정말 소름이 돋더라고...”
“그렇다며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지! 서둘러...”
“그전에 알아야할 사항들이 있어.”
분위기는 묘하게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수대의 컴퓨터들만이 속닥이듯 조용한 소리를 내었다.
실내의 풍경. 그들의 대화 내용으로 짐작했듯이 이들은 해커이다. 비록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그들이 속한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집단에서의 신분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Talker라는 인물은 그들 집단 내에서도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해커로서 해결사라 불리기도 한다.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인 만큼 표면적으로 리더가 없고 어떠한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규모를 이루고 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Talker가 가져오는 소스들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그의 능력은 인정받아왔다. 여러 해커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선봉대장의 모습이었고, 어떠한 의뢰도 해결하는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해커들 사이에서는 그가 고도의 AI가 아니냐는 우스게 소리도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너. Talker에게 이 일을 의뢰한지 몇 일만에 메일이 온지 알아?”
“음... 대략 일주일?”
“6일하고도 7시간 38분이 지났다고!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의뢰는 단 한 번도 없었어...”
“... 이럴 때 보면 넌 Talker의 스토커 같다니까... 그 사람도 알고 보면 우리 같은 학생일지 어떻게 알아? 학업에 충실 하느라 조금 늦었을 수도... 아니면 감기에 걸렸거나... 엄크라도 떴거나...”
“내 환상을 깨지 않았으면 좋겠군... 여하튼.”
종원는 누구보다도 Talker의 능력을 인정해왔고 그를 멘토로 삼을 정도의 광팬이기도 하다. Talker가 지금까지 어떠한 사건을 해킹하여 대중에게 공개하거나 다른 해커의 제보를 받고 그것을 알아내기에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늦어도 48시간을 넘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의뢰는 이례적으로 이전의 업적들에 비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Talker가 그만큼 버거워한 것일까. 이점은 종원의 망설임을 사기에 충분했다.
“Talker가 보낸 메일에는 우리가 원하던 모든 정보들이 담겨 있었어. 그곳에 액세스 가능한 어카운트를 포함해서 말이야. 하지만 가히 충격 적이더군...”
종원은 콧등으로 내려온 안경을 다시 치켜 올렸다, 그의 안경에는 햇빛이 반사되었고 듣고 있던 덕배는 침을 꼴깍 삼키며 진실은 쓸데없이 고조되는 분위기에 갈 곳을 잃은 시선 주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으흠.. 이해하기 쉽도록 간추려서 말해주지. 첫째 현재 진태형의 의식이 있는 가상의 세계의 이름은 ‘프로젝트UX’ 이라는 코드명으로 되어있다. 둘째 그곳의 시간은 현실보다 월등히 빠르다. 현실에서의 1분은 그쪽에서 1시간. 셋째 그곳은 현실에서의 7일 기준으로(그쪽 기준으로 420일) 모든 사람의 기억을 포함한 세계전체가 리셋 된다. 넷째 의뢰내용과 달리 의학을 위한 것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무언가의 시뮬레이션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ps. 어카운트 하나를 해킹했다. 하지만 너무 깊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
“전에 정장의 남자는 새로운 의료기술의 테스트라고 했지? 하지만 Talker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어.”
“아니... 그래도 난 가봐야겠어.”
“앞으로 20분 후면 Talker가 말한 대로 그쪽 세계는 초기화가 진행돼. 어쩌면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마지막 기회라고?”
“보름이나 지났잖아... 진태형의 현재상황으로 다음 리셋(7일)을 기다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쪽 진태형이 이쪽에 대한 기억이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아마 네가 누구인지도 잊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앞에 나타나 이곳은 모두 가상의 세계입니다. 깨어나세요 용사여. 라고하면?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면 어쩌라고!”
“세계가 리셋되기 전의 기억을 리셋이 된 후에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 그렇다면 설득하는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헉 넌 천재야! 그래서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그래서 급조한 것이 있어. 모든 기억을 백업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이전의 기억들이 데자뷰처럼 머릿속을 맴돌게는 할 수 있을 거야.”
“좋았어! 그래서 그곳에 로그인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양자 컴퓨터의 가상세계라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일반 컴퓨터로 접속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래서 어느 대학의 양자컴퓨터를 해킹해서 접속을 시도할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VR장비를 사용해야만 해.”
“잠깐...그 게임에 사용하는 VR 말하는 거야?”
“맞아. 하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할 것이 있어. 첫 번째로 해킹한 양자컴퓨터가 언제 발각될지 몰라 만약 발견 되면 즉각 차단이 될 거야. 즉 그쪽이나 이쪽이나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두 번째로는 현재 이 방에 있는 VR장비로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이 불가능 할 거야. 세 번째는 그쪽 세계에도 백신같은 프로그램이 존재할 수도 있어. 우리가 사용할 어카운트를 바이러스로 인식해서 공격할 수도 있어. 이때 어카운트가 손상되면 다시는 이 어카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돼. 꼭 백신 뿐 만이 아니더라도 어카운트가 손상되면 절대 안돼. 앞서 말했듯이 이 VR장비로는 움직임이 제한 되. 그러니 쓸데없는 교전은 피해야해. 네 번째 허진실. 네가 사용할 계정의 아바타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림자 효과를 추가했어. 따로 얼굴을 숨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래도 정체가 들통 나지 않게 조심해야해. 마지막으로... 앞서 말했듯이 그쪽의 시간의 흐름은 이쪽보다 월등히 빨라. 네가 그곳에서 5시간을 보냈다 해도 이곳에선 5분밖에 지나지 않은 거야.”
“어...... 계속 진행해봐...”
“으... 다시 말해 우리와의 실시간 통신은 불가능해. 네가 무언가의 신호를 보내고 그에 대한 답을 이쪽에서 1분 안에 보낸다 해도 그쪽에서는 이미 1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수신이 되”
“음... 접수 완료! 덕배~! 장비는 모두 준비되어 있겠지?”
“물론! 나는 치킨보다 피자가 좋아...”
“오케이! 다녀오면 저녁으로 피자나라치킨공주다!”
종원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수많은 인파의 발소리. 신호에 걸려 멈춰 있는 차량들의 엔진소리와 경적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내의 한복판. 하지만 그런 곳과 경계선을 긋듯 햇빛도 들지 않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골목. 왠지 모를 퀘퀘한 냄새와 습기까지. 골목의 저만치에는 어렴풋이 시내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골목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교복을 입은 한 소년과 후드모자의 그늘에 얼굴의 윤곽도 보이지 않는 괴한이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야!... 내 단말기에 보낸 코드 메시지도 보낸 것도 그쪽이 한 짓이지!?”
“...시간이 많지 않아...”
변조된 기계의 목소리. 얼굴이 보이지 않아 후드의 말하는 입모양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그가 내뱉은 말은 마치 직접 몸에 꽂히듯 전신에 울려 퍼졌고, 그로인해 두려움을 증폭시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위화감을 느낀 진태는 무언가 호신용으로 삼을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고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한 순간 그의 시아에 후드 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방심하기도 잠시 등 뒤에서 오한이 느껴져 돌아보려던 순간.
“끄앗...! 무. 무슨 짓을...”
주사? 전기 충격기? 후드 녀석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진태의 목덜미를 가격하였다. 곧바로 진태가 쓰러지려는 듯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자 후드 녀석은 곧바로 진태를 부축해 천천히 바닥에 앉혀 건물 외벽에 등을 댈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기시감이 드는 경험을 한다면 모두 의심해야해. 일이 잘 풀린다면 의심부터 해라. 나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잖아. 다음에는......”
정신을 잃어가는 진태. 그렇게 시아도 흐릿해져 갈 무렵 후드의 기계음은 또다시 온몸을 통해 전해졌지만 마지막 한 마디 만큼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것이 바로 진태와 진실이 이곳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재회의 모습이었다.
“좋아.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아. 첫 번째로 암호메시지. 그런거에 환장하는 오빠의 특성을 제대로 노렸네. 안 걸릴 수가 없지. 이런 점 하나는 알아줘야한다니까. 두 번째로 종원이 만든 프로그램을 오빠의 몸에 투여... 음... 프로그램을 투여 한다라... 어쨌든 마지막 세 번째 무사히 로그아웃. 그런데... 로그아웃은 어떻게 하는 거지?”
잠시 고민에 빠진 진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골목 끝에서 순식간에 돌진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그대로 하늘로 높게 뛰어 올랐다. 마치 맹금류가 먹잇감을 낚아채 상공으로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헙”
한편 현실세계 쪽의 종원.
“6분 지났어. 등교시간부터 방과 후 시간까지는 충분히 지났을 터... 설마 이 녀셕...”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먹은 듯 땀 한줄기가 종원의 뺨을 타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VR장비를 착용하고 있던 진실은 갑자기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진실의 목을 조른 채 높은 빌딩의 옥상에 착지한 무언가. 그것의 모습은 시커먼 몸체에 날카로운 날개. 각지면서도 기계적인 악마의 모습이었다. 진실의 목을 조르고 있는 기계 팔은 진실의 목에서 자신의 방향으로 혈관 같은 것을 통해 무언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혈관에는 전기 신호 같은 불빛이 번쩍였고. 그것이 진행될수록 진실의 얼굴을 가려주던 그림자의 효과가 점차 사라지며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실은 숨을 쉴 수 없는 듯 저항할 수 없었고, 현실의 진실의 육체도 호흡의 곤란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덕배는 걱정어린 말투로 말했다.
“조,종원. 이거 강제로 때어낼까?...”
“안 돼! 그랬다간 어카운트를 포기하는 거야! 그 후에 진실 녀석의 뒷감당이 안된다고!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실의 시선에서 보이는 기계악마의 얼굴.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Talker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생각해!... 아!”
그때 종원은 이전에 진실에게 말했던 주의사항 중 한 가지를 떠올렸다.
‘첫 번째로 해킹한 양자컴퓨터가 언제 발각될지 몰라 만약 발견 되면 즉각 차단이 될 거야. 즉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좋아... 이번만큼은 자수를 해주지...”
종원은 양자컴퓨터를 해킹한 것을 자진해서 발각되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쪽은 빠르게 종원의 IP를 차단했는지 예상대로 진실의 어카운트도 강제적으로 로그아웃이 되었다. 종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VR장비를 착용 중이었던 진실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진실의 목을 조르고 있던 기계악마의 팔은 허공을 향해 뻗어있을 뿐이었고, 그것은 여유롭게 하늘이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의 파편처럼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4편-
해가 저문 오후 8시경. 진태는 한강 근처의 편의점에서 캔 음료수와 감자칩 한 봉지를 사들고 적당한 잔디밭에 앉았다. 왜 하필 감자칩 이었을까. 그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익숙한 듯 그것을 집어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하아... 진짜 내가 개꿈을 꾼 걸까?...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말이지. 강 건너의 저 시커먼 곳을 보면... 도저히 납득이 안돼.”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그가 바라본 곳은 강의 건너편. 이전에 ‘강남’ 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높고 화려한 빌딩들은 온데 간데 없고 한 점의 불빛도 보이지 않는 그저 칠흑의 땅이었다. 그곳과 연결되는 대교들은 대부분이 부서져 있었고, 단 세 개만이 이전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폐쇄된 상태였다.
“내가 알던 강남의 모습은 저렇지 않다고... 후우... 하루나 지났어. 이곳이 꿈인 것 같지만, 여기가 현실인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진태는 한숨만 반복하며 오늘 학교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8시간 전 -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어느 교실의 모습. 선생님은 터치스크린으로 된 칠판과 여러 가지 홀로그램들을 띄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책상에 구비된 모니터를 통해 필기를 하는 학생도 있는 반면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초집중 하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위치한 진태는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 거북목이 될 정도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뉴스 기사와 현대 사회에 대한 글들을 읽고 있었다.
‘음... 그니까 XX위키가 정리해 보면. 12년 전 일부 강북 지역을 포함한 강남 일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강남에 집중된 대기업들은 물론 정치기관과 관련 인사들이 대거 휘말렸다. 그로인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송두리째 휘청이기 시작했다. 여러 주변국가와 외국들은 난민 구조와 국가재난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것은 모두 주인 없는 이 땅의 실권을 잡기 위한 늑대들 이었다. 하지만 그때 [유닉스] 라는 기업이 돌연히 나타났다. 그들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손상된 건축물을 복원했고, 불과 5년 만에 손상된 강북을 이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복구시켰다... 음...
그 후 유닉스는 대한민국의 부흥에 앞장섰다. 무정부 상태인 이 나라에 다시 질서를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정권은 물론 이윽고 군사력을 포함한 패권까지 거머쥐게 된다. 아니... 이게 가능한 일이야? 독재정치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분명 반발의 목소리가 있을 터... 어디보자.
국가의 모든 것을 한 기업이 맡게 되는 것에 반발할 우려가 있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기술력, 각종 복지시설과 난민구조, 그리고 정치적 질서까지 그 무엇 하나 민심의 반발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남 일대는 복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유닉스 측에서는 강남 지역은 심각한 방사능 수치가 검출되어 섣불리 접근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방사능 이라고? 무슨 핵폭발이라도 일어난 거야? 이 폭발에 대해서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군...
강북 복원 후 1년. 자신들을 [블랙리스트] 라고 칭하는 반유닉스 집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강남의 생존자 이며, 그곳에 방사능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유닉스는 폭발에 대한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으며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럼 그렇지... 평화롭다 했어.‘
혼자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는 진태. 강남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탓인지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곳이 허전한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도 비슷하지만 어딘가 달라...”
한편 진태의 옆자리에 있던 불규칙하게 자른 듯한 샤기컷의 여학생이 날카로우면서도 의심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다시금 현재로 돌아와 학교에서 풀리지 않은 진태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감자칩 봉지에 손을 넣었으나 어느새 다 먹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아... 생각하면서 먹으면 이렇다니까. 먹었는지도 모르겠네. 에휴.”
진태는 그대로 잔디에 드러누워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몬드 빼빼로를 샀는데 마치 누드 빼빼로가 하나 껴있는 것 같은 이 부자연스러움. 위화감은 뭘까. 내가 누드 빼빼로 인가... 기억에는 없지만 학교 출석부를 봤을 때 모두 출석 이었어. 유닉스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라... 음... 진실?’
진실이라는 단어.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그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뭘까. 익숙하면서도 답답한 이 느낌.’
그때 드러누워 있던 진태의 다리부터 그림자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눈까지 올라오고서야 눈치 챈 진태는 위험을 감지한 듯 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네가 아담이냐”
“......”
그의 시아에 들어온 것은 망토처럼 긴 검은 로브를 입은 빨간 눈을 가진 탈을 쓴 무언가 였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탈을 쓰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차림새의 두 명이 진태를 포위하고 있었다.
“질문을 바꾸지. 기계 악마를 보았느냐”
“기계... 악마!?”
기계 악마. 진태의 기억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이미지. 그는 어느새 접근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검은 로브의 괴한들보다도 기계 악마라는 단어를 듣고서 공포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얼어버릴 수는 없었다. 진태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형씨들. [블랙리스트]지?”
“질문은 이쪽이 먼저 했을 텐데?”
“어. 봤고 말고, 당신들은 뭔가 진실을 알고 있는 듯 한데. 경우에 따라서 협력해줄 수도 있지.”
“네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지?”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아담’이다.”
평소의 진태라면 이런 괴한들을 앞에 두고 그대로 얼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대한 궁금증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그 공포감을 앞서갔던 걸까. 그는 생각하는 것들을 곧바로 내뱉기 시작했다. 아담. 그는 그게 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으로 보아 블랙리스트가 찾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태에게 그것을 물었을까. 처음이자 마지막 일수도 있는 기회. 도박이지만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
잠깐 정적이 흐르고, 어딘가 싸한 진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잠시만... 아담이라는 걸 원하는 것일까. 노리는 것일까...?...’
그때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빨간 눈의 탈을 쓴 자가 허리 뒤쪽에서 리볼버 하나를 빼어들었다. 너무나 빨랐던 손은 볼 수 없었지만 리볼버의 새하얀 은빛만은 진태의 홍채를 수축시켰다.
-탕-
“흐아아앗!”
“어. 일어났냐?”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진실은 헐레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억... 허억... 나 몇 분 동안 이러고 있었어!!?”
“30분.”
“30분......”
“어. 그쪽에선 30시간이 지났어.”
“젠장! 그 기계 악마 같은 놈은 대체 뭐지!”
“아마도 내가 말했던 백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너.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잘 알고 있네...”
“그런 것쯤이야 어카운트의 활동 로그를 조회해보면 알 수 있지.”
“그렇구나... 그것도 그런데... 왜 그렇게 텐션이 다운되어 있어?”
“......”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 종원 이전과는 달리 굉장히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말투였다. 옆에 있던 덕배도 마찬가지로 말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실은 옆에 있던 덕배를 팔꿈치로 툭툭 치고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야 덕배. 제 상태가 왜 저래?”
“어... 진실을 강제 로그아웃 시키려고... 해킹한 것을 자진해서 발각 당했어.”
“!!....”
진실은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해커에게 있어서 꼬리를 잡힌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더욱이 그것을 자진해서 잡혔다는 것은 그만큼의 프라이드를 포기한 행위이다. 정보를 빼돌려 그것으로 협박, 보복, 공개 하는 해커의 입장에서 그 반대의 입장에 놓이게 된 셈이다.
진실은 종원에게 섣불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기에 감사의 인사만은 건네야 했다.
“야... 미,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니. 신경 쓸 것 없어. 로그아웃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 내 잘못도 있고, 나는 Talker에 미치지 못하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
“신경 쓸 것 없어. 덕분에 초심을 상기했으니까. 언제까지 그렇고 있을 거야? 일로 와서 이걸 좀 봐바.”
“어?.. 응.”
종원의 말투에서는 이전처럼 활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 때 보다도 침착한 상태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실은 그의 뒤로가 그가 띄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조사해봤어. 그쪽 세계에 있던 사람들의 신원 목록. 그리고 이쪽은 진태 형이 입원 중인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받은 환자 목록.”
“!!!...”
두 명단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병원 쪽 명단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쪽 세계의 명단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현재 입원 중인 환자의 명단뿐만 아니라 6년 전, 8년 전, 10년 전의 환자들까지 포함 되어있었다.
“적어도 이 말도 안 되는 실험은 10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는 거야. 병원 측 명단에 한해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 10년 이지만 두 명단에 교집함이 없는 사람들은 더 오래전부터 그쪽에 이었던 걸지도 몰라.”
“그러다는 건...”
“어. NPC같은 게 아니야. 전부 살아있는 사람들이야. 현실에 육체가 없는 사람들 까지 포함해서.”
진실은 등골이 오싹해 졌고, 식은땀 한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현실에 육체가 없는 사람들. 즉 죽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곳은 이곳과 다름없는 현실로 느껴질 것이고, 이쪽에서 본 그곳은 사후세계임과 동시에 사람의 생명으로 실험을 가행한 비도덕적이기 그지없는 실험실일 뿐이었다.
“나온 사람... 저 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기록에 없는 거야!?”
“... 단 한명. 9년 전 뇌사 상태에서 이 치료를 받고, 아니 이 실험을 통해서 살아 돌아온 이가 단 한명 존재해.”
종원은 모니터에 한사람의 프로필을 띄었다. 9년 전 18세(현 27세) 화재로 인한 사고에서 유독가스 과다 흡입, 중독으로 인해 뇌사 판정. 하지만 기적적으로 4주 후 의식 회복.
해당 인물의 프로필 사진에는 불규칙하게 자른 듯한 샤키컷의 여학생 이었다.
-5편-
“형씨들. [블랙리스트]지?”
“질문은 이쪽이 먼저 했을 텐데?”
“어. 봤고 말고, 당신들은 뭔가 진실을 알고 있는 듯 한데. 경우에 따라서 협력해줄 수도 있지.”
“네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지?”
“내가 해킹 하는 기술 하나는 타고났지. 유닉스 정도 해킹하는 거야 손쉽지.”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제까지의 긴장감이 살짝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짐작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짧은 순간 후드에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 진태의 뇌리에 무언가 문뜩 스쳐지나 갔다.
‘잠깐... 해킹이라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그런 걸 해본 기억은 없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해 버렸어...’
그러던 그때 진태의 당황한 기색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빨간 눈의 가면 녀석이 날카로운 질문을 내리꽂았다.
“네놈이 알아낸 게 뭐가 있지?”
진태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질문이 이 테스트의 마지막 질문 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질문은 지금의 진태에게 있어서 최악의 질문 이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 고작 하루. 그 역시 이곳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때 요동치던 진태의 동공이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를 잡더니.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아담’이다.”
평소의 진태라면 이런 괴한들을 앞에 두고 그대로 얼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대한 궁금증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그 공포감을 앞서갔던 걸까. 그는 최후의 한수를 내뱉었다. 아담. 그는 그게 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으로 보아 블랙리스트가 찾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태에게 그것을 물었을까. 마지막 기회. 도박이지만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어딘가 싸한 진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잠시만... 아담이라는 걸 원하는 것일까. 노리는 것일까...?...’
그때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빨간 눈의 탈을 쓴 자가 허리 뒤쪽에서 리볼버 하나를 빼어들었다. 너무나 빨랐던 손은 볼 수 없었지만 리볼버의 새하얀 은빛만은 진태의 홍채를 수축시켰다.
- 탕 -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잠시 후. 몸을 움츠린 채 눈을 질끔 감고 있던 진태는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의 홍채를 수축 시켰던 은빛의 리볼가 발하는 빛이 여전히 그의 동공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의 총구가 향한 방향은 진태 쪽이 아니었다. 그의 뒤 훨씬 먼 어딘가 였다.
“빗맞췄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오지 않으면 두발로 걸어서 집에는 못갈 거다.”
빨간 눈의 가면을 쓴 자는 무슨 인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섬뜩한 경고를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총구가 향한 방향의 수풀에서 한 사람이 한쪽 팔부터 내밀며 이내 양손을 들고 침착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죄, 죄송합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어요!”
“여, 여제희!? 너가 왜 여기...”
빨간 눈의 가면을 쓴 자는 제희의 얼굴을 보고나서 진태의 반응을 살피듯 둘의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거, 거기 덜떨어진 남자애는 제 친구입니다...!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제가 보상해 드릴게요! 한번만 못 본 척 넘어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
‘난 딱히 잘못한 게...’
가면 쓴 자는 잠시 후 은빛 리볼버를 다리 허리춤에 수납하였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180도 틀었다. 이내 자리를 떠나려는 듯 한걸음을 내딛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진태를 처다 보았다. 진태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분명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살기를 띈 붉은 안광이 말해줬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친 것처럼 굳어버린 진태. 녀석의 붉은 안광은 마치 한순간에 모든 살기가 응축된 것만 같았다.
얼마 후 제희는 진태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블랙리스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고, 제희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곧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 멍청아!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 나는...”
“싫어. 듣기 싫어! 다 네가 잘못한 거야!”
“...... 그래 미안해... 이만 돌아가자... 으잇;; 제발 울지는 말아줘..!”
평소의 새침하면서 당돌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그것은 마치 혼자 집을 보고 있던 어린아이가 예상보다 늦게 귀가한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진태는 그런 그녀를 토닥이며 자리에 일어서려 했다, 긴장이 풀려서 였을까. 그의 다리는 힘없이 휘청 거리며 중심을 잡기 힘들어 보였다.
한편 현장을 벗어난 블랙리스트.
그들은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과도 같은 강남의 폐허들의 옥상을 횡단하고 있었다.
“보스. 정말 녀석이 아담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녀석이 한 말은 뻥카야. 하지만 녀석의 도박이 먹혔어.”
“그 말은...!”
“기계 악마를 보았고. 이곳에 대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소녀. 녀석이 진짜 아담이라면 그녀는...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의미심장한 대화를 하는 그들. 그들은 마치 급하게 도주하는 듯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때.
“크헛!!...”
“!!!”
왼쪽에서 뒤따라오던 블랙리스트 한명이 고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빨간 눈의 가면을 쓴 자와 오른쪽에서 뒤따라오던 자가 서둘러 부상당한 일원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의 접촉을 막는 듯 그들의 발 앞에는 20cm 정도 되어 보이는 단검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두발로 걸어서 집에는 못갈 거다~ 꽤나 섬뜩한 말씀이군요. ‘적안탈’씨?”
“......”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화려한 제복을 입은 한 남성이었다. 그는 빨간 눈의 가면을 쓴 자를 ‘적안탈’이라 부르며 단검을 던진 것이 자기라는 것을 과시 하듯 단검 한 자루를 오른손으로 휙휙 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흥미 있는 건 적안탈 뿐입니다. 나머진 사라져 주시죠.”
제복의 사내는 도발적인 말투로 말하며 그들의 심기를 자극하듯 이전에 다리를 다쳐 피를 흘리고 있던 블랙리스트의 손 등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끄아아아악...!!”
그는 고통을 호소했고 지켜보던 오른쪽의 일원이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제복의 사내에게 돌진하려 하자 적안탈은 오른팔을 뻗어 그의 돌진을 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흠칫 하며 신호를 주었다.
‘부상자를 데리고 이곳에서 이탈해, 녀석은 내가 상대하겠다.’
일원은 애써 분노를 참으며 부상자를 부축해 현장에서 빠르게 이탈했다.
적안탈과 제복의 남성. 둘은 달빛에만 의존한 채 서로를 응시했다.
“그 제복을 보아하니 ‘고기동대’ 소속이군. 어째서 우릴 추격 했지”
“하하. 유머러스한 분이라고는 못 들었습니다만?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유닉스에 비협조적인, 당신 같은 테러리스트 집단을 상대하기 위해 결성 된 게 고기동대입니다. 사자가 사슴을 쫓는 것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 내가 묻고 있는 건 사슴이 왜 사자의 영역에 발을 디뎠냐는 의미다!”
적안탈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발밑에 제복의 사내가 던졌었던 단검을 빼들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 도달하였다. 제복의 사내는 그 단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 미국 경찰들이 주로 휴대하는 ‘톤파’를 꺼내들어 자신을 방어했다. 공격이 막힌 적안탈은 재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상대의 톤파를 발판 삼아 공중으로 도약 했다. 그리고는 이전에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반대로 그의 발밑에 5개의 단검을 내던졌다. 그 후 둘은 다시 대치하기 이전의 거리로 되돌아갔다.
“과거 경찰이라는 조직을 모방한 유사 집단이 단검이라니. 유닉스는 이딴 장난감 사용법을 훈련이랍시고 가르치나 보지?”
이번에는 적안탈의 도발을 하였다. 그가 방금 보여준 기술은 마치 ‘이런 시시한 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잠시 후 제복의 사내는 방금 전의 교전으로 인해 비뚤어진 정모를 고쳐 쓰고, 하얀 장갑 당기며 말했다.
“그건 제 개인적인 취미입니다. 잠깐의 여흥이 거리가 되었다면 영광입니다.”
“칫, 끝까지 재수 없는 자식이군.”
“제가 들은 바로는 육탄전이 특기라고 하시던데. 한 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요청과 함께 제복의 사내는 이번에 양손에 톤파를 장착해 본격적으로 싸울 자세에 돌입한 듯 보였다.
“......”
적안탈은 잠시 후 경기 시작의 사이렌이 울리는 망토를 펄럭임과 동시에 또다시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적안탈은 공격 보다는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는지 이번에는 톤파를 오른 팔로 꽉 붙잡았다.
“!!!”
“왜. 이런 건 들은 적 없나 보지?”
철로 된 톤파에 스크래치가 날 정도로 꽉 붙잡은 적안탈의 팔은 붉은 손톱이 나있는 건틀릿 이었다. 그것은 마치 진태가 보았던 기계 악마의 팔과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6편-
“나온 사람... 저 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기록에 없는 거야!?”
“... 단 한명. 9년 전 뇌사 상태에서 이 치료를 받고, 아니 이 실험을 통해서 살아 돌아온 이가 단 한명 존재해.”
종원은 모니터에 한사람의 프로필을 띄었다. 이름 ‘최여란’, 9년 전 18세(현 27세) 화재로 인한 사고에서 유독가스 과다 흡입, 중독으로 인해 뇌사 판정. 하지만 ‘유닉스’사의 신의료기술로의 치료 후 기적적으로 4주 후 의식 회복.
해당 인물의 프로필 사진에는 불규칙하게 자른 듯한 샤키컷의 여학생 이었다.
“유닉스... 그 검은 정장의 남자가 속해 있는 회사의 명칭인가.”
“분명히 그럴 거야. 유닉스라는 이름은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어. 하지만 너무나 희박한 단서에 관련된 내용은 전부 가짜라고 생각 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어. 그래서 해커들 사이에서도 그저 도시 괴담의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었지... 하지만 이런 일에 연관이 되어있을 줄이야...”
“생환자...? 라는 표현이 맞을까. 그 최여란 이라는 분의 신원 파악은 가능 한 거야?”
“그야 당연히 현주소와 근황까지 파악은 했어. 하지만 혹여나 그녀를 만나러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가서 단서를 얻어내야지!”
“그분에게 있어서 그곳에서의 기억이 남아있을까? 설령 남아있다고 해도 그 기억이 그녀에게 있어서 악몽 같은 기억일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그녀의 입장에서 현재까지 같은 실험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시는 그로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끔 할 거야!”
“하아... 모든 사람이 너처럼 강인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네가 존경하는 Talker라면 어떻게 했을까? 바로 조사 한 다음 세상에 공개했을 걸?”
“너......”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자! 덕배는 여기 남아서 집 지켜줄 수 있지?”
“어? 응...”
진실과 종원은 현재 진태와 같은 의료술을 받고 완치를 한 유일한 사람인 최여란 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9년 전 그 여성의 주소는 경북의 한 시골이었다. 하지만 사고 당시 근처 병원으로 호송 되었었으나 치료가 힘든 상황이었고 유닉스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 다시금 서울의 큰 병원으로 호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퇴원 이후 그녀는 어째서인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에 거주 중인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때문에 진실과 종원이 그녀가 현재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시내에서 많이 떨어진 작은 동네. 오늘날 많은 재개발로 인해 대부분이 인간의 거주지는 대부분 아파트로 대체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방문한 이곳만큼은 아직까지 재개발이 진행이 되자않은 몇 안 되는 곳 중 한곳 이었다. 높은 건물 보다는 허름한 주택.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최대 3층 정도밖에 안 되는 빌라들이 빼곡히 즐비해 있었다.
“정말 여기가 맞아?”
“내 정보 수집 능력을 의심하는 거야? 참 오늘 여러번 스크래치 나는 구만...”
“아니 거기에 태클 거는 건 아니지만...”
도시에서 자란 진실은 이런 옛날 풍경의 동네가 마냥 낯설었다. 그래서 인지 종원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물었던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이곳이 맞아. 하지만 사람 찾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지. 우선 주소와 일치하는 집으로 향하겠지만 그곳에 그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뿐더러, 우리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어. 사실 후자의 경우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종원과 진실은 정돈 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갔다. 그 길은 언덕으로 이어졌고 그 언덕의 끝까지도 허름한 주택들은 빼곡히 즐비해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어느 한 주책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주택은 다른 주택들 보다는 비교적 정돈 된 모습이었다.
“여기야...?”
“어. 여기야.”
“그럼 바로 누른다!”
“자. 잠깐...!”
-띵 동~-
예상 했던 것과는 다른 힘 빠지는 치지직 소리와 함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5초가량이 지났을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진실은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종원이 입을 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마.”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오빠가 있는 곳에서는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는 거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현재 우리의 시간을 봐.”
“시간은 왜?”
“오후 2시 20분.”
“뭐. 하직 해가 떠있으니까 여유를 갖자는 거야?”
“음 그것도 일리가 있네.”
“...죽을래...?”
“일단 이 동네를 조금 더 둘러보자.”
“야 기다려!”
종원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진실이 서둘러 따라가기 시작했다. 10분쯤 걸었을 무렵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둘은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것은 작은 동네의 놀이터였다.
놀이터에는 7~8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미끄럼틀에 그네, 철봉, 모래사장 까지. 둘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둘의 눈높이에서 놀이기구들은 허름하기 그지없는 플라스틱과 페인트가 다 벗겨진 철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종원과 진실은 이와 같은 동네의 놀이터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현대화된 도시에서 살아왔기도 하며 종원의 경우 방구석 해커이다 보니 은둔 생활을 한 탓에 좀처럼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10초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정적을 깨는 진실의 팔꿈치가 다시 종원을 툭툭 쳤다. 그리고 그녀는 턱을 들썩이며 안 곳을 지목했다. 그리고 종원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이 있는 놀이터 구석 그늘아래 작은 스탠드. 그곳에서 아이들 족을 바라보는 한 여성이 평온하게 앉아있었다. 9년 전의 프로필 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헤어스타일 이었지만 이목구비만은 확실했다. 최여란. 그녀 본인이었다. 종원과 진실을 조심스레 그녀를 향했다.
“아, 안녕하세요.”
“...학생들이 이런 곳에는 왜...”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혹시 최여란씨 본인 맞으신가요?”
“...네. 저입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종원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의 한 사진을 띄워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의 모양 이었으나 옆으로 눕힌 모래시계처럼 각이진 형태였다. 그리고 그것의 교차점을 가로로 자르듯 그어진 선. 바로 유닉스사의 심볼 이었다.
“이것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진실과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다시 시선을 놀이터 쪽으로 돌렸다.
“소중한 사람이 위태로운 상태인가 보군요... 악마와 거래를 할 만큼...”
“!!!”
“제가 무엇을 대답해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오빠를 구해야만 해요!”
진실과 종원은 나란히 그녀의 옆 스탠드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여란씨는 조용했다.
“그곳에서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하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악마를 보았지요. 그 후부터 였을거에요. 그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은.”
“하늘이 무너졌다라... 이것이 초기화의 과정인가. 그리고 악마... 그 백신 프로그램을 말하는 건가...‘
“그 후 눈을 떴을 때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꿈같이 생생한 기억이 남아있었고, 어느 말 한마디가 각인이 되어있었죠. ‘아담을 찾아라’.”
‘아담...?’
“겉모습은 이전의 살던 곳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전에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되었죠. 그곳은 현재 두 비밀조직이 대립을 이루는 구조의 사회라는 것을. 그리고 그중 한 조직이 바로 보여주신 심볼의 주인 ‘유닉스’였습니다.”
“......”
“왜 나만이 이것을 인지하고 있을까.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때 한 사고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
“‘블랙리스트’라고 칭하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두 비밀조직 중에 유닉스에 대항하는 테러 조직 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로 구성이 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하늘이 무너지는 이전의 기억과 악마를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그렇다는 건 악마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전의 기억을 유지한 채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런 이레귤러를 남기는 거지. 잠깐. 설마 그 악마라는 녀석은 백신이 아니라 ’버그‘인 건가!?’
“저는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고 또한 유닉스 테러에 가담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어요. 매번 그들에게 패배한 결말로 저는 세 번의 무너지는 하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4번째를 맞이하기 전에 저는 그들에게 승리할 수 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이죠?”
“처음 악마를 보고서 각인 된 한마디. 아담을 찾아라. 바로 그 아담이 유일한 열쇠였지요.”
“대체 아담이 뭐죠? 사람인 것인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억이 지워져 있었어요...”
“이럴 수가... 핵심의 유출을 막기 위한 유닉스의 수작인 것인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저만이 도달했던 어느 공간에 정장의 남성이 나타나서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도달한 유일한 인간입니다. 이곳에서 ‘이브’로 남아 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누릴지. 아니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선택을 하신 거군요... 전자의 선택을 해서 유닉스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어째서 후자를 선택하신거죠!?”
“야... 실례잖아! 그게 무슨 질문이야?”
여란씨는 고개를 다시 놀이터 방향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종원이 시선이 향한 곳은 미끄럼틀에서 내려오고 있는 한 아이였다.
“......”
“그때 저는 임신 중인 상태였습니다. 18세의 나이에 임신을 해서 집에서는 쫓겨나고 저 아이의 아빠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자살을 시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몇 주 밖에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다시 학생으로서의 5년가량의 시간을 보내서 인지 저의 생각과 가치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했을 때 정장의 남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시뮬레이션에서 유일하게 유닉스에 도달한 인물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귀중한 샘플로서 이곳에 남기를 바라지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당신의 귀중한 데이터는 저희가 블랙리스트의 통솔자로서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름 하여 ‘적안탈’.